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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2016년 1월 16일
푸념. 우선 옮긴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독자가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삶이 사회화되는 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 성찰의 욕구가 있다면 읽을 수 있다.” (909쪽) 저자 사사키 아타루도 (특히 라캉 부분에서) 거듭 말한 바인데, 독자의 자질이라는 것이 있다. 단순한 지식의 양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리라. 시각은 위험하다. 물론이다. 무엇이 시각을 구축했느냐의 여부가 문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전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이는 읽을 만하긴 하지만, 반면 여기서 언급될 라캉, 르장드르, 푸코 등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기저에서부터 뒤흔들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색안경을 낄, 그런 태세를 얼마든지 갖추고 있는 이들이 읽을 만한 하진 않다. 그것은 옮긴이 안천의 저 문장 중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했다. 또 다른 욕구가 결핍을 낳는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여기서 시작될 여정은 여타의 독서로 도움을 받을 테니. 그러나 이 충족에는 피할 수 없는 푸념의 묘한 맛이 섞여 있다. 피하고 싶은 맛은 아니나, 굳이 사서 맛보고 싶은 맛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사회화되어 있는지는, 내가 이 사회에 어떻게 끼어들어가 있는지는 저들의 시각을 빌려 알게 되었다. 그 맛이 씁쓸하다. 그 전략적 장치들이, 아주 오래된 기술들이 만든 픽션의 견고함 속에 내가 들어 있다. 그 역사의 도박장 속에. 이걸 남에게 설명하기도 사실 뭐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개인’으로 취급된 적은 적었던 듯도 하다. 내게는 번호가 붙어 있고, 관리되는 상황이고, 규율 속에서 장기간 ‘조정’ 받은 적도 있었다. 자유롭다는데, 그걸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유수 인문학자들의 날카로운 일갈로 “그래, 우리 사회는 그런 거였어.”라고 무릎을 친 적도 있다.
그래서? 어디로 가자는 건가? 만약 내가 가다머였다면 분명한 어조로 “우린 우리 시대 바깥을 볼 수가 없어.”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었으니 “그건 아주 오래된 세계의 판본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문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알아본 결과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가 ‘이로(理路)’라고 칭하며 제시한 이 두꺼운 논거들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 끝은 없다. 이제 ‘○○의 종말’이라느니 끝이 보인다느니 새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느니 하는 말 따위에 나는 속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유치한 선언은 아마 그런 만큼이나 확고하게 오래도록 내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종말이라고 말한 자들이 선언한 새 시대도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또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걸 판본임을 모른 채 “오, 새 시대여, 내게 축복을!”이라고 외치는 게 살기에도 더 편하고. 하지만 이 책은 위험하다. 끝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우릴 막막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야전과 영원(夜戦と永遠)』을 40여 장의 이면지에 꼼꼼하게 적어 곱씹고 고민하며 읽어온 나의 이로(理路)를, 아니, 정정한다, 나의 ‘이로(泥路)’를, 그 진흙탕길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다. 쓰다보면 이 책을 덮은 나의 첫 번째 막막함이 그래도 풀어지진 않을까, 이런 또 하나의 막막한 희망이다. 이 막막함은 상당히 물리적이다. 그렇다. 여기까진 술술 써내려왔는데, 이제부터 뭘 써야하는 것일까. 여기까지의 나와 이 아래의 나 사이에는 어떤 서어(齟齬)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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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라캉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은 ‘보로메오 매듭’을 시작으로, 우리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처음으로 돌아간다. “당신의 처음은 무엇인가?”라는 도통 의미를 모를 질문을 받는다 하자. 물론 의미를 모르겠다는 건 ‘처음’의 정확한 지점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캉은 그걸 <거울>을 보는 시점이라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은 말을 모르는 이, 그것은 인판스이다. 전제 군주, 그것도 아주 포악한. 미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세계”(44쪽)라고 설명하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기가 있냐는 거다. 저자는 그걸 소행적 도출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나도 사실 라캉의 이 분석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환희와 증오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만화 <호문쿨루스>를 본 사람은 생각해봤을까? 주인공은 욕망이 발달한 부분이 유독 크거나 눈을 달고 움직이는 기이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갖게 된다. 나는 저 원초성이 거울 앞에 선 이에게 그려지는 이미지이며, 주인공의 눈은 그 거울의 면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은 접고, 다시 정리하자. 방금 논한 건 상상계의 일이다. 내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저 정지된, 죽은, 결여된 이미지를 보고 “바로 ‘너’가 ‘나’라니!”하며 놀란 가슴에 자아(소타자)를 공격하게 되는 이 막다른 골목 말이다. 이건 어떻게 끝나는가? 우린 저기서 살고 있지 않지 않은가? 여기서 상징계가 나온다. 판사의 판결봉. 대타자가 선언한다. ‘너는 ○○○이다.’ 상상계가 진짜의 개입, 즉 실정법의 개입으로 쓸모없는 망상이 되어 사라져버린 건 당연하다. 정신분석이 다루는 게 사회 속에 있는 걸, 개인의 병은 그리하여 사회의 병인 걸,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선언에서 더 이상 더 갈 길이 없다. 라캉은 인간의 법을 언어의 법이라 결론한다. 그런데 저 둘은 닮았다. 법과 언어의 상징계에서 대타자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언이란 “너는 죽는다.”이고, 이미지와 애증의 상상계에서는 아예 거울 속의 소타자 자체가 죽음의 이미지다. 소타자에 대한 질투와 시니피앙의 무한 엔진, 그 용광로 같은 열광도 닮았다. 메커니즘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실재계는? 이건 없는 세계다. 세계는 상징화를 통해 구성되는데, 이것 때문에 못하게 된 것, 상실된 것, 그것이 실재계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연을 기다려야 한다. 외상과의 우연한 조우가 있으면 주체는 주체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조우’를 뭐라 부르는가? 라캉의 네 접점 중 세 개, 즉 대상 a의 잉여 향락, 팔루스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향락은 쾌락과 다르다. 긴장을 재생산하며 지속하는 것이다. 라캉이 그 예로 든 그리스도교의 성인(聖人)들의 행동은 다소 충격적이다. 떨림과 긴장이 교차하는, (굳이 쓰자면) 똥 먹기, 나병 환자 씻긴 물 마시기, 이런 것. jouissance란 곧 죽음의 충동과 같다. 여기서 절대적 향락을 주목하자. 이 신화적인 향락은 근친상간, 살인의 금지와 딱 붙었다. “그건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라는 긴장. 금지는 하라는 것이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충동을 치수(治水)하는 게 계율이다. 합법적 향락 만들기 프로젝트.
팔루스의 향락도, 대상 a의 잉여향락도 모두 향락의 조정기, 즉 레귤레이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신체 기관에 대한 향락, 권력에 대한 향락, 그리고 찌꺼기에 대한 향락이다. 이런 것들이 합법적이라고? 물론이다. 팔루스의 향락은 상징에 대한 향락이다. 페티시즘과 무한 권력욕이 비합법적인가? 찌꺼기라도 향락하자는데, 가벼운 도착 행위, 여자옷 입기나 남자옷 입기나, 아니면 유니폼을 갖춰 입은 이 일상이나 그런 것들이 죄가 된단 말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이 ‘코스프레’ 사회가? 아니다. 그럴 일은 없다. 단, 라캉이 이런 향락들을 모두 뒤로 하고 언급한 고귀한 향락이 하나 있다. 바로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이다. 이 단어만은 끝까지 기억하고 이로를 따라가야 한다.
우선 르장드르의 비판은 견지해놓자. ‘여성의 향락’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교적이다. 그들의 신은 남자가 아닌가. 여기서 <여성>은 지극히 제한적 용어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을 실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현실에 없는 건 아닌가 생각까지 해봤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법열에 든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신을 사랑한다고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게 신앙의 확증이요, 과시요, 또한 희열이라면. 그러나 정말 신을 사랑하여 저 베르니니의 조각상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로운 그 표정을 한 여성은 못 봤다. 신과의 연애. 그 불온함. 신을 연모하는 그녀들의 말은 상징계에 속하지도 않아서 라캉은 그걸 ‘라랑그(Lalangue)’라는, 잘 모를 용어까지 고안해내며 “언어는 바깥을 내포하고, 언어 바깥에서 비로소 언어가 된다.”(207쪽)라고 말한다. 사실 이 의미를 잘 모르겠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안다는 뜻도 아닌 게, 그건 어쩌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d Des Schweigens)>를 읽고 난 후 내가 갖게 된 어떤 감각적 추정, 아니 경외심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추억은 접고, 여하튼 이 향락을 추구한 신비주의자는 마리아가 되려고 했고, 그것은 사회와 세계를 낳는 진정한 혁명. 여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라캉은 여러 비판을 받지만 그래도 이 ‘여성의 향락’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건 용감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라캉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자 ‘표상과 시체 : 하이데거·블랑쇼·긴츠부르그’라는 괄호의 장을 마련해 “표상은 시체다.”, “우리는 인형이다.”, “이것이 니힐리즘인가?”, “우린 원래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새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어느 정도 환기시킨다. 답답했던 라캉의 장에서 그렇게 작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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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로 넘어왔으니, 당연 르장드르는 정신분석을 맹비난하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 아니다. 딱 옳다. 그러나 계보적 구축과 규범 시스템을 밝혀낸 공로는 인정한다. 그리고 사실 르장드르가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도그마 인류학’의 그 ‘도그마’를 추출해내는 지점도 정신분석 비판의 안에 있었으니, 둘의 관계를 독자인 우리가 아주 삐딱하게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 대체 도그마란 무엇인가?
우선 르장드르도 상상계와 상징계의 붕괴를 말한다. 대타자와 소타자, 시니피앙과 이미지의 구별이 없으니 라캉의 저 <거울>이란 건 말과 이미지가 섞인, 아주 치밀하게 조립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이 광학적 기능을 한 <거울>을 말했다면 르장드르는 더 나아가 그걸 사회와 엮어버린다. 사회=<거울>. 이미지는 그냥 비춰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울> 면에 텍스트와 함께 직조‘되어’버린 것으로, 거울은 곧 텍스트가 된다. 우리도 텍스트다.
그러면 남는 질문은 “대타자도 <거울>로 볼 수 있는가?”이다. 우리를 제어하는, 우리를 선언하는 자를, 아니, 신을? 신이 눈에 보일 리는 없다. 보인다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대타자에게 “너는 ○○다.”라고 선언할, <거울>로 비춰줄 대타자는 없다. 신의 <거울>에서 보이는 건 세계다. <거울>을 봤는데 세계가 보인다니! 이런 (르장드르의 표현대로라면) ‘미친’ 상태는 분명 신화적이다. 따라서 신이라는 건 모든 거울보다 앞서 있는, 앞서 존재하는 <거울>이다. 이걸 르장드르는 <절대적 거울>이라 부른다. 이게 그의 도그마다. 인과성도 없다. 근거도 없다. 설명도 필요 없다. 그런데도 인과성과 근거와 설명이 개시되는 것. 이것이 바로 도그마적 <거울>이다. 인간은 여기서 만들어지며, 이것의 구체화가 엠블럼이고, 엠블럼이 우릴, 군중을 움직이게 한다. 아니, 우리가 엠블럼이다.
이 도그마를 알았으니, 진짜 이런 게 우리에게 있는지 알아봐야할 차례인데 사실 별로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있다. “근거율은 예술이고, 근거는 미적·감성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295쪽)라는 말은 별 설명 없이 도그마적으로 설치된 엠블럼이 우리의 생사를 좌지우지하기까지 하는, 예로 들게 되면 아주 비근해지는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므로 ‘자명한 일’ 역시 아니다. 왜 ‘1’을 ‘1’이라고 세는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최초의 시니피앙을 도입하는 것, 그 공허한 장소를 염두에 주는 것. 정치 기술들은 분명 이런 도움을 받고 있다. 근거율과 인과율이 분할되어 있다. 르장드르의 이 말은 법의 말로 분류된 우리 사회가 “그건 왜 그런 겁니까?”라고 묻는 순간 사상누각이 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제시한다. 그러니 증거가 되는 텍스트에도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아, 진리는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텍스트만 있는 것일까? 르장드르는 그래서 책 제목도 『텍스트의 아이들』이라 한 것일까?
법의 말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수취(收取)하는, 르장드르의 이로를 따라 엄밀히 생각해보면 맞긴 하나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모래 같은, 나약한 이 모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르장드르가 하나의 ‘판본’에 지나지 않는다며 일격에 산산조각, 그 파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유럽의 긴 역사를 목격해야 했다. 사실이다. 난 그를 전혀 몰랐다. 라캉이나 푸코는 대학에 '들어는 본' 정도였고, 푸코는 약간 읽기도 했지만 르장드르는, wikipedia 검색도 순탄치 않은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너져버린 ‘도그마 인류학에서의 아버지’라는 개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무너져버리는 모습에 무섭기도 했다. 아주 교묘한 책략과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라는 픽션과, “닮은 자가 닮은 자를 낳는다.”라는 오래된 법의 문구를 인용한 르장드르의 의도가. 흡사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이가 죽어도 “<거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존재해야 한다.”(341쪽) 왜? 그게 삶을 다듬으니까. 이 위험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도박판이, 다름 아닌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서움은 안도, 절반 정도의 안도로 바뀐다. 결론은 이거다. 르장드르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 저 판본을 만든, 도그마의, 텍스트의 힘을 무시하는 자가 원리주의자다. 그는 전제적인 폭군이 된다. 나-텍스트의 경계도 구분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귀결된다. 오늘 우리는 그 모습을 본다. IS는 지난해 가장 뜨거운 단어였다.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소격하는 자, 소격을 천명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렇다. 해석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꾸란>이 “죽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아무나 죽이라는 건가? 텍스트와 우리 사이에는 소격이 있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자의 세상이 된다.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르장드르의 ‘도그마 인류학’에 따르면 우리는 제정되는 주체, 재설정되는 주체,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주체들이다. 이렇게 주체가 만들어지는, <거울>과 주체의 관계를 ‘의례’라 부른다. 우리는 이 의례가 없으면 진짜로 ‘말’이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춤이어도 된다. 언어적인 것만을 법이라 여기는 건 너무 유럽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르는 것에서 출현했다. 르장드르는 여기서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에서부터 법학자의 국가, 즉 법치국가의 출현에 이르는 역사를 설명하며 문자화된 법이 갖게 된 절대적인 위력을 보여준다.
그 결말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에서 세속화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단, 우리가 아는 그 세속화는 아니다. 종교와 떨어진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세속화는 “종교 자체의 본성과 관련된 광대한 연극적 총체의 일부”(377쪽)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자. 그리스도교의 규범 공간이 더 오래 살아남고 싶어서 알리바이를 깔아놓은 것 정도로 생각하자. 유럽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던가?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아!’ 할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어디 진짜 자유던가? 세속화된 근대국가에 종교가 없던가? 이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결론이 나온다. 국가는 찰나다. 명운은 끝났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절대적 준거>가 만들어낸 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형식주의는 사회과학의 위력과 함께, 기능주의의 추상과 함께 <국가>라는 개념이 소탕되는 소란을 틈타 같이 소멸된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의 멸망을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리를 ‘지배’하는 건 반드시 <국가>일 필요는 없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은 ‘매니지먼트’가 맡아도 된다. 그리고 매니지먼트는 국가를 비난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떳떳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이거다. 매니지먼트는 믿을 만한가? 필연적인 결론인가?
아니다. 저자는 살만 루시디 사건을 조망하는 벤슬라마를 잠깐 거쳤다가 다시 르장드르로 돌아오면서 매니지먼트의 보편성은 인정될 수 없다는 논조를 강력하게 조명한다. (벤슬라마도 중요하다. 원리주의-종교의 구별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는 문제이므로 기억해주는 것이 좋다.) <중세 해석자 혁명>이 가동시킨 텍스트의 정보화를 신봉하는 그들은 계보 원리는 몽땅 국가에게 떠넘겨놓고는 <법 권리>까지 밀어내려고 하는데, 이것이, 그러니까 과연 민영화가 재봉건화와 다를 바가 뭐가 있다는 것인가? ‘경영자-상사-부하’가 ‘주인-종자’와 뭐가 다른가? 우리도 그렇게 툴툴거리는데.
게다가 이들은 “물음의 제도의 폐지를 고하고”(407쪽) 있다. 근거율이자 <거울>이자 소격인 ‘왜’, ‘사랑’,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국가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국가는 죽어도 된다. 하지만 해석은 살아야 한다. 텍스트는 얼마든지 픽션이 된다. 그것은 도박이다. 역사의 도박이다. 끝나지 않는 도박. 이 도박장에서 우린 살아남아야 한다. 절멸 금지. 이 도박장에서의 춤, 즉 법과의 열광적인 춤은 바로 사회와 세계를 낳는다는 라캉의 ‘여성의 향락’과 닮았다. 갱신의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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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푸코다. 아니다. ‘갈팡질팡하는’ 푸코다. 저자와 함께 그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종류이겠는지를 잘 모를 감동 같은 걸 받았다. 진하진 않다. 푸코를 비난하는 쪽에서 들려온 이 세계의 목소리를 아주 모르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도 옹호해야 할 부분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가만히 멈춰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판단은 우리 몫이다. 하지만 일단 그 이로는 따라가야 한다. 초기의 푸코에서 후기의 푸코에 이르는 긴 길을 사사키 아타루는 정말 그대로 걸어간다. 설정했다가 폐지했다가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이어가기도 하고, 아이처럼 맨손으로 정치 문제에 덤벼들었다가 ‘된통’ 당하는 그 모습을 거의 여과 없이 보게 된다.
곁가지를 다 쳐내는 위험을 감수하자면, 푸코는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의 구분과 이후 그 구분이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이로를 갖고 있다. 초기의 푸코는 주권권력을, <주권=법 권리>의 개념을 일관되게 비판했다. 너무 낡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감시와 처벌(원제 : Surveiller et punir)』에 제시한 권력은 규율권력이었다. 고문, 살해, 추방의 의례도 아닌, 죄와 관련된 기호를 각인시켜버리는 상징 설치도 아닌, 바로 감옥에 넣어 신체를 훈련시키는 규율. 이 책에서 푸코는 결론짓는다. 권력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만인을 본다. 권력의 기계. 장치. 기계. 정교함으로. 벤담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감옥은 실패하지 않았는가? 범인들이 더 이상 안 들어오던가? 아니다. 그건 범죄를 필연적인 요소로 설정하여 그 비행성을 감시하도록 한다. 아주 교묘하다. 그 positive가.
이런 까닭에 푸코가 정신분석을 그렇게도 비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주권적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가정’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뒀으니 “너희들은 낡았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규율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정신의학의 여러 전략들을 꼬집는데, 아홉 개나 되는 항목을 읽고 있으면 주변에 정신의학 전문가나 지지자들이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게 되는 문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사키 아타루는 갑자기 선언한다. “푸코는 옳다.”(542쪽) 권력의 주구(走狗), 앞잡이, 개 정도로 정신분석이 격하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학과 사회학 역시 같은 범주에 집어넣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근친상간, 인육식, 그의 상징과 같은 마리 앙투아네트 사건, 자위박멸 캠페인, 핵가족 고안(등장이 아니다. ‘고안’이다.) 등등. 정신분석은 부르주아에게, 사회학은 서민 계급에게 명령하며 사회를 만들어간다. 푸코는 분명하게 말한다. “금지는 틀림없이 지식인이 발명한 것입니다.”(557쪽) 그런데 규율에는, 푸코가 말한 그 권력에는 바깥이 없으니 안에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회는 이제 안으로, 미시적인 수준으로 봐야 한다. 그 안에서 투쟁의 울림소리를, 전쟁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푸코가 돌연 ‘생명 정치’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건 그가 인종주의와 마주한 순간에 찾아온 개념으로, 인종주의-국가의 연결이 일어난 시에이예스의 ‘나시온(민족) 투쟁의 국가화’가 연관되어 있다. 홉스 비판에서 인종주의까지 연결되는 건 당연한 절차인 듯하다. 사회가 전쟁인데, 그 전쟁이 실제 어떤 판도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고찰한 거니까. 그런데 이 ‘생명 권력’이라는 것이 묘하다. 규율 권력처럼 신체에 관여하여 훈련시키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큰 규모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구이다. 이 생물학적 집단에 관여하는 생명 권력은 폭주할 수도 있다. 원자 폭탄의 사례, 유전자 조작과 바이러스 생산의 사례. 이 권력은 대체 누굴 ‘죽일 수’ 있는가? 바로 인종주의가 여기 개입한다. 이어 나치스가 나오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전면적인 죽음으로 가는 국가. 자살 국가. 르장드르도 이런 국가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궁금하다. 과연 저 두 권력의 교차점에는 뭐가 있을까? 바로 성(性)이다. 신체와 인구의 교차점이지 않은가. 바로 이 성이 규격화 권력의 대상이요, 항상 감시 받는 대상. 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주권권력과 관계가 없으니까. 그리고 성 담론이 활성화되는 역사적 사례가 소개된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진리 말하기’가 되는 현상까지도. 여기서 푸코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권력의 법적·부정적 표상과 결별”(621쪽)하자는 것이다. 그건 네거티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푸코는 흔들려 있다. 주권권력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권=법 권리>를 논하며 나치스를 비판하던 그 모습은?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것에 주목한 1978년 2월과 그 이전의 푸코는 분명 다르다. 통치성은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에 이르는, 그가 영토-신체-인구로 나눠 서로 다르다고 했던 세 시기에 고루 들어 있다. 통치술이 문제가 된다. 모든 시기가 그랬던 것이다. 주권과 영토를 중심에 둔 그리스의 신은 이제 그리스도교 사목의 ‘목인’이 되어 16~18세기 통치술의 출현 배경이 된다. “모든 양을 위해 일부 양을 희생하는 사목”(653~654쪽)인 국가이성이 있고, 또 하나로는 사법·군대·외교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폴리스가 있다. (여기서의 폴리스는 아직 police, 경찰이 아니다.) 이윽고 출현하는 자유. 경제학, 자유주의, 자유의 출현으로 통치는 이제 자연에, 아니 경제에 철저하게 준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성은 ‘작은 국가’를 표방한다. 국가가 손대지 못하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다. 이제 진리는 사법의 권한이 아니다. 시장에서 형성되니까. 진리는 가격이니까.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도 실은 조작이다. 우리도 그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유가 우리를 옭아매는 저 단어의 ‘역겨운’ 역설 말이다. 자유는 만들어진 것이다. 세큐리티 시스템이란 바로 그걸 효율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그것은 일상의 위험을 언급하여 우리를 규율적 생명장치인 자유의 안에 가두는 한편으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 어서 시장으로 나와라.”라고 설득한다. 자유의 생산은 통제의 생산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시장의 가능성을, 그 힘을 확고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 과연 시장에게 국가나 사회를 만들 만한 강력한 힘이 있는가? 구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의 교환 기능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교환은 다 하니까.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은 그것보다는 경쟁의 장소가 된다. 가치냐, 균형이냐 하는 것 따윈 버려둔다는 것이다. 우리도 알지 않은가? 경쟁과 독점, 그 특권적 형식이 뒤범벅되어 있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때론 그 성공의 신화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민영화의 폐해를. 우린 그 위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직면할 수밖에 없다. 왜? 자유가 이미 강제됐으니까. 창업가의 사회다. 벤처. 그렇다. 여긴 벤처의 사회다. 용감히 도전하라. (그 뒤는 알아서 하라.) 이건 통치술의 효과다. 사회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고? 픽션일 뿐인데. 저자는 푸코의 입을 빌려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전복될 수 있다.
규율적 생명정치. 실은 이것은 르장드르가 말한 의례 역사의 한 판본에 불과했다. 유럽의 판본. 푸코도 이를 깨닫고는 규율적 생명정치가 “거의 다 종교적 의례를 그 기원으로 한다.”(699쪽)고 수정했다. 이제 푸코는 새로운 권력이 나와 낡은 권력을 소멸시킨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여러 통치술이, 여러 장비가 마련된 역사의 도박장을 그린다. 그리고 이란혁명 때 시아파를 지지한 까닭에, 그 믿었던 이란이 끔찍한 사형을 연이어 실시한 까닭에 푸코는 엄청난 비난을 받지만 이미 깨달은 뒤였다. 낡은 것은 없다. 이슬람의 혁명적 힘을 가능케 한 그 종교의 빛이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져버림을.
여기까지 온 푸코가 향한 곳은 저 먼 그리스였다. 사목 권력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제한 없는 복종을 강제하던 그 통치와는 다른 통치가 필요했던 까닭일까. 푸코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중시한 그리스·로마의 통치에서 철학과 영성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고무되었던 것도 같다. 여기서 생존의 기법, 자기에의 배려, 자기도야=문화=숭배, 이런 말들이 나오며 사회적 실천과 국가 통치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곧 폐지한다. 그런 고대의 문화도 실은 트렌드였으며 처세술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저항과 혁명을 그것이 보증하던가? 그게 매니지먼트 문학과 뭐가 다른가? 자기계발이니, 정신세계이니. 이제 푸코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소격을 유지시키는 몽타주의 여부다. 그 장치가 있어야 원리주의가 아닐 수 있다. 르장드르와 벤슬라마가 다시 소환되며, 원리주의-종교의 명확한 구분 가능성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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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와 결론과 보론. 『야전과 영원』의 후미를 이루는 이 세 개의 장에서 나는 다소 난잡한 형상을 목격했다. 지금도 그 광경 탓에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을 강제로 달래는 중이다. 이렇게 글로 쓰면서. 괄호는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범한 실수와 이를 『천 개의 고원』의 서문에서 시인하는, 즉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 묘사된다. 동요하는 자본주의에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제시된 그 분열병적인 미래주의, 혁명 프로그램은 실은 불가능했던 것임을. 오직 투쟁은 라캉의 ‘여성의 향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에서 다시 소환된 들뢰즈로부터 우리는 언표-가시성의 분리와 그 둘의 강제적인 조우를, 역사상의 우발적 형성과정을 듣게 된다. 이건 르장드르가 앞서 말했던 텍스트와 다르지 않다. 제 3자와 같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 등으로 불리지만 가시성-언표의 이 관계는 잡다한 문맥에서, 잡다한 다이어그램에서 마구잡이로 (하지만 대단히 세심하게 고안된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가져와 섞어 구축되는 새 다이어그램의 정착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멸한다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옆으로 날아간다.”(767쪽) 이 표현이 딱 적절하다. 이미 존재했던 건물(가시성)이 범죄행위에 대한 언표와 조합되어 감옥이 되는 것은 ‘감옥 만들기’ 다이어그램에만 속하는 과정이 아니니까.
저자는 이렇게 멀게 돌아온 이유를 여기서 말한다. 푸코와 르장드르와 들뢰즈와, 이 셋과 라캉의 물고 물린 비판의 구도는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한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770쪽)서였다고 말한다. 무슨 식탁? 내부에서 내부를 만들어내는 <바깥>의 식탁. 창조라는 도박의 행위. 다이어그램의 새로운 고안. 아니, 그것보다는, 나는 이 표현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데, <밤>의 한복판에서 추는 텍스트와의 열광적인 춤 무대, 그 영원한 야전. 라캉을 빌리자면 바로 ‘여성의 향락’의 식탁. 소격의 진리를 견지한 자들이 펼치는 무한의 도박장. 그 역사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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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그 도박판에 뛰어든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가져다가 새 다이어그램을 만들고는 “새 시대가 열렸다!”라고 선언하는 식으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한해서 말하자면, 돈만 있으면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푸코가 본 이상적인 도박 참가자는 따로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디오게네스를 가로지르는 사유에서 그가 건진 것은 견유학파다. 형이상학, 즉 다른 세계의 문제를 탐구하는 정신이 있다. 다른 하나는 ‘생존의 문체론’으로, 이는 삶의 다채로움을, 다른 삶의 문제를 본다. 들뢰즈를 봤으니 하는 말인데, 이는 가시성과 언표의 문제이니 서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견유학파는 이 둘을 동물성=단련으로 연결시켜버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푸코가 ‘초역사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이 견유학파를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회였을까. 초역사적 견유학파. 어느 시대에나 있다는 그 개들. “진리를 난폭하게, 폭력적으로, 파렴치하게 표명하는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796쪽)인 그것이 우릴 다른 삶으로 이끈다. 이 집요한 개들이. 저항의 초역사성이. 타자의 감시와 자기의 감시가 같은 개의 삶이,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의 감시를 통해서 우리는 저 도박판에서 씻겨 나갈 뻔한, 수도 없이 그럴 뻔 했던 소격의 진리를 수호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주석과 후기를 끝으로 책을 덮었다.
이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문자들을 타이핑하며, 그저 마음을 좀 달래보겠다는 심산으로 서문과 본문과 이 맺음말 사이의 하루 이틀 간격의 서어를 반복하면서, 인정하긴 싫은 마음이긴 하나 도박을 해온 것이란 말일까? 그렇다. 나는 다이어그램을 만들 줄 모른다. 뭘 내걸어야 상대와 승패가 걸린 역사의 한복판에서 서있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안심에 대해 굳이 변론해야겠다. 『야전과 영원』으로 갖게 된 새로운 눈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읽은 이들이 여기까지 나의 진흙탕길[泥路]을 따라와 줬다면, ‘무슨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나처럼 대답할 마음이 있지 않을까? 개처럼 살겠다고. 집요한 개로 <밤>을 살면서 텍스트와 영원한 <춤>을 추겠다고.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오겠다는 심산으로, 아직 나는 어리다며 유보해본다. 나는 대체 어디로 초대된 것일까.
p.s 몇 가지 오타로 보이는 것이 있어 지적한다. ① 인명 표기의 오류다. Emmanuel Joseph Sieyès의 음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시에예스가' 579쪽에 나오고, 586쪽에는 '시에이예스'라고 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인명의 병기는 혼란을 줄 수 있다. 물론 시에예스든 시에이예스든 이 책에서는 딱 한 번만 짧게 나오지만. ② 집단명 표기의 아쉬움이 하나 있다. 보통 우리는 '수니파'라고 한다. sunnah에서 연원한다면 '수나파(703쪽)'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단명은 보통 'sunni'라고 한다. 더 엄밀히 표기하자면 '수니파'보다는 '수니 이슬람'이라고 밝혀주는 것이 더 좋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