아직까지 싱글('아직'과 '싱글'이 함께 사용되어 발생되는 사회적 용인의 문제는 차치하자)인 난, 각종 이벤트에 초대를 받는 수혜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런 사회(학)적 지위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알 수 없기에 주어진 순간순간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진인사 대천명'을 가슴 속에 되뇌이며 말이다.
어제도 난 최선을 다했다. 자세는 흩트러짐 없었고, 목소리는 낮되 거만하지 않았으며, 시선처리의 형평성을 유지했고, 몸짓은 적절하게 과장됨이 없었다. 적당한 유머로 분위기는 애애했고, 상대방의 불명확한 의사 전달을 적절한 paraphrasing으로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여유 또한 잃지 않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적당히 낮은 조도는 생면부지의 어색함을 가려주기에 충분했고, 룸 안에 충만한 샹송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본능적 욕구마저 근접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 모두를 서로에게 충실하게 했다.
그녀들의 직업은 방송댄스 선생님이었다. 방송댄스도 정규교육과정이 있냐는 바람빠지는 질문에 불편한 기색없이 친절히 설명해주는 그녀들을 보면서 난 문득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일에 대한 열정, 내겐 흐릿해져 윤곽조차 희미해진 말이 그녀와의 대화속엔 넘쳐났다.
가벼운 와인과 서로의 눈빛으로 취해버린 우린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는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멍석은 깔려졌다. 그녀들의 현란한 가무(특히 '무')에 비하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는 노래방 조명은, 수학여행에서의 급조된 스위치 on/off 조명마냥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너무나 빨리 가버린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 웨이브가 눈앞에 아른아른한데 말이다.
'댄스'하면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가 생각나는 지금의 나도
"댄스"......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