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로,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길희성 지음 / 휴(休)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2015.11.20



    일본 작가 나카무라 히카루(中村 光)의 만화 <세인트 영 맨(원제 : セイント☆おにいさん)>은 천만 부 이상 팔린 성공 덕분에 2013년 5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상영됐다. 도쿄의 타치카와(立川)에 사는 룸메이트인 예수와 부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09년에는 데츠카 오사무 문화상을 수상했고, 앙굴렘 국제코믹페스티벌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둘은 지구에서 휴가를 즐긴다. 예수는 쇼핑을 좋아하고, 부처는 만화를 좋아한다.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맥주도 마시며, 블로그도 한다. 예수가 목욕탕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가 하면, 흥분한 부처의 이마에서는 빛이 난다. 개그와 유머가 주가 되긴 하지만 슬라이브 오브 라이프(Slice of Life) 류의 소소한 분위기 속에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녹아 있기도 하다.


    앞으로 오랫동안 종교와 인간에 대해 이모저모로 알아볼 계획이었던 근 몇 년 사이, 내가 <세인트 영 맨>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은 건 당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작품이다. 조직과 체계를 갖춘 종교보다는 조상을 숭배하는 신토(神道)를 따르거나 무종교인 경우가 훨씬 많은 일본이기에 큰 히트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2006년 일본의 Dentsu Communication Institute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52%에 이르는 일본인이 신토, 혹은 무종교였다. 일본인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개인적 신앙이 아닌 체계적 조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2위는 35%의 불교였고, 4%는 조직화된 신토 신앙, 2%가 그리스도교였다. 종교적으로 보면 혼합주의(Syncretism)인 일본은 분명 종교의 조직화가 탄탄한 우리나라의 독실한 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종교 현상을 갖고 있다.


    내가 <세인트 영 맨>을 몇 번이고 돌려봤던 이유는 일본의 혼합주의(혼교주의)에 공감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각 종교의 이런저런 가르침들을 자신에게 적절하게, 혹은 유리하게 취합하는 일은 때때로 아전인수 격이 될 수 있어 위험하기도 할 것이다. 일련의 앎과 수련이 요구되기에 명사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주의란 뜻이다. 한편으로 혼합주의는 절대가치가 해체된 오늘날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인문학적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대 조직인 종교는 카렌 암스트롱이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는데, 이는 절대적 진리의 포기(주로 유일신교의 교리 포기)와 그간 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공격이다. 혼합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란 진리를 가치개방사회에 녹여낼 수 있는 카리스마와 호소력을 가진 종교,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종교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종교는 비판받을 점이 많다. 종교계 내부의 양심적 인사들의 비판이 심심치 않음도 이를 대변한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에 이은 독서였다. 그녀는 현대의 종교가 어쩌다 이 지경의 궁지에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장구한 역사를 자신의 책에서 풀어냈다. ‘모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설 속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에 주목하기도 했다. 비움(케노시스)과 침묵의 중요성도 재차 강조했다. 나는 궁금했다. ‘그렇다면 비움의 종교는 어떤 모습이며, 앞으로 나는 종교에게 어떤 점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신자로서 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가톨릭 냉담자다. 내게는 종교가 보호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 꺼려하는 민주주의의 도덕적 가치가 종교의 진리보다 훨씬 중요하다. 개방성은 갈수록 문을 닫아가는 듯한 ‘열린 현대사회’의 아이러니 속에서 늘 강조되어야 한다. 나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종교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예컨대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달라이 라마 등.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교다원주의를 정확히 봐야 한다. 길희성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는 앞선 나의 질문에 답한 책이다. 화합을 원하는 원로학자다운 둥근 필체가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종교 조직과 일부 몰상식한 신자들을 향한 날선 일갈도 많다.




*    *    *




    인간이 만물의 정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특별히 우월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물에서 살 수도 없고, 날지도 못하며, 시각과 청각은 형편없다. 다만 한 가지 특징은 독보적이며 결정적이라고 확증할 수 있다. 사고(思考)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처럼 앉아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고민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존재는, 과학이 확인한 결과 아직까지는 인간밖에 없다. 과거 인간의 조상들은 발톱과 털을 포기하는 대신 조직화의 길을 택해 그에 필요한 두뇌의 힘을 기르는 진화의 경로를 밟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유전자의 선택이다. 그 결과 인간은 고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피치 못할 잔인한 운명과 대면하게 했다. 존재와 의식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은 그 괴리 속에 ‘자기분열’이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함정에 송두리째 빠져버렸다. 이제 인간의 한 개체가 평생을 다해 이뤄야 할 목표는 분열된 자기의 재통합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욕구와 종교의 관계를 역설한 바 있다.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물색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걱정을 내심 하면서도 이상하게 현대사회는 자기성찰이 사치인 분위기다. 길희성은 이를 ‘의미의 위기’라 불렀다. 방법은 쉽다.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어려운 점은 그럼에도 확답을 구하고자 하는 과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 인문학적 정신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이기에 권위와 확일, 그리고 순응의 사회로 변질되어간다. 쉽게 내 편 네 편 가르는 것도 그런 연유이리라. 왜 사람들 중에는 질문하는 것을 두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툴툴거리는 이들이 있는 것일까? 대부분은 그보다 생계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는 까닭일 것인데, 물론 우린 밥을 먹어야 살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분열된 자기’를 살려야 할 의무도 있다. 반쪽을 포기한 인생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뒤늦게 질문을 던지고 두려워한다. 후회도 한다. 힐링과 자기계발 열풍의 이유다. 자기의 삶을 묻는 50대 베이비붐 세대들의 도서 소비량이 확연히 늘었다. (교보문고의 지난 10년 간 연령∙성별 도서 구매 점유율 조사에 따르면 40~50대의 도서 소비량이 6~9% 증가했다. 1위를 차지한 40대 여성의 경우는 자녀교육 차원에서 학습서를 구해 큰 폭으로 오른 것이지만 50대는 자기계발에 집중했다. 20~30대가 취업과 경제적 이유로 독서를 포기했다는 분석은 못내 씁쓸하다.)


    또 하나 인간의 최대 고민거리는 죽음에서 비롯된다. 길희성은 죽음을 ‘곱하기 제로’의 존재라 했다. 도루묵이라는 거다. 죽음은 인간을 근본적 물음으로 끌고 간다. 타인의 죽음마저도 비극임을 아는 인간 특유의 감성 능력은 복이면 복이고 족쇄면 족쇄다. 카렌 암스트롱은 그 타인의 범위를 인간이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에게까지 끌고 가서 종교의 태초를 해석했다. “종교적 삶이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뿌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41쪽) 그러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공포 앞에서 물어야 한다. 평소에는 외면하며 살 수 있지만 언젠가 자신이 밟게 되는 종착지에 대한 물음은 “죽음마저 넘어설 어떤 지고선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35쪽)이다. 이건 내세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다음 삶이 있든 없든 피해갈 수 없는 그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의미한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을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현상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로 내다볼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11천년 기 정도다. 즉, 11,001년 무렵까지다. 그 이후는 과학모델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대략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만 있다. 영화 <아마겟돈>이나 <딥임팩트>의 가상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도 지구의 평화로운 연대기는 약 6억 년 정도면 산산조각 날 확률이 높다. 오존층이 상당 부분 없어져서 대량멸종이 불가피하며, 무엇보다도 그때가 되면 달이 궤도에서 이탈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생태계가 감당해내야만 한다. 광합성을 하는 식물의 99%가 멸종한다. 물론 이 시기에는 인간이 지구에 없을 것이다. 타행성에 정착하든 그렇지 못하든 언젠가 인간 종은 지구에서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구가 종교 발상지의 상징으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종교의 오늘날 모습은 왜곡된 부분이 많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급한 일반론으로 종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길희성이 책에서 언급한 대표적인 폐단은 기복신앙이다. 간절한 마음이야 짐작을 할 수는 있지만 내게 이해가 안 되는 그 마음의 하나가 수능기원 기도에 뛰어드는 학부모들의 마음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도 하고 대입이 워낙 중요한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분명하다. 산을 타는 나는 사찰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그 시간과 사찰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고3들이 수능이라는 걸 막상 실감하지 못하는 시기인데도 매년 4월이 되면 벌써부터 합격기원 기도를 올린다는 플랜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 모습을 본다. 지지난 가을 도봉산 망월사에 물을 마시러 들렀다가 본 학부모들의 기도행렬은 가히 장관이기도 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다. 종교가 왜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는지는 기복신앙을 내세우는 그들의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그들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길희성은 일갈한다. “기복신앙을 주로 내세우는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된다.”(위의 책, 47쪽) 심지어 그는 종교에서 복을 찾는 이들을 두고 예수와 부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비판했다. 이른바 ‘종교무식사회’라는 것이다. 나도 묻고 싶다. 그들은 어째서 예수와 부처가 소원을 들어줄 거라 믿을까? <세인트 영 맨>의 가상처럼, 약간의 각색으로 저 두 성인이 우리말을 배워서 할 줄 안다고 하자. 워낙 큰마음을 가진 터라 우리의 현실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기복에 빠진 모든 이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안타까움이 크게 자리 잡지 않을까. 자신들에게 소원을 들어달라는 기도는 애당초 그 시절에는 있지도 않았으니까. 참된 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와의 완전한 합일이다.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는 것, 부자 되게 해달라는 것, 올해는 시집장가 가게 해달라는 것은 항구적 행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참된 종교는 또한 욕망의 크기를 작게 줄이는 심신의 도야 역시 주문한다.


    게다가 기적 자체를 바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따금 강렬한 체험을 해 신앙에 빠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길희성은 기적을 ‘차별적 경험’으로 본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라는 태도다. 참된 종교의 가르침은 세상 모든 일을 기적으로 보게 만든다. 모든 것을 경외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정신은 보지 않고도 믿는 위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건 ‘기적’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시선이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원제 : Vreme čuda)>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닥친’ 기적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비극적으로 풀어낸 독특한 시각의 작품이다. 너무 독특한 나머지 ‘이단소설(異端小說)’의 악명을 받을 소지까지 있어 번역을 맡은 이윤기가 별도의 장을 마련해 변론하기도 했다. 기복을 한다는 건 어쩌면 ‘나는 신앙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다.’라는, 별로 드러내지 않아도 될 자신의 속마음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희성이 이런 우리 사회의 왜곡된 모습과 대비한 것이 서구의 불자들이다. (그는 ‘백인불자’라는 단어를 썼는데, 인종적 차원에서 달리 들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물론 그는 그런 맥락에서 쓴 건 아닐 테다.) 서양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까닭은 대부분이 개개인의 마음공부를 위한 소소한 의도 때문이었다. 당연히 기복신앙이 아니다. 양서를 꾸준히 읽고, 불교의 수행법을 실천하며, 검소하게 사는 이들이다. 불교가 서양으로 전파된 건 꽤 최근의 일이지만 우리의 불교가 이를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까닭일 것이다. 한 종교관련 교양강의를 맡았던 교수는 내게 베르나르 포르의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를 추천했다.


    기복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의 절대성’에 근거한다. 위험한 신앙이다. 신을 객관적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길희성은 어리석은 맹신과 독선적인 확신 사이에 올바른 신앙을 위치시킨다. 맹신과 확신이 더해진 광신을 최악으로 꼽는다. 문자주의도 위험하다. 언어초월적인 신을 격하시키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도 말했다. 아니, 그녀가 책에서 언급한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들도 동의한 바다. 신에 관한 모든 언어는 상징이다. 문자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복음주의는 쉬운 교리를 원했기 때문에 그냥 언어에만 의존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를 일찍부터 깨달았던 위대한 현자들은 ‘신’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을 지금의 우리처럼 남용하지 않았다. 다석 유영모는 신을 두고 ‘없이 계시는 분’이라 표현했다. 틸리히는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라 불렀다. 신은 암호화되어 있다. 그 비밀을 찾기 위해서는 영성의 대가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한편 확신과 맹신을 경계하는 자세를 늘 유지해야 한다. 신에 대해 안다는 건 정보를 취득하는 게 아니다. 목표는 합일. 길희성은 이렇게 말했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암호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신을 만난다.”(위의 책, 89쪽)


    사실 위와 같은 삶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다르다. 책을 읽으면서도 괴리감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성을 중시하는 삶은 마치 모든 것을 피해 나만의 초월을 위한 소극적 삶처럼도 보인다. 초월의 자세가 이상하게 제한된 자세로 보이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명의 구성원이지 않은가. 가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도 있고, 발전과 정의를 위해 이 사회에 기꺼이 희생해줘야 할 일정한 부분도 분명 맡게 될 터이다. 물론 저자도 그렇다. 이순이 넘은 길희성도 그 고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강화도에 한 영성센터를 여는 과정에서 큰 내적 갈등을 겪었던 모양이다. ‘도피는 아닐까?’ 둘 중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고민에 있어 유교의 거대한 우산 아래 당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떠올리기 쉽다. 나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의 중책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 그러나 생각해보면 수신 자체도 끝없고 때론 답 없는 무궁(無窮)의 차원에 있다. 그것만 추구해도 모자라는 판에 언제 사회에 뛰어들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후자를 더 강조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답이라고 못 박긴 뭐하고 그걸 ‘해결책’이라 둘러 표현해보자면, 그것은 아마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길희성은 이걸 ‘평화롭기’와 ‘평화 만들기’의 동시적 추구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나를 알아가는 공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사회를 알아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각각의 다른 주제 속에서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직적 운동이 더해져야 하며, 별도의 결단력과 훈련, 그리고 그에 따른 분명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종교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결합된 카리스마적 성인이 필요하다. 말로만 신자들을 깨우쳐주는 일과 평화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아마 그래서 함석헌이 <간디자서전>의 서문 격으로 쓴 1961년 2월 ≪사상계≫에 발표한 한 글에서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적은 것이리라.


    간디는 종교를 뛰어넘었다. 정(正)의 의미에서 본 혼합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뜻으로써 열려 있는 사회를 꿈꾼 그에게 가치다원화의 사회는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고 우려할 만한 세태도 아니었다. 간디에게 최고의 적은 맹신이었다. 그리고 그 적에게 목숨을 잃었다. 종교가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앞으로 상생하기 위해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스스로도 진단할 것이다. 그리고 독점적인 진리의 가치를 포기할 것이다.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구축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값비싼 대가가 필요했다.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순수를 상실했다. 권력의 도움을 받았고, 권력의 도움이 되었다. 현대인은 그러한 근대적 종교를 외면한다. 종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순수와 진정성을 회복해 권력 없이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하며,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라도 상대 종교와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 “모든 종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위의 책, 145쪽) 또한 민주주의의 근본정신과 가치와도 대화해야 하고, 종교비판을 받는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기도 해야 한다.


    길희성이 이 책의 제목에 사용한 ‘같은 산’이라는 단어는 표면만 놓고 보면 혹 종교다원주의의 현실과 배리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런 비유를 쓴 이유를 들여다보면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도덕실재론자이다. 종교적 진리 역시 실재한다고도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점이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도덕주관론(정감주의)의 위험성이다. 도덕이 상황마다, 혹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이 사상은 ‘살인’이라는 최악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비판력을 흐린다. 달라이 라마도 이런 점에서는 그와 노선이 같다. 비교적 최근의 저서인 <종교를 너머(원제 : Beyond Religion)>에서 그는 이타심과 배려 같은 인간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임을 입증 받고 있다면서 이른바 ‘현세적 도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물론 달라이 라마가 말한 ‘현세’는 ‘세속’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존경과 관용”(달라이 라마, <종교를 너머>, 27쪽)을 뜻한다. 그는 분명 초월적 도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희망 담긴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반대의 의견도 있어 옮겨본다. 이도 무시할 수 없는 시류이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과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모든 과학계의 도움’으로까지 확장시킬 수는 없다. 근대의 중요한 가치들이 현대사회에서는 무너졌다. 도덕도 예외일 수는 없다. 프란츠 M. 부케티츠는 <도덕의 두 얼굴(원제 : Wie Viel Moral Vertragt Der Mensch)>에서 절대적 도덕론에 극렬히 반대했다. 굉장한 비난조로 쓴 책이다. 아예 작별하자며 도덕의 독재와 결별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도덕주의자들의 치켜든 손가락이 인간의 이기심을 지적하지만, 인간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프란츠 M. 부케티츠, <도덕의 두 얼굴>, 53쪽) 모로 봐도 이는 도덕 창시의 상징과도 같은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을 겨냥한 발언이다. 권위주의와 결탁한 도덕, 그런 도덕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책무의 과중함에 대한 염증은 이렇듯 과학계의 예리한 목소리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편 길희성이 종교적 진리의 실재를 주장하는 까닭은 신앙주의의 위험성이다. 종교적 경험은 주관적인 환상일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르게 체험된다는 뜻이다. 역사와 문화만 놓고 봐도 그렇다. 체험의 순간이 기억될 수 있는 건 언어의 개입 덕분이다. 우리말로 기억되는 체험과 영어로 기억되는 체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번역에 애먹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시된 참된 종교의 가르침을 보면 초월의 무언가, 즉 객관적 진리가 제시되었다. 과연 각 종교들은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을까? 종교를 넘나드는 독서를 하거나 영성수련, 혹은 각 종교를 방문해 체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이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예수와 부처와 공자의 말이 큰 맥락에서는 상통한다는 점. 이들은 야스퍼스가 ‘기축시대’, 우리 독자들에게는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으로 몇 년 전 알려졌던 그 사상과 철학의 시대에 살았던 성인들이다. 이들이 제시한 도덕적∙영적 수준은 유사했다. 한편 고등종교들만 놓고 보면 일원론을 표방한다. 수많은 현상들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원리는 인격체로 표현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성의 측면에 있어 ‘합일(合一)’을 하나같이 강조했다는 점에서 위의 종교들을 묶을 수 있다. 교리 상의 유사점을 하나씩 열거해볼 수 있다고도 한다. 길희성은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


    사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에서 저자가 강조한 부분은 영성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종교의 변화보다는 그가 강화도에서 소수의 방문자들과 함께 추구하고 있는 영성의 변화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유교의 예를 든 것일 수도 있다.) 우선 개인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 그것이 아무리 부분적 변화라고 할지라도 쉽거나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한편으로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들 수도 있겠다. 종교는 집단적 현상이므로 필연 배타성이 약점이 된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의 종교 세태를 보더라도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189쪽) 현실이다.


    하지만 영성은 대체로 개인적이다. 법정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참나(眞我)는 타인과의 무경계라고 했다. 영성은 자발적 고독이자 침묵이자 부정으로, 그 모든 것은 자기 극복을 위한 것이다.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해체되고, 집착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시하며, 심층의 자아로 들어간다. 이 심층의 자아가 모든 종교가 함께 붙잡고 있는 진리의 세계에 있다. 종교가 외면 받는 사회라 할지라도 영성이 무시될 수 없는 까닭이다. 앞서 말한 에리히 프롬의 진단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여기서 제시된다. 길희성은 종교 위기의 사회가 오히려 영성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본다. 그에게 앞으로의 길은 ‘제 3의 길’이 된다.


    영성회복의 길은 제 9장 ‘영성의 대가들을 만나다’에서 제시되는데, 오래 전의 종교와 현대적 분석의 용어들이 다소 어렵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당나라 종밀(宗密)의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과 독일 가톨릭의 신비주의 계열 사상가인 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의 ‘지성(intellectus)’의 비교를 통해 둘이 실은 같은 맥락이며 잡다한 감각 대상에 휘둘리지 않은 인간성 그 자체, 본성, 혹은 본심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가 주장하는 절대적 주체인 ‘나-나(I-I)’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어려운 용어들이긴 하지만 이는 모두 영성수련을 통한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을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상대적이고 표면적인 나에서 심층적이고 절대적인 나로 들어가는 여정.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나는 나가 아니다.”라는 부정의 인식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러나 이건 말마따나 쉽게 당도할 수 없는 차원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이다. “종교도 다른 기술들처럼 인내와 노고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의례와 수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기 힘든데, 이는 마치 스케이트 선수가 얇은 스케이트날로 빙판 위를 활주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법칙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23쪽) 길희성도 그의 얇은 책에서 영성수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기에 이는 현대적 일상의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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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완성한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는 함께 고행을 떠난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헤세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다 환상을 경험하게 된 고빈다를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이고, 죽음과 탄생을 통해 끝없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진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가 미소 짓는 싯다르타의 얼굴이라는 ‘가면’으로 묘사된다. “실체는 없지만 그래도 존재하는”(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20쪽) 그것은 길희성이 자신의 책에서 역설한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진리를 일컫는 것과 같다. 그 진리를 헤세는 미소라고 생각한 듯하다. 우울증 치료 기간 동안 전혀 집필하지 못했지만 그 기간을 자기체험의 기회로 삼아 완성한 역작이라는 점에서도 싯다르타의 미소는 의미가 있다. 영성의 수련을 통해 그 길에 닿을 수 있을까. “고빈다는 완성을 이룬 자들은 이렇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위의 책, 220쪽) 본연에 닿는다는 건 무엇인가,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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