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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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전공은 아니지만 나는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을 통해 세상의 복잡함을 알았다. 처음에는 파고들자는 욕심이 컸다. 글로 풀었을 때의 희열도 있었다. 하지만 열의가 차츰 식었고, 많은 분들과 교류했던 미술 블로그도 접었다. 지금은 이런 조촐한 공간에 ‘읽고 씀’을 실천하고자 글을 올리며 몰아붙이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하루에 두 세 개의 미술글을 쓰고 수백 여 장을 읽었다. 작품을 모니터로 뜯어보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다. 돌아봐도 굉장한 열정이었다. 그간의 미술 글들을 모으니 책으로 네 권이 됐고, 귀찮은 탓에 정리를 미뤄둔 글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글들을 읽지 않는다. 서재에 꽂아둔 수십 여 권의 미술책과 대학 도서관에서 출력한 논문들을 들춰보는 일도 별로 없다.


    관심을 두는 곳이 달라진 까닭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미술에게 나는 상당히 많은 걸 빚지고 있다. 우선, 미술은 역사다. 무엇보다도 일단은 ‘기술[art]’의 역사라 해야 한다. 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는 시대가 구석기와 신석기다. 그쪽은 거의 고고학이 맡고 있어서 어려운 용어로 낯선 지명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도 거의 없다. (또한 대학에서도 미술사 전공의 십중팔구가 중세와 르네상스에 치우쳐 있다. 인기가 많으니까. 한편, 현대미술은 머리가 좋은 미학 쪽 사람들이 주로 들여다본다.) 그 시대의 전(前)미술단계 유물들을 보면, 확실히 미술이라는 것은 기술에서 출발했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천재, 창조, 독창 등이 붙은 건 근대에 와서다.


    한편으로 미술은 사고(思考)다. 이 새삼스런 말이 내겐 중요하다.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텍스트를 통해 그 시대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보는 방식’이라 부르면 편하리라. 미술에서 접한 이 두 단어, 즉 역사와 사고를 통해 나는 철학과 문학으로 선회했다. 솔직히 작품이라는 건, 배보다 큰 배꼽일 때가 많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 이런 불평도 이해가 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많은 말을 배우고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로 세상을 보는, 아니 읽는 방법을 교양 삼아 알아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책은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적잖은 독자들이 읽었겠지만. 저자는 조이한과 진중권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술 공부하는 이들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임영방’이라는 석자의 이름이 소위 ‘레전드’로 남아 있듯. 저 두 사람은 서양의 현대이론들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종의 수입 경로 역할을 맡으면서도 그 분야에서 우리말로 쓴 최고의 책이라고 소개되는 여러 책들을 직접 쓰기도 했다. 혹시 미술 공부를 할 이들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에 옛 공부를 추억하며 『천천히 그림 읽기』를 다시 한 장 한 장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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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미술 작품에서 한 권의 책이 생산된다. 백 수십 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유화든, 단조로운 색면회화든. 작가가 말이 많은 경우도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나 작품만 콘텍스트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우리는 ‘말’이라는 걸로 그림을 보게 되는데, “말로 본다.”는 이 이상한 표현은 사실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말’이 그 언어문화 속 개인을 보호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는 ‘모국어(母國語)’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방어막 같은 거라고 보면, 그 ‘말’이라는 게 통용되지 않는 다른 문화 속의 현상 대부분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이탈리아의 한 오래된 천장에 붙어있는, 어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손가락을 맞대려고 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농담을 하는 미술사가들이 있다. (<아담의 창조(Creazione di Adamo)>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회화의 우월이니 하는 말이 아니다. ‘보는 것’, 즉 우리의 시각 능력에는 현저한 제한이 있다. 모르는 것을 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벽을 쳐다보는 것과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니까.


    카를 융의 『인간과 상징(원제 : Man and His Symbol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윤기 씨의 번역이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그 본래의 신성한 힘numinosity 혹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상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 변화를 통해 이 상징들은 편견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중략…) 따라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카를 융의 책, 137~138쪽)


    결과적으로 우리는 말로 보게 되며, 미술사학과 미학, 그 외에 미술을 둘러싼 여러 해석학들은 그 ‘말로 봄’의 가치를 축적하고 증명해온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라는 것은 “편견과 비슷한” 것들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명제 하나만 갖고 있으면 된다. 독자들이 미술에서 교양 이상의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다면, 그 깨달음을 갈구하고 한 두 개 정도의 예시들을 마음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술을 공부할 때도, 혹은 훗날 도래할 어떤 충격적인 미술 현상을 접할 때도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보다 투명해질 수 있다.


    내가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읽기』를 미술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별로 거창하지 않다. 국내에 이보다 쉽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보는 방법’에 대한 역사를 잘 정리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책을 떠올리라고 하면 독자들은 대부분 『미학 오디세이』를 당연히 꼽겠지만, 그 책 실은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현대미학 강의』라는 진중권 본인의 책을 좀 쉽게 풀어쓴 버전이라고 하지만 그 분야의 용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높은 난이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천천히 그림읽기』에 나오는 ‘보는 방법’들도 그 분야의 전문서들을 읽어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예컨대 이 책의 제 1장에 설명된 미술 형식 분석에서는 당연히 19세기 대가인 뵐플린이 나오는데, 그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원제 : 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은 그걸 국내에 소개한 박지형 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미없을뿐더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이는 비단 뵐플린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어떤 분야의 미술해석이든 상관없이 그림을 전문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쪽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순전히 교양의 후광을 등에 업은 탓이리라, 나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환상이 덧씌워져 있다. 이 책은 그 환상을 좇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고 미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에서는 사실 별로 얻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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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 분석, 도상해석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여성주의, 기호학, 그리고 현대미술 이론들이 등장한다. 거의 시대순과 일치하게 나열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형식 분석과 도상해석학은 전통이 백년은 훌쩍 넘은 것들로, 다른 해석학들에 비해 유치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지는 말고 해석자 자신의 관점에, 그리고 분석할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한 흔적이구나, 이렇게 살짝 눈감아주면 어떤 독자라도 그 시대의 해석 방법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빙켈만, 뵐플린 등이 나오고, 후자에서는 파놉스키가 나온다. (최근 여러 알라딘 독자들이 파놉스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단연 미(美)라는 것이 중심이 됐다. 그리고 그 미는 고대 그리스와 필연적으로 연결됐다. 그런 시대에서 창조, 천재, 독창 등의 근대적 개념들이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를 보다 깊게 알아보고 싶으면 오타베 다네히사(小田部胤久)의 『예술의 역설(藝術の逆說)』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일본이 미학 이론 생산과 번역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제 1장과 2장에 나오는 작품들은 서양미술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도상해석학을 접하게 되면 중세 미술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 유명한 곰브리치는 이 학문에 대해 “당연해 보이던 재현적 의미는 곧 사라지고, 미술가가 창안한 형상이 늘 어떤 의미를 뜻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에케하르트 캐멀린 편집, 이한순 外 옮김,『도상학과 도상해석학(원제 : Ikonographie und Ikonologie)』, 311쪽) 갖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상세한 논쟁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관심 있는 사례들만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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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정신분석학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학문은 예술작품을 “예술가가 가진 동성애, 근친상간 혹은 살인충동 등을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방식으로 승화”(조이한·진중권의 책, 124쪽)시킨 것으로 본다. 근대미술사는 유수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의 힘을 빌려 미술이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으로 한 가닥 분화를 일으킨 역사다. 그 시대에 예술가들은 천재의 반열에 오르게 됐는데, 이 흠숭의 분위기는 프로이트 이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여전히 예술과 천재성은 항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을 거쳐 예술은 ‘광기의 산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됐다. 미쳐서 멋있거나, 아니면 그냥 미쳤거나. 현대예술은 분명 광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저걸 들여다보려면 부득이하게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두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제 4장은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바깥의 것’들에 대한 이론, 즉 사회학적 관점에 따른 미술이론을 소개하는 장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근래에 이를수록 점점 그 후광을 지워가는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르네상스를 허구라고 일컫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론들이 6~70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주류 연구자들을 배출했음에도 여전히 르네상스의 빛은 강하다.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전통의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르네상스’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확고해졌다. 그와 반대로 르네상스를 샅샅이 분석하는 이들은 그 놀라운 작품들이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 주변을 연구하면서 작품을 하나의 ‘생산물’ 정도로 본다. 그 내용이 제 4장에 나온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표현보다는 “계약서에 따라 제작된 작품”(146쪽)이라는 표현이 훨씬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예술을 내적으로만, 마치 자생력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보는 일련의 시각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줬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의 ‘바깥’을, 아니 ‘환경’을 이해해야 예술이 왜 그 당시 그런 모습을 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린 때때로 마치 그 자체를 존숭하려는 사람처럼 예술을 마냥 우러러 보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컨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든지, 그에 앞서 이슬람 문화에서 유럽으로 고대 그리스의 유수 저서 번역본들이 들어왔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위대한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 이는 르네상스를 하나의 단절된 역사로 보는 시각을 철저하게 금하는 최신 연구의 시각이다. 두 저자도 말한다. “사회학적 접근 방법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가진 협소한 생각을 깨뜨려 주는 장점이 있다.”(167쪽) 이와 관련된 최고의 저서는 백낙청 씨께서 국내에 번역·소개하신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원제 :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다. 이 책 자체가 우리나라 비평계에 끼친 영향은 두세 번 곱씹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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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페미니즘이 다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 중요한 화두로 던져졌다. 혐오(嫌惡)에 대해서 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해볼 기회이며, 소수와 권리, 그리고 젠더가 자신의 본래 뜻을 이 사회의 장벽 너머로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TV 매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다녀본 경험으로 보건대, 역시 TV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갖고 있는 매체다.) 여하튼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테미시아 겐틸레스키, 안젤리카 카우프만 등 저 까마득한 옛 화가들과 수많은 곡해의 중심에 선 현대 전위 예술가들의 위상에 대해 재고할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작품이 ‘여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작품에 대한 치명적인 결함으로 간주된다. 반면 여성의 작품이라도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건 최고의 찬사로 여겨진다.”(181쪽)


    지금은 창작의 환경이 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균등화되어 있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가, 예술가, 가수 등의 앞에 ‘여자/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남자/남성’이라는 말에는 괄호를 치는 사람들이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면 절로 그런 말을 쓰게 되니까. 따라서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 예술가들과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비록 남성보다 그 가능성이 훨씬 떨어지긴 하지만) 환경이 아무리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남녀 두 성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에 기인하는지”(211쪽) 생각하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커튼 한 장을 더 치워버려야 한다.


    제 5장에 나온 여성주의 관점의 시각은 바로 제 3장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1980년대 여성예술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신디 셔먼이 그러했듯이, 여성예술가들은 신체를 작품 속에 넣어 표현하면서 여성성을 규정하는 정신분석학, 달리 말하자면 그런 관념을 통해 남성성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고 한 그 학문을 부정했다. 또한 정말 오래도록, 그리고 지금까지도 값이 매겨지는 여성의 신체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으로 그 신체를 혐오하게 제시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즘 전위 예술가들이라면 거의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최근 독자들 앞에 제시된 젠더, 인종, 소수 등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던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분모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작업은 눈으로 보기에도 힘들뿐더러,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거의 어렵다. 하지만 유수의 학자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전통적 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거나 그런 작품을 보는 것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건 제 5장의 내용일 것이다. 근현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의 양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저항의 모습, 즉 운동성을 띠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많은 예술가들이 매체의 도움, 전시회의 성공, 세미나 개최 등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저항하는 이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독자인 우리들에게는 그녀/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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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학으로 미술을 보는 관점은 제 6장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 분야는 거의 암호 해독이다. 흡사 영화 『다 빈치 코드』에 나온,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아 역사를 기억해내고 단서를 찾아가는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쉬운 분야가 아니다. ‘알레고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이면 족하다. 그보다 더 들어가려면 서구 문화의 전통 자체를 통째로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의 상징이 수많은 상징들과 얼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나든다. 또한 기호학은 필연적으로 언어학과 연결되기 때문에 기표, 기의, 지시, 함의 등의 전문용어를 소화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해석 분야 중에서는 가장 학문적이라 할 수 있다. 미술 전문가들 중에서도 이 분야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제 7장. 현대미술이다. 개략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맛보기로 몇 가지 사례들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술한 마무리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 ‘현대미술’이라는 단어는 워낙 많은 걸 담고 있다. 만약 조이한과 진중권이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을 다하려고 했다면, 이 책은 뒤에 『미학 오디세이』를 덧달고 나왔을 것이다. 둘은 관심 삼아 보려는 독자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마무리했다. 강조해야 할 것이, 이 장에서는 우리가 ‘저항’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운동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단어다. 전시관에 걸린 작품이 무슨 운동을 하는가, 시와 소설은 그저 시와 소설일 뿐이다, 이런 불평을 하는 이들도 오늘날 수많은 독자/관객들 중 한 부류를 이루고 있으니까. 나 역시 예술을 혁명에 가져다대는 것에 움찔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가 주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도덕에 맞도록 행동을 옮기는 것, 즉 수많은 흐름 속에서 저항하는 것이 지니고 있는 힘이다. 그 힘은 분명한 운동성을 갖는다. 마음이 불편하다든가,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다든가. 예술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읽게 한다. 그녀/그들이 하나의 운동을 생산해내기 위해 쏟아 부은 시간과 정성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걸 철칙으로 알고, 그 창조적 작업을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예술에 대해 실망하면서 불평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예술이 우리와 함께 저항에 동참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 자체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다. 저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든지, 저런 쓰레기를 (실제 쓰레기를!) 작품이라고 전시한다고, 그래서 돈을 번다고 분통을 터뜨리든지. 그러나 그녀/그들은, 특히 제 7장 이후 지금까지 예술의 궤적을 그려오고 있는 이들은 십중팔구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칠고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은, 우리 주변이 너무나도 확고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비유하자면 ‘고체 사회’라 해도 될 것인데, 예술은 바로 우리의 그 경직된 도형 같은 주변에 균열을 내고 물이 새게 하는 가장 근사하고도 합법적인 (때론 비합법적이기도 한) 수단이자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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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