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2015.11.17




   이런 시대에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삶의 통찰이 필요할 때, 이 책이 내게 줄 도움이 얼마나 클 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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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13일은 ‘9∙11’이라는 상징적 숫자와 더불어 인류사에 기억될 날이 되었다. 2004년 3월 11일 알카에다의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테러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인명 피해다. 전 세계에서 프랑스 파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우리 시각으로 18일에 있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축구 국가대표 친선전을 보러 (테러의 위협에도 프랑스는 친선경기를 강행하겠다고 했고, 잉글랜드의 감독 로이 호지슨은 그 뜻을 존중한다고 회답했다.) 경기장을 찾을 영국인들은 프랑스를 위해 함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불러주는 캠페인을 SNS로 퍼뜨리고 있다. 세계 주요 랜드마크들은 밤이 되자 빛나는 프랑스 국기가 되었다.


    비극적인 피드백들이 연이어지고 있다. 정치에 연루된 종교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언론과 그에 휘말린 대중들은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인터넷 상에서 ‘이슬람’, ‘무슬림’, ‘무함마드’, ‘알라’ 등의 용어를 무분별하게 섞어가며 통째로 이슬람을 비난했다. 나는 굳이 인용할 필요 없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댓글들을 그저께 반시간 동안 봤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시리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이라크 등은 오래 전부터 유럽의 부국으로 난민들을 유출시키는 무능한 정부였다. 시리아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온 프랑스 파리의 테러범 때문에 난민들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경제 침체로 위협을 받고 있는 유럽 각국의 국민들이 국경을 닫자는 보수주의나 자국민 우선주의, 심할 경우 극단적 민족주의에 쉽게 젖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현대인들은 종교에 대해 이중 잣대를 얼마든지 들이밀 수 있다. 첫째는 특히 정치와 연관된 종교에게 날카로운 비난이 가해지는 경우일 것인데, 잔혹한 행위에 동원되는 종교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선사할 수 있겠냐는 시선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를 왜곡시키는 주체에 대한 사고가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근대 계몽주의의 전파와 과학의 발전 이후 우리에게 종교는 이미 이리저리 뒤집어볼 수 있는 사회분야의 일부로 전락한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종교에서 진리를 찾아보려는 진지한 시선이다. 여기에서 ‘맹신’이라는 안타까운 현상은 제외한다. 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근대적 종교는 현대인들의 정신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게 됐다. 첫 번째 시선으로 공격받는 대상이 바로 근대적 종교이다.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몇 년 사이 부쩍 ‘도킨스 류’의 서적에 빠져 지냈었다. 이른바 ‘도킨스 현상’에, 즉 브라이트 운동(Brights movement)에 강한 매력을 느꼈던 까닭이다. 샘 해리스와 히친스의 글을 연이어 읽게 된 것, 그리고 ‘Edge’의 필진들이 쓴 모음집을 읽은 것은 당연한 순차였다. 가톨릭 냉담자였던 나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부터 무신(無神)과 무신(無信)이 뒤범벅되어 있었는데, 공격적인 과학적 자연주의자들, 이른바 ‘신무신론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강한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신이 없는 공간으로 서서히 발을 디뎠고, 졸업을 전후해서는 의지할 곳 없는 자아가 사회의 문턱 앞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모습을 직시하게 됐다.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다행이도 졸업 전 들은 인상적인 종교 관련 강의가 무려 두 개나 됐던 까닭에 나는 30대의 목표를 종교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는 것으로 잡을 수 있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는 방대한 문자들의 향연에서 그 문자들이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할 수 없는 길을 찾아내겠다는 막연한 욕망 때문이었다.


    내년부터 시작할 그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알아야 하는 건 당연 역사였다. 맥락을 모른 채 특정 텍스트에서 찾은 의미를 자기 나름대로 확장하겠다고 벼렸다가 낭패를 본 적이 대학 생활 중에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니안 스마트의 <세계의 종교>,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1~2권)> 등을 서재에 꽂아뒀고, 출판사에서 제공해준 저서들의 도움도 받았다. 종교의 역사가 종교 그 자체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나, 시대를 거쳐 변화해온 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이 비난해 마지않는 정치상에서의 종교 행태를 샅샅이 살펴보는 1차적인 작업은 가공할 만한 마력을 지닌 종교의 앞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 겉만 긁는 막연한 비판서들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은 그간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의 마음 반대편에서 잠자고 있었던 갈망을 동시에 건드려준 명저였다. 일개의 보통독자인 내가 별 권위도 없이 ‘명저’라는 단어를 주저 않고 쓴 까닭을, 이 책을 읽은 사려 깊은 독자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해해줄 것이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이면지에 써내려가며 정독했고, 리뷰를 제외한 모든 작업이 끝난 지금의 나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마음이다. 지적으로 갖춰졌다는 환상에서 비롯된 만족감이 아니다.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신을 위한 변론>은 ‘모름’에서 시작해 ‘모름’으로 회귀하게 된 인류 종교의 역사를 파헤친 기나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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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의 나는 한 종교 관련 강의를 들으며 종교분쟁과 폭력에 관심을 키워갔다. 전공인 국문의 이론에서 벗어나 현실적 문제와 맞닥뜨리는 생동감도 있었고,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 그리고 비극에 참여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속 동질감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내가 당시 배운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론이 실제 세상에 참여하여 종교적 평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 까닭도 있겠다.) 그렇게 체첸 분쟁을 나름 심도 있게 정리해 ‘크렘린과 백학’이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냈고, 교수는 흡족해했다. 강의 말미에 나는 교수에게 종교 관련 서적 한 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부탁의 함의는 주로 분쟁관련 비판서를 바란 것이었는데, 교수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번역된 <우파니샤드>를 읽어봐요.”


    나는 착한 학생이었다. 더군다나 폭넓은 스펙트럼의 종교적 사고를 지닌 그녀를 짧은 기간 안에 매우 존경하게 된 터였다. 교수는 개신교도이자 독일 유학파 출신의 종교비교학자였다. 그런 그녀가 내게 권한 것이 인도의 경전. 당시는 긴 휴학과 여러 부침 덕분에 늦은 대학의 나이가 돼서야 ‘대학’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때였다. 쉽게 말하자면 취업 준비하는 동기와 후배들 사이에서 정전(正傳) 한 권을 고집스럽고도 조용히 읽어갈 수 있는 기분이었다. 커버를 벗기니 새빨간 살을 드러낸 <우파니샤드>는 이재숙의 번역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첫 장을 펼쳤다. ‘오움―’ 이게 무슨 소리지? 표현할 수 없는 소리라고 하는데, 뭔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낮고 장중한 목소리 같기도 하고, 종교 수련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마음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감정은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조언을 허투루 듣는 것도 거부할 일이다. 이해 안 될 문자 사이를 부지런히 눈으로 왕복하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이윽고 나타났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이건 내게 다가온, 혹은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중대한 사건이었다.


    “아뜨만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 (이재숙 譯, <우파니샤드>, 60쪽)


    아래 적어놓은 날짜는 2013년 2월 12일이었다. 추운 겨울의 잔인함을 두 겹의 창틀로 막아놓은 아늑하고 온기 가득한 방 안에서 나는 쪼그려 앉아 혼자 새벽의 한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내가 바라본 건 창백한 검은 밤하늘에 떠있는 밝은 점들이었다. 아뜨만이 저기에도 있나? 이 우스꽝스러운 질문 뒤에 엄습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것. 초월. 무식한 나는 갑자기 신비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아뜨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곧 아뜨만이다. 모두가 같은 아뜨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위의 책, 61쪽)


    나는 한동안 저 구절에 사로잡혀 지냈었다. 문자주의를 배격하자는 입장을 늘 고수하고 있어도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우파니샤드>를 펼쳐보니 그 구절 언저리에 내가 밑줄을 쳐놓은 단어들이 세 개 있다. 증오, 욕심, 슬픔. 달리 말하자면 내가 그것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초월을 안다면 그런 것들을 정말 모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기분을 평생 거느리고 산다고 해도 몹시 불행할 것 같진 않고, 그게 오히려 자연스런 인간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왠지 부당한 것 같은 그 고통에 저항하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인간이라는 뜻이리라. 비극. 고전에서 말하는 “삶은 비극이다.”라는 뜻은 지극한 사실이었다.


    카렌 암스트롱도 동의한다. 그녀는 종교의 시작이 삶의 부당함과 고통에 맞서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라 말한다. 근대 이전의 종교들은 그 의미를 구축하는 데 있어 초월, 모름, 경외 등을 늘 강조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편견이다. 지금까지 등장하여 우리에게 큰 반향을 준 종교적 현자들, 즉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대에 출현한 현자들은 하나같이 ‘모름’에 주목했다. (저 용어는 본래 야스퍼스의 것인데, 국내에는 <축의 시대>라 번역∙소개된 책인 카렌의 2006년 작 <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쓰였다.) 그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아포파시스적 대답은 곧 침묵의 대답이다. 태초의 종교라는 것은 이렇듯 ‘말하지 않는 법’을 직감하고 있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다.


    “물론 인간은 정신을 통해서 말을 원초적인 것, 강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애초에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말에게 원초성을 부여하려고 말이 스스로 많은 힘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침묵이 이미 말에게 원초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침묵은 정신을 돕는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265쪽)


    고대인들은 피카르트가 말한 ‘원초성’이라는 것을 개념이 아닌 감각을 통해 선연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비와 의심 속에 머무르는 능력은 원초성에 대한 확신으로 유지되기 마련이다. 종교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현대인들이 푸념 삼아 털어놓을 수 있는 억울함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원초성과의 거리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일상을 보라. 영성수련을 통해 체득되는 깨달음의 경지, 그 원초성에 대한 자각을 우리가 일상에서 이뤄나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봐야 한다. 태초의 종교가 어떠했는지를.


    카렌은 이러했던 침묵의 종교가 말의 종교로 바뀐 이래 종교가 크게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으로 역사를 묘사한다. 하나는 여전한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의 발달이다. 나는 대학의 교양으로 처음 접한 플라톤을 뭔가 딱딱한 회색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왠지 주황빛이고, 소크라테스는 아주 새빨갛다.) 이는 잘못된 기억이었다. 퓌타고라스마저 열렬한 영적 탐구를 숭배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성이 발달했으나 훈련과 절제된 삶 속에서 거듭되는 통찰로 영성을 수련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소크라테스의 부동(不動)은 흡사 근래 들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템플스테이의 좌선(坐禪)과 닮았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죽음의 견습과정이었다. 정치∙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주요 철학 학파들은 내면의 평화에 중점을 뒀다. 종교와 배치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는 지금 보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합리성을 무기로 한 계몽주의가 종교를 부수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근대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분명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현대인들이 종교에서 갈구하게 되는 진리의 열쇠인지도 몰랐겠지만.


    기독교가 유대교나 이슬람과는 달리 교리를 복잡다단하게 발전시킨 것은 특이한 일이다. (반면 후자의 두 유일신교는 정행(正行)을 강조해왔다.) 물론 초기 기독교는 달랐다. 복음서는 우리처럼 신의 뜻을 해석하라고 쓴 것이 아니라 영성을 수련하라고 적어놓은 도덕적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예수 사후 이상하게 일이 돌아갔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즉 이성의 정점으로 파악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들이 2세기 즈음에 생겨났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가 번역, 그리고 육화한 ‘로고스’인 예수의 지위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을 무렵에 그 종교는 완전히 ‘말의 종교’가 됐다. 지금 보면 시시콜콜한, 하지만 당시 보면 대단히 시급한 문제들이 도마에 올랐다. 학자들은 신 중심으로 생각했다. 정의하려고 했으며, 이로써 종교를 강화하려고 했다. 우리는 그 다른 편에 있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카렌의 의도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려는 영성 노력이 필요하다는 움직임 말이다. 위(僞)디오뉘시우스의 아포파시스적 방법이 강조된다. “~도 아니다.”는 흡사 “~이기도 하고, ~이기도 하다.”는 우파니샤드를 연상시킨다.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의 지적 유산들이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하자 유럽의 신학자들도 반응했다. 전통적 가르침을 합리의 힘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빨아들인 뇌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열심히 증명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웃음거리가 된 그도 실은 ‘모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성의 끝에서 우리는 모른다고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능력”(241쪽)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앙이었다. 여기에 반대한 이들을 이른바 ‘자연과학’의 노선에 있다고 묘사해도 될 것이다. 유럽은 그보다 과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이미 상당 수준 뒤틀려 있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가 틀렸다면서 신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양날의 검’으로 유명한 오컴은 신이 온갖 재주를 부리는 가상적 사고를 유행시켰다. 신학과 영성 사이에 큰 틈이 벌어져서 수백 년 동안 도무지 다물어질 생각을 않았다. 모름을 아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케노시스)은 저물어가는 태양. 영성의 길은 노을 속에 있었다.


    근대는 희망의 날개 대신 비타협의 발톱을 드러낸 맹수였다.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들은 하나 같이 종교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고, 세속기관들의 영향력이 종교기관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는 언어에 갇혔다. 가톨릭은 교리문답서와 종교재판으로 대응했다. 당시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세간에 과장되게 알려진 것보다는 덜 심했다. 새로 등장한 과학의 발견을 이해한 사람이 무척이나 적었던 탓이다. 하지만 금서와 정죄 등 종교계의 반응이 광적이어서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식은 그 과장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상징으로 남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성서 해석이라는 위험한 지뢰밭에 발을 들여놓고”(298쪽)는 파장의 너울에서 끝없이 출렁거렸다. 이후 과학은 신의 절대성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들, 예컨대 데카르트와 뉴턴과 같은 거인들을 거치면서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내적으로도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정치 격변기였음을 고려해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데카르트는 시계처럼 규칙적인 우주를 꿈꿨고, 뉴턴은 데카르트,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오를 합치더니 종교에서 신비와 미신을 배척하고 과학이야말로 신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렌이 보기에 당대의 “신은 더 이상 초월적이지 않았고, 언어와 관념의 한계를 넘어서지도 않았다.”(328쪽)


    이렇게 계몽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성이 신의 위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성으로 신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물론 약간의 전통적 뮈토스가 섞여 있긴 했지만 자연과 신비를 분리하는 작업은 언제나 공통분모였다. 폐단은 있었다. 스스로 사고하라면서도 오직 그 방법을 과학에만 두라는 계몽주의는 과학이 아닌 다른 것을 배척하는 근대의 편협함을, 그 한계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장-자크 루소 정도가 공감을 통해 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수련 없는 종교는 히스테리로 전락하기 쉬웠고,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이럴 때마다 반응한 것은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철학자였다. 과학이 펼쳐놓은 이성의 그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잡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실상은 반대였고, 사람들은 마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자기 안의 무언가가 유실되는 기분을 느꼈다. 분위기에 민감한 저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걸 제일 심하게 느낀 모양이다. 윌리엄 페일리가 그 유명한 시계공 이론을 내놓았을 때 가장 먼저 격렬히 반응한 이는 데이비드 흄이었다. 과학적인 것 같아도 너무 섣불리 결론으로 나아간 페일리의 논리가 지닌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페일리에게 세 가지의 근거를 들며 반론했다.) 낭만주의자들이 이윽고 등장하면서 자연을 경외하는 시인들의 명작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영문학도라면 피해갈 수 없는 퍼시 셸리, 윌리엄 워즈워스, 존 키츠가 다 그때 사람들이다. 헤겔도 처음에는 여기에 동참하는 뉘앙스였다. 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끌어오면서 ‘존재(geist)’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소외감을 주는 종교로 유대교를 특정하게 꼬집어 비판하면서 근대 종교 비평의 틀을 제공하고 말았다.


    종교가 멀리 떠나가면서 사람들은 종교를 어려운 것으로 보게 됐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잘 보일 리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복음주의다. 미국인들은 프랑스혁명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더욱 경건해져야지. 제약이 없는 합리성이 어떤 공포정치를 가져왔던가 말이다.’ 이런 생각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쉬운 종교가 필요했다. 복음주의는 전례 없는 문자주의로 성서를 해석했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의 실천으로 봤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지만 이는 우상화될 위험이 있는 신을 섬기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19세기의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자연신학마저 주류로 들어왔다. 뉴턴과 페일리가 특이하게도 성서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유럽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은 반가운 신호탄이었고, 사고를 바꾸는 반체제적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무신론이 퍼졌다. 성서를 뜯어보고, 신의 의미를 축소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억압적 생각이라 했고,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했다. 과학적 성과들이 연이어 전통신학을 위협했다. 지구는 6천 년 보다 훨씬 오래된 노인이었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출판 당시 너무 이상한 생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선택’의 함의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고등비평’이라는 것이 등장해 성서의 기적은 비유일 뿐이라 주장했다. 당대 최대의 핫이슈였다. 복음주의자들은 거품을 물었지만 미국에도 계속 수입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진영 싸움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신의 존재 여부를 왈가왈부하고 싶을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손님은 단연 다윈이다. 실제로 1870년대부터 종교와 과학은 마치 나란히 놓여 만날 수 없는 두 선의 철로 같은 사이로 지냈다. 노골적으로 반가톨릭적 편향도 나왔고, 브루노와 갈릴레오, 루터 등이 불운한 희생자로 재평가를 받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신앙을 망상이라 불렀다. 종교와 과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였다. 종교계는 다윈이 몰고 올 파장을 잘 몰라 과학을 여전히 수용하며 공부했지만 반종교주의자들은 다윈의 그 ‘파장’이란 것이 무엇이 되는지 자신이 직접 보여주려고 혈안이 된 듯 종교를 비판하며 다윈을 인용했다. 물론 그건 다 바보 같은 짓이었고 언론의 과장된 보도를 통해 탈종교화의 흐름만 가속화됐다. 하지만 정작 동료 과학자들조차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Gott ist tot.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했다. 대신 우버멘쉬(초인)가 되어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말한 신은 정확한 대상이다. 기독교의 신이었다. 이후 무신론은 거의 자명해져서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다윈은 자연의 무시무시함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프로이트는 종교를 정신이상에 가까운 신경증으로 결론지으면서 마음과 무의식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했다. 사람들 중에는 진화론에서처럼 국가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살아남을 것이라며 양차대전의 결말을 지켜보려는 이들도 있었고, 황폐화된 인간 정신에 비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은 이제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근대 최초의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그간 누적되어 있던 공포가 전통을 왜곡하며 종교적으로 표출되었다. 근본주의는 언론의 공격을 받았고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다시 부흥할 1970년대까지 웅크린 채 와신상담하면서 성서 문자주의와 창조과학을 꾸려갔다.


    합리성에 대한 기대를 철저하게 무너뜨린 건 홀로코스트였다. 기술에 의한 인종 학살, 과학적 인종주의, 과학이 연루된 우생학 실험, 게르만족만 특별히 이상화된 근대적 우상 숭배. 그것은 분명 ‘악’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일부, 아니 그보다는 좀 더 큰 일부에 가까웠다. 카렌은 이렇게 평가한다. “홀로코스트의 진짜 이유는 서구 문화에서 종교적 감정이 사라진 후의 모호한 상태, 그리고 사람들의 기운을 보다 선하고 생산적인 쪽으로 배출시키던 종교의 쇠퇴와 함께 고삐가 풀린 악한 기운”(423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지금의 신학에게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족쇄처럼 채워졌다.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 것.


    나는 4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에서 종교가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인간이 지니고 있던 경외의 비밀이, 그 보석을 넣은 상자가 마침내 문을 닫아 막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명 인간은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마음 깊이 침잠하여 의미를 구축했을 것이다. 마음으로 들어가면 나를 초월한다는 건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속된 말로 “머리가 자라면서” 점차 ‘물속의 소금’이었던 아트만을 확인하기 위해 물을 다 증발시키려고 종교를 마구잡이로 가열시켰다. 그 결과 예수의 뜻도, 부처의 뜻도, 공자의 뜻도 생각의 문제로 바뀌었다. 정작 행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참뜻인데 말이다. (침묵도 거대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행스러운 까닭은 이 합리성의 시대에도 여전히 비움(케노시스)과 침묵에 주목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희망 때문이다. 신학계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불확실성으로 점차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반응했고, 신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과학은 아포파시스적 접근으로 돌아갔는데, 안타깝게도 수련이 일상에서 멀게만 느껴질 법한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사유와 행동은 어려울 뿐이었다. 이 부분에서 카렌은 신학자들에게 쉽게 쓴 명저들을 촉구한다.


    그런 것이 어렵고, 한편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일방적인 왜곡)으로 일어난 세태에 염증을 느끼는 까닭에 종교의 퇴조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진지한 의도 이면에서 이 사회를 흐르는 강줄기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건 분명 피할 수 없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때일수록 종교가 과연 그런 세태를 주도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카렌도 근본주의를 종교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수년 전, 내가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체첸 관련 종교분쟁을 상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 결과로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의 중요성이었다. 정치는 공방(攻防)의 연속이다. 카드를 쥔 자들의 싸움이다. 여기에 진리를 기대할 수 없다. 종교는 다만 그자들의 카드를 강화시켜줄 재료로 왜곡되거나 남용된 것일 뿐이다. 숱하게 예로 드는 성서와 꾸란을 보자. 카렌은 “성서는 서로 모순되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제나 선택적으로 읽힌다.”(98쪽)고 했다. IS는 이번 파리 테러의 명목으로 꾸란을 들었지만 정작 이슬람권 사람들은 이에 분노하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 세계를 죽이는 것이다.”라는 꾸란의 한 대목을 강조했다. 종교는 굉장히 많은 걸 다뤄왔으므로 당연히 파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 부분만 강조하며 공격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아마 정보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면 다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이들 신무신론자들을 나도 한때는 거의 추앙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렌의 지적을 통해 그들의 한계는 분명해진다. “창조론자들이나 지적 설계론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도킨스의 심정은 이해할 만 하지만 근본주의적 믿음이 기독교 혹은 종교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는 그의 관점은 옳지 않다.”(463쪽) 종교에 대해서 공격적인 태도만을 보이기 때문에 이는 한쪽만 보는 눈이다. 그럼에도 도킨스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왜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의 신랄한 비판을 읽으며 쾌감을 느꼈던 것일까? 트렌드를 따르는 지적 호기심 탓일 수도, 근대적 신을 강조하는 일부 안일한 종교관계자들 때문일 수도, 아니면 진리에 대한 관심 이면에 있는 불신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채 비판 일로에서 지적 유희를 즐긴 나의 지난날을 후회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아마 “이성이 모든 경쟁자를 파괴하려는 우상을 범할 위험성”(470쪽)을 다행스럽게도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의 멈춤. 그런 것 말이다.


    도킨스와 달리 우리에게 과거의 통찰을, 흡사 아포파시스를 상기시키는 현상도 있다. 아니, 이건 거의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불확실성만을 남겨놓은 포스트모더니즘은 grands récits, 즉 거대서사를 의심하도록 했다. 근대의 전지전능한 신은 거침없는 상대주의의 공격으로 허물어졌다. 이제 신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절대성이야말로 공격적인 생각,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이었다. 확실성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통찰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카렌이 의도적으로 이 책의 말미를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잔니 바티모, 존 카푸토 등으로 채워 넣은 것은 연대기를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정확한 의미의 수미상관은 아니겠지만, ‘모름’에서 ‘모름’으로 회귀하게 된 인류의 사상적 역사에서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카렌은 이런 말을 맺음말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이 점점 불확정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는 지금 신학도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좀 더 침묵과 모름을 받아들이는 신학으로 되돌아갈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492~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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