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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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일



    1월의 마지막 나흘이 흐르고, 2월의 첫 날은 하나의 닫음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이렇게 몰아서 읽어본 건 칼비노 이후 처음이었다. 사사키. 그가 무슨 말을 반복하는지 알았다. 지우지 못한 의심도 많지만 그간의 오해들도 어느 정도 풀렸고,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간단한 생각들도 차츰 물러졌다. 언젠가 닦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이 기대가 동맥경화를 막아주겠지.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겸손마저 무기로 다루는 이 일본 작가는 확실히 내 생각의 주름 하나를 접어줬다. 그도 한 장의 종이가 실은 여러 번 접혀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비유해보자면 그렇다. 종이접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종이접기. 뭔가를 진리라 하여 추구하면 그건 장미 모양이나 학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안에 적힌 문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속살을 내어주는 일은 없으리라. 대학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이 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은 그의 네 번째 아날렉타로 일본에서는 2012년에 출간됐다. 『야전과 영원』의 역자 안천 씨께서 수고해주셨으니 번역을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건 이 둘을 포함해 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언어를 위한 선언조의 변론이라 글의 온도가 꽤 높다. 사사키를 접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장되는 책이라고 하더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단, 두꺼운 책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에 한해서 『야전과 영원』을 먼저 읽으라 말하고 싶다. 장황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니까. 비약이 적은 걸 읽어야 반복해서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둘과 비교하자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아날렉타이니까 당연하다. 나머지 선집들도 번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여하튼 이 책은 그냥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담이 글보다 더 많다. 리듬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대담의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처럼 자극될 만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 종종 등장하는 농담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 책은 높은 수준의 대담들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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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무슨 자극을 받고 싶어 했는지를 공들여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겠다. 어렵고 쉬움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읽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사사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르니 불쌍할 뿐이라고 농담 반 진담을 했다. 그 흉내를 내보자면, 이 책에 나온 소설을 일본어로 읽어본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잘 팔리는 비평책의 함정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 아날렉타에서 자유롭게 펼치며 논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은 그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학에서 김애란 씨와 대담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공간 어딘가에 떨리던 그 소감을 옮겨놨는데, 역시 현장의 힘은 강했다. 소설의 뒷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머뭇거림과 주저 없음을 반복하며 던지던 그녀의 생각, 소설 관념, 철학, 삶, 세계 등, 그런 다채로운 투망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썼는가를 우리가 물을 때는 겉으로야 “와, 정말 팬이에요!”라는 소녀/소년의 팬심이 겉에 발라져 있지만, 내심 궁금한 거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비평은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세상 보는 일의 고뇌, 진통,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은 나중에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비평에 참가한 사람을 비평을 통해 읽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부랴부랴 사서 꽂아두고 만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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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에서 맘껏 발휘했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그 예의 화려한 단언으로 역사와 철학, 그리고 비평을 오고 간다. [달필+달변]인가보다. 사사키의 입이 풀리기 전에 말을 자르라는 사전 경고를 받은 사회자가 있다니. 여하튼 대담을 이끄는 쪽이든 따라가는 쪽이든 재치 있는 반론과 변론, 그리고 긴 역사 이야기를 주저 없이 펼치는데,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작품에 대한 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을 쓰는 독자라면 그녀/그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엇나간 고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온도차로 찬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자극이 되는 책이고, 그만큼 자극적이다. 온통 문제적 작가들만 초대해놓은 책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책을 어제 새벽부터 잠깐씩 읽고 있는데, 서두부터 ‘문제’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확실한 지론이 있거나 어딘가에 오랜 시간 기대어온 독자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독서가 되겠지만, 나처럼 삶의 단 하나의 확신은 부유 밖에 없다며 때론 (기분 상) 높이 떴다가 낮게 가라안기도 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확인할 기회다. 사실 독서라는 게 그렇기도 하다. 자신에게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책이고. 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봐라, 저들도 저렇게 다투고 싸우며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사키의 말마따나 ‘닫힌 회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이가 아무래도 이 책을 더 깊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철학과 연애에 대한 단편이 조금 있지만 그건 선집에 껴놓은 정도이고, 어떤 글은 결론에 가서 푸시시 식어버리기도 한다.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만능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생각. 여하튼 글을 고민한다는 것 앞에 사사키가 단언하며 당당하게 내놓는 것은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역사의 변화다. 국내에 번역된 세 권의 책에서 내내 하는 말이 그거였다. 누군가는 문학이 뭘 하는가에 회의를 갖지만 정작 그 전선에서는, 창작의 참호에서는 그녀/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걸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도 글을 붙잡고 놓치는 않는다는, 조야한 끈기 정도는 있는 독자로서 나 역시 자극으로 남는 글들을 꾸물꾸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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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글들을 길게 적어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일단 이 책이 사사키의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살짝 빼내고 싶은 이들은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먼저 읽고 그 뒤에 나오는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읽으면 좋겠다. 전자는 무력(武力)으로 오해하던 이 책의 사납고 뜨거운 제목이 실제로는 (표지에도 떡 하니 나와 있지만) 무력(無力)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글이다. 3·11을 말한다. 그 앞에서 무력해진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울 첼란, 에마뉘엘 레비나스, 브루노 슐츠의 이름이 줄지어 나온다. 무력했지만 승리하게 되는 역설을 증언한다. 정의와 문학과 예술이 한 통에 담긴다. 물론 그 ‘의미’라는 걸 곧 ‘힘’으로 이해해버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 읽고 나서도 의심이 지워지진 않았다. 체념,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역설로 피어나는 희망. 어차피 다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사사키 뿐만 아니라.


    그래서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이어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집을 하나 사긴 했는데 번역된 게 한 권 밖에 없다. 사사키의 비평에 언급된 후루이의 초기 장편 3부작과 『산조부(山躁賦)』를 어디 큰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여하튼, 사사키는 지면을 고려한다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후루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촌락 공동체, 도시, 광기, 재결합, 치유로 이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다. 요컨대 후루이는 생(生), 성(聖), 성(性)의 자의성을 말하는 작가다. 자의성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에서 르장드르와 푸코를 빌려가며 그렇게나 반복했었다. 우리를 도박장에 밀어 넣으려고. 아무 근거 없음.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 하지만 후루이는 그 자의성을 알면서 희망을 갖는다. 낙천이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후루이는 왜 “낙천은 불안과 잘 어울렸다.”(258쪽)라고 한 걸까? 죽음과 삶의 무근거성 앞에서 남는 건 오직 ‘살아남는 것을 사는 것’일 뿐이라는 걸, 공습과 재난의 시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자의성의 텅 빈 공간을 낙천으로 채워 넣는다.


    사사키가 이 비평 초두에 후루이의 초기 작품 3부작과 후기 『산조부』사이의 단절을 찾아보겠노라 벼렸던 것은 바로 저 메시지, 즉 후루이의 ‘낙천’을 재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이는 공습과 재난과 전쟁의 주제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 작가. 이어지는 사사키와 후루이의 대담도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대지진 이후의 ‘말’을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키는 후루이에게 독자들을 낙천으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사키도 ‘낙천’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빈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작업은 언어를 지녔다는 자긍심으로 아주 치열하게 불타며 진행된다. 그러나 모두 태우지는 않는 역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자긍심에 대한 사사키의 증언은 이 책 맨 마지막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차이를 느끼며 각자 판단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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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이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다. 자극이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말이 태어나는 곳」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대담인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나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지도 모르겠다. “말이 태어난다.”라는 말은 좀처럼 일상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언어의 안팎을 나누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일상에서 신경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달리 말하면, 글 쓰는 이들은 ‘말이 태어나는 곳’으로 향하며 명확하지 않은 고독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레고 조립하듯 쓰는 글이나 PR의 글은 제외한다. 대체 나는 언제 ‘글’이라는 걸 쓰는가?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뭘 읽었으니까 쓴 것이다. 문제는 최초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소한 글도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우물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우물을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고, 없는 우물을 저기 있지 않느냐며 박박 우기기도 하는, 온갖 다양한 기벽을 지닌 작가들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독한 신비주의자 정도일까? 고민의 특권? 손 오그라드는 자기 감성? 지금 생각건대, 여러 작가들과의 대담 기회를 스르르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뭘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려고 하는, 이 자기두둔의 지독한 생명력은 참 경이로울 정도로 질기다. 그래서 이 대담에 수줍게 반가워한 것이다.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뚫어져라 들여다본 문장은 이거였다. 되읽다보면 아직도 찌릿한 구석이 있다. 글 앞의 공간에 걸려 있는 어떤 자물쇠가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은 상상도 했다. 열쇠는 저마다 있을 테고. “근원적인 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33쪽) 덕분에 미나가타 구마구스(南方熊楠)가 누구인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누군지, 무스비(生靈)는 또 뭔지, 흥미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단 하나, ‘점균’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말과 이미지가 섞인 것. 과정인 것.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 암수의 구분이 없는 것. 소설이라 시작해놓고 점점 이상해져 몇 달이고 내팽개친 여러 글들 앞에서 느끼던 감정이 ‘점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고 하면 될까. ‘근원에서 피어난 점균이라니!’ 몇 번이고 외쳐버린 것이었다. 그 탓에 이 대담에서 사사키가 뭔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


    하나 더. 소설의 시작과 마무리를 고민하는, 이른바 ‘문창’의 창틀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고민이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라는 긴 제목의 대담에 나온다. 놀랍게도 사사키는 철저한 무계획성으로 소설을 썼고, 꽤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계획성은 하나하나 접어가는 치열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층적인 소설을 낳는다. 읽을 때마다 달리 느껴진다는 독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달리 ‘읽힐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런 장치들은 분명 사사키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담을 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거라고 빼지만.) “안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마무리”(212쪽)를 거부한다는 사사키의 주장과 [문학]을 거부한다는 다카하시의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재밌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하면 열받았거든」은 대단원의 여부로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다카하시의 논리, 일본 AV와 일본 근대문학의 공통점, ‘사랑하는 힘을 빼앗는’ 명령과 모자이크의 대비, 소세키의 작품 「명암」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 등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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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의 다른 번역본을 읽은 이라면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서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일본 사회도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고, 폭발적인 관심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변론을 했는지는 (사사키 자신이 소설의 세 가지 기원이라며 말했던 그 변론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국내 인문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이들도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주시 중이다.


    그의 이름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하나다. 무력(無力)함 앞에 ‘치열함’이라는 엇나가버린,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표현을 가져다놓았기 때문이다. 비문이다. 아니, ‘비어(非語)’라고 해야 하나? 이 억지스런 작업을 위해 사사키가 발휘하는 단언의 강도는 수많은 독자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셌다. 문체 자체에서도 “나는 세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가를 근래 읽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사사키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독자들이 그 치열함의 온도를 알았으면 된 거라고 했을까? 그간 그가 샀던 오해를 풀 변이 하나 있어 옮겨놓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법과 ‘법이 보증하는 권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이를 뜻하는 것이지 “언어의 마술적인 포에지에 의해 무한하게 비상하는 상상력”과 같은, 소설을 읽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감격하는 식의 쓸데없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371쪽)


    사사키는 “쓸데없는”이라는 표현을 바로 철회해버리지만 여기서 그는 세상의 작동원리인 말의 힘을 거듭 강조한다. 그걸로 쓰인 작품이 세상을 바꾼다는, 우리가 감상 삼아 쉽게 하는 일시적인 착각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틈이 벌어진다. 그가 자꾸 우리를 도박장으로 끌고 가 어디에 걸겠냐고 묻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걸겠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력함을 무의미에서 탈출시키는 한 행위다. 그는 그 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틈’을 ‘뒤’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 사사키의 이 책에도 거듭 반복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극히 일부일 뿐인 그 예술을. 바로 그 예술이 타고 난 잿더미에서, 바로 ‘헤겔의 재’에서 보란 듯 소설이 득세하더라고 그는 말한다. 희망을 본다. 언어의 긍지와 말의 힘. 우리가 쉽게 잊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가 아직도 유용하다고 말하는 실러의 예술론까지 더한다면, 아니, 더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문학의 효용론을 논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애당초 사사키의 논의에서는 ‘효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논외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이야말로 답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이는 안다. 그 ‘말’이라는 것의 힘을 사사키가 어떻게 증언했는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어떤 여정이 있다. 읽기와 쓰기. 아, 이 교과서 제목 같은 단어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는 그걸 삶에 가져다붙인다. 철학이 학문으로 변질되어 삶에서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무엇을 기린다. 같은 맥락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사키처럼 말을 할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동사가 없는 이 책 제목에 알맞은 동사를 넣으시오. 문제가 앞에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쓸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고 보니, 나는 답을 잘 쓰는 학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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