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 2월 10일



    이곳은 좌표로 설명하기 애매한 지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의 좌표를 애당초 모르고 있다. 모른다는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만, 내심 답답한 것이다. xyz의 공간 사이로 무수한 선분들이 뻗어나가고, 나는 그 선분의 흔적 위에 서있는데, 모르겠다. 그래도 내막을 소개해야 하니 정리하자면 이렇다. xyz 중 뭐든 상관은 없다. 첫째는 도킨스 류의 필진들을 통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비판받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는 카렌 암스트롱과 같은 보다 신중한 학자들이 옹호하는 ‘참종교’에 대한 믿음이며, 마지막은 아예 과학 쪽으로 기울어 있는, 가장 분명하게 도드라진 마음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공통주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과학은 다르다. 종교와 핀트 자체가 완전히 어긋나 있다. 나는 저 셋의 한가운데 있다.


    설 연휴에 위령미사를 지내고 왔다. 제대 후 7년 만에 간 성당이었다. 어렸을 적 몸에 익은 의례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그 공간은 확실히 옛날과 다르게 느껴졌다. 신부가 미사 집전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의 조화와 지구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정의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펼쳐진 그 정의의 전쟁, 말 그대로 승리와 패배로 이뤄진 ‘정의하기’의 맹렬한 싸움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될 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 용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신자는 거의 없다. 일상에 익은 말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분명 내가 있던 그 오후의 공간에서 신부의 말을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확장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수많은 현대인 중 한 명이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접하고, wikipedia와 Google에서 하릴없이 ‘우주여행’을 한다. 몰라도 보게 된다. 아마 시각적으로 사로잡힌 까닭일 것이다. 과학자들의 감수를 받아 만든 우주 가상 이미지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새벽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점의 목성도 그렇다. 그 까마득함의 ‘보임’이라…… 내가 저걸 눈으로 보다니…… 가만히 보면 달은 그 얼마나 유난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생각들. 이 감정은 종교를 통해 본질로 들어가려는 마음, 혹은 철학에서 향하는 그 마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렬해서 얼마간 우주를 생각하고 있으면 ‘근본’이라는 단어가 그 옷을 완전히 갈아입어버린다. 입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요소, 우주론에서 말하는 수많은 우주들의 생성과 죽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어다. 당연히 여기서는 누가 우주를 만들었는가, 혹은 왜 생성되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 하나의 공통화폐로 통용되지 못한다. 그 값이 없다.



*   *   *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원제 : Knocking on Heaven's Door)』는 과학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진리를 향하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종의 교양서다. 하지만 내용이 교양 수준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의 과학 교양서들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 책은 확실히 사려 깊은 설명, 유머러스한 비유, 간혹 지나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반복·강조하는 저자의 버릇 등 독자들에게 ‘쉬운 책’이라 느껴질 법한 요소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자물리학과 관련된 내용의 난이도다. 과학을 좋아하거나 과학을 대학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 상자다. 나는 지금껏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이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놓은 과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리사 덕분에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 표준모형 속 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인지 알게 됐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발견들을 우리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이점을 준다. 즉, 그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의 상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기에는 자신의 과학 상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책을 덮지는 않았으면 한다. 물론 리사가 도킨스 수준의 달필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과학하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의 입장은 중요하게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책의 대부분이 입자물리학과 LHC와 관련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하는지, 어떤 이론이 더 가능성 있는 것인지, 앞으로 과학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상향식 접근과 하향식 접근은 무엇인지, 이런 다소 사변적인 의견이 들어간 부분이 오히려 이 책의 방점이 찍힌 곳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모르는 것들과 아는 것들을 나누는 경계를 넘기 위해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60쪽) 리사의 책 앞뒤에 포진하고 있는, 중간 내용들보다 훨씬 뭉뚱그린 면이 있는 글들이 우리 비전문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다. 칼 세이건의 경험을 빌려 말하건대,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   *   *



    책 제목에 ‘Heaven’이 들어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오해를 했다. 관심을 끌려고 했겠지. 아니면 celestial의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었다. 반가운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도 나왔다. 리사는 카렌과의 대화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문자주의에서 시작된 것임을 확인했다.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생각보다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다. 한편, 그 충돌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과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은 물질 우주에 적용된다. 근본구조와 요소에 대한 학문이므로 당연히 유물론적이다. 여기에 ‘초월’이라는 종교의 단어가 들어가면 논리가 어긋난다. 우리나라는 다행이긴 한데, 미국은 이 충돌로 야기된 폭력사태나 교육논란, 특히 교과서 수정과 도입 문제가 굉장히 첨예하다. (도킨스도 바로 저런 문제를 겨냥하여 비판의 수위를 극도로 높인다.) 그런 와중에 리사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과학은 경험에 근거하고, 종교는 계시에 근거한다. 둘은 근본이 다르므로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과학과 성경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과학은 우리가 무작위적으로 작동하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이며, 무작위적으로 주어진 크기를 가진 수많은 물체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늘 상기시킨다.”(113쪽)


    그런 리사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건 기본요소이다. 교양으로 알게 된 과학지식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들, 예컨대 원자, 원자핵, 중성자, 전자와 같은 것들에 대한 복습으로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전문지식으로 넘어가버리지만, 잘 따라가면 길이 보인다. 모르겠다면 건너뛰어도 좋다. 리사도 본인의 입으로 “이곳은 넘어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 독자들이 ‘스케일(scale)’이라는 용어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사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책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용도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입자물리학자인 리사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2011년 9월에 냈다. 번역과 국내 발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는 두 달 뒤에 하버드에서 이 책을 주제로 한 짧은 강의를 하나 했다. 그 강의에서 리사는 스케일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숙한 1~2m 단위에서 점점 작은 스케일로 옮겨갔는데, 그 와중에 이런 표현을 썼다. much smaller. 하지만 이 표현도 부족했는지 곧 far far smaller라고 정정했다. 대체 얼마나 작기에. 펨토미터. 0을 세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굉장히 작은 이 원자핵의 세계에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듣게 될 쿼크를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광팬이라면 알아볼 단어다. 『피니건의 경야』에 나오는 단어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가 없다.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   *   *



    리사는 일단 작은 세계를 소개해준다. LHC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 작은 세계를 보려면 고에너지가 필요하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은 파동일수록 에너지가 높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줬다. 리사는 그 이론을 일컬어 “근본적인 이론일 것이다.”(286쪽)라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 이론의 도움을 받은 실험가들은 LHC에서 매우 작은 세계를 본다.


    그 작은 세계라는 것은 표준모형에 들어있는, 이름도 생소한 여러 입자들을 일컫는다. 단, 힉스 보손은 2013년 3월 14일에 CERN(유럽원자핵연구평의회)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을 낸 시점에서 리사는 그 입자를 이론적으로 추정할 뿐이다. 쿼크와 렙톤으로 이뤄진 페르미온(반정수 스핀을 갖는 입자)과 입자들 사이의 묶이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손(정수 스핀을 가짐)이 표준모형에 들어가며, 전하의 여부, 질량의 경중에 따라 또 세부적으로 나뉜다. 이 모형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큰 난제들이 있다. 리사의 책에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번에 걸쳐 소개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무슨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지 별 무리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LHC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라는 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95~196쪽) LHC는 바로 그 ‘훌륭한 일’을 하는 기계다. 대폭발 이후 1/1조 밀리초 후에 일어난 일을 재현하는 곳이며, 그걸 또 1/1만mm 단위까지 쪼갠다. 순간(瞬間)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이 두 양성자가 충돌해 (대부분은 서로 빗겨가지만)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며, 학자들은 그걸 컴퓨터로 분석하여 어떤 입자들이 생성됐는지를 알아낸다. 새로운 입자를 기대하면서. LHC의 규모, 개발 에피소드, CERN의 이야기, 과학자들이 희열을 느낀 순간 등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LHC에서 블랙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괴담의 과학적 반박까지 곁들이면 더욱 좋다. 리사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LHC가 얼마나 안전하게 위험을 관리하는지,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불확실성을 검토하는지 설명해준다. 이 충돌기를 둘러싼 오랜 갑론을박의 온도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   *



    내용을 넘겨도 좋다고 리사가 (대놓고) 말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LHC의 세부적인 설명이 담긴 3부 13장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과연 그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이 기계가 뭘 하는지 알았으니,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고에너지 영역의 그 무엇이든 포착해내려고 하는 인류 최고 기술의 과학기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리사의 하버드 강의는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밑에 링크를 걸어두겠다. 강의 25분 즈음에 LHC의 3D모델이 스크린에 뜬다. 책의 그림과 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그 영상을 잠깐이나마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CMS와 ATLAS는 무엇인지, 리사가 “갱의 조직원들”(358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던 ‘제트(jet)’라는 현상은 무엇인지, 전자와 광자의 에너지와 위치 정보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텅스텐산납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13장에 널려 있다. 트리거(trigger) 역할을 하는 컴퓨터를 일종의 스팸메일 필터에 비유한 리사의 유머러스한 설명도 이해를 돕는다.


    13장을 읽고 14장, 즉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읽으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 저 기계에서 생성되는 입자는 이런 것들이구나. 하지만 도표로 차분하게 정리된 것과 달리 이 입자들은 전혀 ‘표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난잡하다. LHC의 검출기에 찍힌 입자들의 궤적을 그래픽으로 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는커녕 현대미술의 한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다. 리사는 진리를 아름다움과 곧 연결시키곤 하는 우리의 전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할 수 없다. 진리란 “어지러운 현상과 잡다한 입자”(373쪽)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주관. 과학이 알려준 진리는, 우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덕환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국문학도인 나는 당시 발끈했다. 시인의 노래를 과학의 입장에서 폄하한 것 같은 뉘앙스를 느낀 까닭이었다. “우주는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폐가 있긴 하다. 그러나 과학의 미, 즉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대칭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대칭성이 깨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역설의 관계에서 이론은 풍부해진다. 또 하나의 미는 단순성이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기본요소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론과 입증을 통해 반복적으로 알게 된 까닭이다. 그쪽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발점의 입력값이 적으면 예측력이 강해진다.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이론은 공방의 장에서 주목을 받았다가 도태된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다고 알려진 표준모형마저도 그 너머의 이론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통폐합될 가능성이 있다. 리사가 몇 번이고 강조한 과학의 진화 방식에 따라서.



*   *   *



    초대칭성 이론, 테크니컬러 힘, 여분차원. 모두 계층성 문제, 즉 ‘중력은 다른 기본 힘들에 비해 왜 약한가?’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들이다. ‘미세 조정’으로 다듬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터무니없이 약해서 과학자들이 수 십 년 간 머리를 싸맨 문제다. 중력. 0을 열여섯 개나 찍어야 될 정도로 큰 차이. 그래서 아주 작은 스케일에서는 중력을 아예 무시해버려도 됐다. 양자역학과 중력의 문제는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어서 일부 과학자들은 둘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을 무모하다고 무시하기도 한 모양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원제 : The Elegent Universe)』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한 쪽에 집중적으로 매달리면서,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경고성 메시지를 애써 무시해왔던 것이다.”(브라이언 그린의 책, 22쪽) 브라이언은 그 책에서 둘을 통합할 초끈이론을 설명하는데, 그 이론은 바로 계층성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한때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리사는 “한 풀 꺾인 과제”(475쪽)라고 평가했지만 3부 20장을 시작하면서는 두 분야의 지속적인 공동 연구를 희망했다.)


    일단 독자의 입장에서 ‘계층성 문제’라는 걸 대략 짐작은 했으니 그걸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는 들어봐야 할 것이다. 리사가 제안한 비틀린(warped) 여분차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끈이론이 제시한 brane, 그건 물기가 맺힌 샤워 커튼에 비유된다. 그 막과 막 사이를 리사는 ‘the bulk’라고 부르며, 이 네 번째 차원의, 거리가 굉장히 좁은 공간이 중력brane과 약력brane 사이의 차이를 만든다. 즉 이 사이로 중력자의 파동이 급격하게 줄거나 늘어난다. 여분의 차원으로 중력이 빠져나가 극미세 스케일의 중력이 무시해도 될 수준으로 약해진다는 이론이다. 물론 리사의 말마따나 이건 사변적인 이론일 뿐이라 검증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LHC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사변적인 이론에서 실증 단계의 아이디어와 개념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걸 쓸모없다고 하면 리사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보라.



*   *   *



    이제 우주로 나아간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을 뿐인 작은 세계에서 숨이 턱 막힌 채 한참을 읽다가 드디어 우주로 나아간다. 하지만 산뜻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막막함이 찾아온다. 내가 새벽마다 목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1~2m 정도가 딱 좋다. 아무리 강력한 기능을 지닌 관측기계라 하더라도 우주의 끝을 발견한 적은 없다. 얼마나 크기에. 수평선·지평선(horizon)은 관측자나 관측도구가 전진할수록 뒤로 물러나는 법. Observable Universe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우주의 규모를 상정한다. 우주의 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있는데 못 찾았다는 것. (후자의 경우는 우주의 모양이 문제가 될 것이다.) 리사는 이 거대한 우주가 점차 팽창하고 있다는 과학적 발견을 거쳐 우리가 볼 수 없는 96%의 우주까지 밀고 나간다. 작은 곳에서는 오래 머무른 그녀가 우주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도를 높인다. (물론 전문분야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는 흡사 급팽창 이론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세계에서도 두 가지 불확실성 문제, 즉 계통과 통계의 문제로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도 그걸 별도의 장을 마련해 설명했다. 그러나 우주론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조셉 콘레드의 『암흑의 핵심』을 빌린 리사는 우리가 보는, 말 그대로 관측하는 우주는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dark보다는 invisible이라 해야 옳지만. 여하튼 이 96%의 압도적인 ‘모름’ 때문에 우주의 스케일 역시 텅 빈 공간이 된다. 마치 원자의 대부분이 텅 빈 것처럼. 리처드 파넥은 『4퍼센트 우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주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리처드의 책, 13쪽) 인류는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두뇌들의 조합으로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것을 밝혀 왔으나,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종교의 단어로 포장하진 않는다. 그저 그녀/그들은 문을 두드릴 뿐이다. 언젠가 열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   *   *



    불가사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터리하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주 작은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서는 실현될 일이 전혀 없다. 예컨대 원자 안에서 전자는 한 궤도를 돌다가 갑자기 다른 궤도를 돌기 시작한다. 그걸 눈으로 본다면 전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착각해버릴 지경이다. 미국 FOX TV에서 방영된 ≪Cosmos : A Space Time Odyssey≫에 그 모습이 그래픽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관심이 있다면 5화를 보라.)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우주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아는 것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리사의 책, 558쪽)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주는 우리보다 항상 똑똑하다는 걸 입증한다. 칼 세이건도 그의 생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Cosmos≫에서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의 과학 독서였다. 늘 그랬다. 과학책은 덮고 나면 묵직한 설렘을 안겨줬다. 그녀/그들이 글을 훌륭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도킨스가 예외이긴 한데, 대부분 과학자들은 글을 너무 정직하게 쓰는 나머지 패턴이 빤히 읽힌다. 깊게 해석해야 할 문구라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꾸밈과 사유가 필요 없다. 오히려 그런 정직함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함, 확고함, 굳건함, 이런 느낌의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그녀/그들은 도무지 정확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탄할 뿐이지만! 일말의 오차마저도 허용치 않는 그 정신은 우리네 도공(陶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과학이 3년 전 힉스 보손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을 때, 내 기억에 세상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작은 기사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이해는 둘째 치고.) 샴페인 터지는 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아마 외계인을 발견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리사도 입자물리학의 인지도에 대해 꽤 신경을 쓰는 눈치다. 그렇다면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한편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과학계의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뒤늦게나마 그 환호에 한 소리를 보탤 순 없을까, 궁리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야기들이 수 십 년 뒤에는 어떻게 회자될 지를 기대하며. 달 없는 밤일수록 찬란해지는, 일점의 목성을 바라보는 일은 그다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링크 : Lisa Randall : Knocking on Heaven's Door - Great Teachers (Harvard University)


p.s 505쪽에 "관측되 우주"라는 오타가 있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