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독서에 관한 18문답
1. 책상에 늘 꽂아두고 있는 책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
옥편(한한대사전, 명문당)
현대문학문화비평용어사전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
장자
변신 이야기
서양철학
현대시작법
논리철학논고
2. 어쨌든 서점에서 눈에 뜨이면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종류의 책들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
읽다가 삘이 꽂히면. 작가 면상 보고 사는 일은 없다. 이름값 보고 사는 일도 없다. 신간은 절대 안 산다.
3.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
모래의 여자 : 한 편의 시다! 영화화 되었다는데 볼 수 없는 게 한이다. 나는 이 소설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다.
비극의 탄생 : 광기 예찬!
숭고의 미학 : 숭고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진중권도 그중 하나인데, 안성찬은 더욱 쉽게 정리해 놓았다. 숭고에 관한 온갖 자료를 섭렵한 끝에 가장 좋은 걸 고르라면, 이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연구(이상섭) : 천병희 원전 번역도 좋지만, 영어중역이라고 해도 이 책이 더 좋다.
현대시작법 : 가장 자주 뒤적거린 책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 보다가 몇 번 울었다.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 시인이, 나랑 코드가 아주 잘 맞는다.
메이비 : 올해 많은 시/인들을 읽었지만 가장 울림이 큰 시인!
4. 인생에서 가장 먼저 '이 책이 마음에 든다'고 느꼈던 때가 언제인가?
초등학생 때. 단연 시튼 동물기다. 외갓집에 가면 이모가 항상 나를 데리고 대구백화점을 구경시켜줬다. 7층에는 책을 파는 매장이 있었고, 나는 항상 시튼 동물기를 골랐다. 일 년에 두 번쯤 외갓집에 가고, 이모를 만나고, 책을 사는데, 나는 몇 년간 시튼 동물기만 골랐다. 다른 판본으로 열댓 권 갖고 있었다. 착한 이모는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늘 내가 고른 시튼 동물기를 사 주었다. 사 들고 오면 엄마한테는 이상한 놈 취급 받았지만. 아직도 시튼 동물기는 완역되지 않았다. 완역이랍시고 선전하는 판본이 있기에 목차를 살펴보니, 내가 어릴 때 읽은 시튼 동물기 중에 누락된 게 무쟈게 많더라. 위니펙의 이리, 버지니아 아기 돼지 등등의 이름은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들인데.
5.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장길산 : 당시 경영학을 전공했다. 매니지먼트는 우리말로 두 가지 뜻이 있다. 경영, 관리. 경영학과에서는 관리가 더 많다. 그런데 뽀대나게 <경영>학과라고들 한다. 관리는 수위도 하는 거니까 말이다. 관리학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한다. 아니, <학>을 떼야 한다. 취업정보물색과 정도로. 윤리라곤 도토리 키 만큼도 없는 기업의 역사와 전략과 유통과정 따위 등을 분석해서 나중에 뭐가 될랑가? 남을 태연하게 속이는 것밖에 더 하랴. 그러다가 어느 날 장길산을 읽었다. 백만 날을 경영학 배워 봤자 써 먹지도 못하리란 걸 새삼 깨닫고, 나는 천민과 더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어떤 독한 자부심 같은 걸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겨운 학교를 때려 치웠다. 하지만 요즘은 이 책 거들떠도 안 본다. 이런 책 때문에 내 인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도 쪽팔린다. 장길산이 내 인생을 바꾼 건 사실이니까 남들이 뭐냐고 물으면 이 책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세상엔 좋은 책이 무쟈게 많걸랑.
죄와 벌 : 장길산이 내게 우산을 씌워 줬다면, 죄와 벌은 내게 우산을 들고 혼자 가라고 다독여 주었다.
6. 단 한 권의 책으로 1년을 버텨야 한다면 어떤 책을 고르겠는가?:
옥편
논리철학논고
현대시작법
죽음의 한 연구
구약/신약성서
그래도 한 권을 고르라면, 옥편
7. 책이 나오는 족족 다 사들일 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가?
신간은 안 산다니까. 바슐라르, 토마스 만, 박상륭, 체홉의 책은 신간이 나오면 중복되더라도 사 보는 편인 듯하다.
8.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데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책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엄두를 못 내다니? 읽고 싶으면 그냥 읽는다. 어려운 책은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저자나 역자의 문체가 엉망인 경우다. 외국어보다 우리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시길.
9. 헌책방 사냥을 즐기는가, 아니면 새 책 특유의 반들반들한 질감과 향기를 즐기는 편인가?
헌책방은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간다. 헌책에는 전 주인들의 사연들이 자주 남아 있다. 나는 그런 걸 즐긴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에 낙서(밑줄이랄지, 형광펜 사용이랄지)를 하지 않는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깨우쳤다. 나? 물론 책에 낙서를 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낙서 하는 괴쉐이들은 뭐냐. 새 책? 그것도 좋고. 헌책과 새책을 비교하자는 거 같은데, 헌책은 일단 싸서 좋다. 헌책방에 가서 책을 열 권쯤 골라 계산을 할라치면 3만원쯤 된다. 묵직한 책인데도. 그런데 책의 수가 많아서인지 돈이 아깝고, 아끼게 된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물리적인 돈의 촉감을 느끼지 않아서인지 3만원이면 그다지 많이 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인터넷뱅킹으로 처리해 버린다. 그래도 책을 네다섯 권 정도밖에 못 산다. 그렇다. 헌책은 촉감! 몸의 쾌감과 더욱 밀접하다.
10. 시를 읽는가? 시집을 사는가? 어느 시인을 가장 좋아하는가?
많이 읽는다. 많이 산다. 많이 좋아한다. 지난 학기 시특강 시간에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80년대 시인들 따위는 관두고 90년대 시인들을 읽자고 했다. "이성복이나 황지우 따위를 왜 우리들이 읽어야 합니까?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강의계획서를 왜 그렇게 짰어요?" 그래서 강의계획서는 완전 바뀌었고 죄다 90년대 시인들을 읽었다. 이번 해는 틀에 박힌 80년대 몇몇 루키들 따위 말고, 요즘 시를 세심하게 읽은 점에서 만족감이 크다. 수업시간에 다룬 시인들 중 마음에 들었던 건 김중식, 이원, 박형준, 함성호. 이윤학, 나희덕, 최정례도 그 시간에 다루었는데 너무나 싫었다. 아, 좋아하는 시인을 꼽으라고? 많다니까! 추천을 하고 싶다. 장영수, 진은영, 신용목, 조말선.
11. 책을 읽기 가장 좋은 때와 장소를 시뮬레이션한다면?
내 방 침대에 기대어 누워서 유자차를 마시며.
12. 혼자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주말 오후를 보낼 수 있는 까페를 한 군데 추천해 보시라.:
까페에서 왜, 어떻게 책을 읽나? 남들한테 고상하게 보이려고?
13. 책을 읽을 때 음악을 듣는 편인가? 주로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듣는가?:
음악 들으면 신경이 그리로 쏠린다. 주위가 산만한데 책이 잘 읽힐리가? 음악은 컴퓨터를 켰을 때만 듣는다.
14. 화장실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가? 어떤 책을 갖고 가는가? :
똥을 얼마나 오래 누면 독서가 가능한가? 똥 싸는 데 3분이면 족하지 않은가? 그보다 오래 누면 찝찝해서 어떻게 견디나. 화장실에선 똥만 싼다. 책은 남의 생각이 씌어진 것 아닌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잘 말했듯 변소는 몽상의 공간이다. 가장 은밀한 곳에서조차 자기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대체! 독서보다 몽상이 더 매력 있다. 거듭 말하되, 변소는 몽상의 공간!
15. 혼자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가? 그런 때 고르는 책은 무엇인가?: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책 읽는 놈이 있다면 욕을 해 주겠다. 그거, 관음증을 넘어서 변태 아닌가? 독서라는 관음증의 합리적 형태를 다시 원초적 변태화 시키는 게 밥 먹으면서 책 읽는 놈 따위가 아닌가 싶다.
16. 지금 내게는 없지만 언젠가 꼭 손에 넣고 싶은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 :
너무나 많다. 당장 돈이 생기면, 기초 희랍어, 라틴어 문법 등의 책을 사고 싶다.
17. e-book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e-book이 종이책을 밀어낼 것이라고 보는가? :
별로 아날로그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꼭 책에 대해서만은 보수적인 제스처를 취하더라. 이북도 나름대로 장점이 활용되면 좋은 거다. 환영한다. 인터넷의 속성상 오래 읽기는 힘들다. 책은 책대로, 이북은 이북대로 따로 쓰임새를 뽐내는 거지, 뭐가 뭐를 압도하고 자시고는 말도 안 된다.
18. 책을 읽는 데 있어서 원칙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원칙, 원래 - 이런 거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말이다. 그런 건 깨져라고 존재한다. 책은 내 꼴리는 대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