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9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이어 짧은 이야기 하나가 더 실려 있었다. 「직소(直訴)」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유다의 고백’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다. 유다에 대한 이야기다. 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예수를 팔아넘기는 유다의 독백이다. 정신 사납게 쏟아지는 발언을 듣고 있으면 그의 표정이 그려진다. 경멸한다. 화를 낸다. 운다. 분노한다. 단념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 다시 오열. 웃음. 뭐 이런 걸, 30냥 따위. 그래도 받아두며 나는 장사치라는. 그리고 하하하, 깜빡했는데 제 이름은 유다. ‘유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할 이들을 위해 굳이 이렇게 말하겠는데, 이건 영지주의니 ‘유다의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직소」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집착이다. 아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부르는 순간 병자로 분류되겠지. 그리하여 진실은 오직 엇나간 채 모습을 드러낼 뿐이고. 들여다볼 일이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가 떠올라 ‘힌놈의 죽음’ 부분을 다시 읽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건 무리다. 길이도 길이겠거니와 일단 다자이의 작품은 유다의 독백만을 다루므로 별다른 사건이 없다. 고발의 현장 자체다. 보리슬라프의 작품이 훨씬 복잡하고 극적이다.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뽑아내는 자기 고뇌, 죽음을 두려워하는 예수를 닦달하면서 반드시 예언을 성취시켜야만 한다고 느끼는 자기 강박, 유다-예수-야훼의 삼위일체를 선언할 거라고까지 말하는 거대한 목적성, 하지만 결국 “성서의 말씀의 올가미”(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 『기적의 시대』, 346쪽)가 목을 죄는 두려움에 이르는. 자살로 위장된 죽음까지. 파문이 일겠지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은 유다의 고뇌에 압도당하는 착각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런 생각도 가능한.


    하지만 두 작품은 비슷한 선상에 있다. 같진 않다. ‘힌놈의 죽음’은 보리슬라프가 『기적의 시대』 말미에 이르러 예수 대신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결국 예수의 죽음이 없으니 구원도 없다는 도발적인 해석에 이르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유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유다가 닦아놓은 예언의 길을 따라가는, 아니, 따라가는 것조차 겁을 내는 그 예언자는 이 소설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번역을 맡은 이윤기 씨도 말미에 보리슬라프의 작품을 옹호했다. 이단이 아니라고. 다자이도 그렇게 봐야 한다. 그가 개신교 신자였고 성경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종교 환경을 고려해봤을 때, 물론 보리슬라프보다는 일부 독자들의 단죄에 일격을 받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나름의 글로 유다의 고백을 다시 써봤다.



*   *   *



    나는 유다. 내가 아니었으면 저 무능한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객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세상의 적이자, 나의 스승, 주인으로 나이는 같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줬는데도 고맙다는 기색이 적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서운하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내가 이리저리 변통해서 꿔다가 해낸 것이 아니더냐. “마술의 조수 노릇”(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직소」, 『인간실격』, 143쪽)을 그렇게나 해줬는데. 하지만 그자는 아름답고, 나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따라다니는 일에 득이 없는 줄 알면서도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자들이 다 떨어져나가도 좋다. 아니, 그 편이 좋겠다. 늙은 나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밭도 있는 나의 집에 가서 그대의 어머니 마리아와 셋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걸 꿈꿔왔다. 간절하게,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천국이니 하느님이니 이스라엘의 왕이니, 이런 것들은 당초 믿지도 않았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아름다우니,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하지만 베다니의 시몬 네에서 한 짓은 무엇이었느냐. 마르타의 동생년, 그 마리아가 향유를 그대의 머리에서 발까지 붓는 무례를 범했음에도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발만 적신 걸로 되어 있다.) 오히려 두둔하다니. “추태의 극치”(다자이의 책, 149쪽), 그렇다, 그대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이었는가! 이 분노는 무엇인가. 나도 젊고 훌륭한 청년이다. 집 없고 돈 없는 제자 나부랭이들과는 다르다. 저년이, 마리아가 나한테서 그대를 빼앗아갔다. 아니, 그대가 내 여자를 뺏었다. 이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 남은 것은 분노요, 또한 그대를 향한 사랑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그대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길가에 있는 늙어빠진 당나귀에 올라탄 그대를 연민하면서, 나는 아름다울 때 내 손으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꽃을 꺾어버리는 일처럼.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신기하게도 군중들이 꼬여들었고, 저 우둔한 제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울었다.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전에서 노기를 부리며 불쌍한 장사치들을 쫓아낸 것은 무어냐. 허세다. 그대는 제사장들에게 잡혀 죽을 생각으로 자포자기한 것이다. 드디어 미쳤구나. 그러니 내가 한 장사꾼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대를 죽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를 팔아 남기는 것이야말로 나의 임무라 생각한 건 당연했다. 이 사랑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영원히 남의 미움을 사리라.”(다자이의 책, 155쪽) 그래도 상관없기에 이 사랑,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아, 최후의 만찬이 없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라. 살과 피의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칭송하더라.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그보다는 그대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불쌍한 장면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었거늘. 단, 그건 모두가 깨끗하면 좋을 것이라며 나를, 정확히 이 유다를 겨냥한 한 마디 말로 내 속의 분노를 다시 끄집어내기 전까지의 일을 일컫는 것이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변을 쏟아내지 않아도 됐겠지. 그리고 그대는 마지막 식사를 조용히 하더니 빵 한 덩어리를 내 입에, “개나 고양이한테 던져주듯이 한 덩어리의 빵 조각을 내 입에 쑤셔 넣고”(다자이의 책, 160쪽)는 보란 듯이 제자들 앞에서 쪽팔림을 주었다.


    이자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30냥을 받아들고는 나 자신을 장사치라고, 유다라고 뒤늦게 소개한다. 군병들이 추궁하는 대로 나는 게쎄마니로 간다. 마지막 입맞춤을 하러.



*   *   *



    아름다움을 향한 기이한 사랑. 집착이다. 꽃을 꺾듯이, 아름다운 것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할 바에야 제 손으로 꺾어 죽이는 무서운 사랑이다. 유다는 애당초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처럼 회의와 번뇌를 오고 가는 존경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저 단편적인 사랑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리슬라프의 유다가 성서와 예언에만 매달린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기어이 자신을 삼위일체의 한편에 끼어 넣는 지경에 이르는 반면, 다자이의 유다는 오로지 사랑이다. 삶의 중심에 예수를, 그 아름다움을 세워두고 속으로 혼자 찌르고 베는 칼날 같은 사랑이다. 예수가 그걸 눈치 챘을까? 그랬다면 언제? 발을 닦였을 때? 아니, 그걸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닌가? 반대로 그걸 유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 사랑에 눈이 가려진 채, 모든 걸 자신의 식으로 해석하고 내뱉는 괴상한 고집이 독백의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다자이는 유다의 뒤늦은 자기소개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게쎄마니로 가는 길에는 또 얼마나 떠들어댔을까. 군병들 중 하나가 유다의 방종을 두고 “자네, 입 좀 다물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시끄럽다고 떠들더니, 자네가 딱 그 꼴이다.”라고 말했으리라. 그렇게 도착한 예언의 순간에 유다는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보리슬라프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다자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유다의 이야기를 할 뿐. 이후 어떻게 되었겠는가, 유다는. 30냥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뒤늦은 후회를 했겠지. 오직 사랑할 뿐인 예수가 죽었으니, 이제 그에게는 무엇이 남았겠는가. 유다는 자살한다. 악마에 씌운 것도 아니고, 보리슬라프의 이야기 속에서처럼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힌놈에서 자살로 위장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가 충분히, 집착의 선로에서 저 아찔한 높이의 절벽 아래로 빠르게 사라져갔으리라 추측해보는 건 무리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독백, 주절거림은 기이하리만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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