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데이.
이런 날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한 달전 무심코 집어 먹은 쵸콜릿이 생각나 그냥 넘어가긴 어려울 것 같은 느낌. 꼭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책상 위에 사탕과 쵸콜릿이 넘쳐나겠지만, 남들 다 하는데 빠지면 담합해서 왕따시킬까 두려워 아침 일찍 쵸콜릿을 사러 제과점에 갔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줘도 될 일이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재화(goods)의 전달이 받는 이에게 어떤 감흥을 안겨주리오. 말 그대로 남들 다 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집에 가져가다 잃어버려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그런 물건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일요일 오후, 친구 결혼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끄적인다.
to. 원만한 결재를 도와주는 모 여직원
책상위 결재판이 켜켜이 쌓여갈때
그대옥안(玉顔) 떠올리며 그대이름 외쳐보네
소인어찌 그대에게 이런부탁 편하겠소
눈물만이 하염없이 가슴속을 적시우네
항상 OO께 서류를 전달하는 직원들의 각골난망(刻骨難忘)한 심정을 노래한 시조로, 뜻하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여 유발된 내적 갈등의 절제된 표현이 단연 두드러진다.
to. 우리 부서 여직원
OOOO OO실엔 여직원이 한명있네
사막속에 오아시스, 황무지속 꽃이라네
챙겨주지 못한마음 가슴속이 시퍼렇네
이제부터 시작이네 이자까지 기대하게
지끔까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마음을 자괴적인 필치로 표현한 글로 마지막 행의 “이자까지 기대하게”를 읊을 때는 벅차오르는 감동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수 있다.
to. 자금부 여직원
하늘하늘 지결위에 숫자들이 즐비하네
한자한자 적은것이 애틋하고 꼼꼼하네
그대손길 안닿으면 종이조각 불과하네
어서빨리 접수하세 결재기일 임박했네
카드값에 헐덕이는 일부 직원들의 급박한 심정을 사사조의 운율에 맞춰 표현한 시조로, 특히 3행의 “그대손실 안닿으면 종이조각 불과하네”는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한 지결이 유가증권으로 탈바꿈되는 경이적인 순간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to. 회계부 여직원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왔네 OO씨네
미정산금 들어보니 눈이휘뚱 정신혼미
전화끊고 호흡조절 침착하게 반추하네
걱정하는 그댈보니 내가슴은 찢어지네
OO님의 미정산금 내역 통보를 받고 당황해 하는 직원의 모습을 표현한 시조로, 마지막 행의 “걱정하는 그댈보니 내가슴은 찢어지네”에서는 서로를 걱정하는 OO실 직원의 고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to. 기획실 여직원
사방팔방 둘러봐도 안보이네 자리없네
어디갔니 결재판아! 이제그만 돌아오렴
안그래도 작은얼굴 결재판에 묻혀있네
심호흡후 물어봤네 웃어주니 나도웃네
☞ 해석
일행 : 동분서주 결재판의 행방을 찾는 직원이 OO씨가 부재중임을 확인함.
이행 : 잃어버린 결재판을 떠올리며 서럽게 읍소하는 장면
삼행 : 정신차리고 다시 확인하니 차곡차곡 쌓인 결재판 뒤에 OO씨의 모습 발견
사행 : 눈물을 닦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더니 기분 좋게 맞아주어 덩달아 웃었다는 얘기
이런 글을 10여편(?) 썼다니.... 반응이 나쁘지 않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