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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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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모교에서 수험생들을 격려하겠다며 재치 있는 응원 현수막을 걸었나보다. 관련 인터넷 기사를 보며 살짝 웃다보니 당연 재작년까지 늦깎이로 대학을 다니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낯가림이 있고 소심하지만 일단 일을 맡으면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는 터라, 대부분의 모임에서 마지막 일은 내가 하게 됐다. 발표 말이다. 성격이 또 거절은 못한다. 그렇게 학기 당 대여섯 번의 발표를 맡으면 소위 ‘장트러블’에 시달리면서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잔다. 발표 당일로부터 며칠 전부터 시작되는 긴장. 결국 잠을 줄여가며 수차례 반복 연습하고 실수를 예방하려 한다. 하지만 발표 때마다 겪는 목소리 떨림, 좁아지는 시야, 등 뒤로 흥건해지는 식은땀은 어쩔 수가 없다. 소심증과 완벽주의의 결합이 나를 배신한다.


    그렇다고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만성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스콧 스토셀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원제 : My Age of Anxiety)>에 실린 저자 자신의, 혹은 유명 인사들의 실화와 비교하자면, 사실 비교할 만한 수준도 되지 않는다. 역자인 홍한별은 학교에서 토론을 할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옆 짝꿍의 “너 볼 살 떨려!”라는 말에 자리에 주저앉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스콧의 오래된 불안증에 비할 바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불안증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저자의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경험담과 비슷한 추억에 시달리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스콧 스토셀은 불안에 대해 말하기 적합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 그가 마치 인문학자들이 현대와 불안을 진단하기 위해 내놓는 것처럼 자신만의 이론을, 소위 말하는 ‘썰[設]’을 펴는 건 아니다. (스콧은 잡지사의 에디터다.) 말 그대로 불안을 둘러싼 거의 모든 걸 털어놓는다.




*    *    *




    내가 누군가에게 “나 요즘 너무 불안해요.”라고 불평한다고 하자. 물론 이렇게 되묻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상대방이 내게 “대체 불안이 뭡니까?”라고 질문하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고, 저명한 병리학자도 아닌 나에게는 그들의 문구를 대화에 응용할 만한 독서량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문이 막힐 것이다. 왜냐하면 뭔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에 불안은 피상적인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나 자신이 체감하는 실제적인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이리저리 전염된다는 것도 잘 안다. “너 다리 좀 떨지 마. 내가 다 불안해.”라고 말하거나, 앞선 면접 대기자가 한숨을 쉬면 내 마음이 건물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갈 것 같은 기세로 무너지거나. 그럴 때마다 확실하게 하고 싶긴 하다. 대체 불안이 뭘까?


    안타깝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그건 생물학적 문제로 취급되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철학자들은 철학과 정신의 문제로 불안을 다루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너무 다양하게 쓰이는 단어라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정신심리학자도 있다. 이렇듯 불안에 대한 공통된 합의는 없다. 불안, 두려움, 우울 등등이 우리가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놓는 단어들. 거의 의미 상 무경계다. 저자 스콧은 심지어 불안이 진짜 병, 혹은 정신질환인지에도 의문을 갖는다. 정상인지 비정상(병)인지의 구분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최근에는 두 세계의 경계가 없다는 인문학적 사고가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으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불안, 혹은 주변에서 체감되는 불안이 진짜 병으로 진단되어야 하는 것인지 응당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불안증을 치료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약물 복용이다. 물론 약을 먹으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도록 의사들은 운동을 꾸준하게 병행하거나 명상, 독서, 취미생활 등을 할 것을 환자에게 권한다. 하지만 불안을 약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약 이외의 치료법은 없는 것처럼 그 효능이 부풀려 소개됐었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오래된 서양에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실존을 주목하느냐 분자로 환원하느냐의 기로에서 서양 의학은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은 스콧의 책에 매우 강한 어조로 반복 소개되어 있는데, 주로 제약업체와 주요 학파의 기득권 싸움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스콧처럼 질문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불안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이거나 기계적인 과정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73쪽)


    다시 말하자면, 굳이 강조하지만 불안은 육체와 정신 모두를 괴롭힌다. 두 체계가 이어져 있음이 불안증을 통해 부정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신체가 우선 작동하고 정신이 불안해진다고 생각하는 제임스-랑게 이론도, 불안은 실존의 문제일 뿐이라는 철학적 고찰도 각각의 목소리만으로는 불안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일례로 스콧은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구토증후군에 시달렸다고 소개하면서 이른바 ‘뇌-장축(brain-gut axis)’은 실재한다고 말한다. 위가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간디, 토머스 제퍼슨, 키케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휴 그랜트, 옐리네크, 찰스 다윈, 프로이트 등이 모두 불안증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호소했던 이들이다. (나만 발표 불안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도의 예민함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여기에는 정신이 작용한다. 자기비판, 완벽주의, 불안, 우울, 나태 혐오 등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생산적인 삶을 살게 되고, 특히 불안 기질이 도덕성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보고도 있어 이런 기질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생각될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최근 연예인 정형돈의 프로그램 하차로 더욱 그러한 분위기인데) 그것이 우리의 환경, 즉 ‘현대사회’라는 특수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분란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동체가 해체된 지는 이미 오래 됐고,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선택의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채 살아간다.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지지대는 사실상 실존뿐이겠지만 실존의 고찰과 일상은 의외로 거리가 꽤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위로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소비에 의지하거나, 맹신에 의지하거나, 외모에 집착하거나 등등. 실존을 탐구하려는 자세가 변형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불안은, 만약 그것이 전염된 것이 확실하다면 막연함의 경로를 타고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빌려 쓴 하몬 레온의 개념 포보포비아, 즉 '공포에 대한 공포증'이 적합한 설명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것은 실상 템포가 빠르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기에 여러 유혹들과 위험들이 들끓고 있는 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그 두려움 자체에 대한 공포인 셈이다.”(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250~251쪽)


    그렇다고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사회불안이 고통 받는 당사자의 불안을 유발하는 유일한 원인일까? 정말 지그문트 바우만의 그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의 자율신경계 반응을 급증시켜 고통스런 정서 상태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동인이 될 수 있을까? 스콧은 사회불안증과 신경전달물질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은 있으나 뭐가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고 못 박는다. 게다가 중세에는 불안할 여유가 없었는데 미국의 경우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안도 커지는”(392쪽), 즉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심리가 불안을 유발한다는 식의 시대별 객관화는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한다. “불안의 형태는 바뀌었으나 불안의 경험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402쪽) 이 책을 살펴본 이들은 알겠지만 스콧은 오랜 고통을 겪은 ‘살아 있는 증거’로서 어느 한 쪽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는 좀처럼 무엇이 원인인지 확언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의 특징을 바로 저자 자신이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의 3부에는 무수히 많은 약 이름들과 흥미로운 사례들이 실려 있다. 스콧은 인지치료와 약 복용을 반복하는 과정을 수차례 겪었다. 일단 약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은 이 책의 말미까지 계속된다. 정신약리학에 있어 그 시작은 분명 ‘잘 모르고 하는 의학’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사랑했다. 1899년에는 아편이 불안증의 표준 치료제였다. 1914년 전까지는 헤로인이 버젓이 판매됐다. 또한 스콧은 195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정신과 약의 판매량은 제약회사의 상술일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에 주목한다. 스콧이 중점적으로 살펴본 그 시점, 즉 1950년대는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정신건강이론이 탄생한 때인데, 불안과 우울을 바라보는 시점이 과학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리학적으로 완전히 선회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대였다. 1954년 소라진, 1955년 밀타운, 1959년 이미프라민. 모두 제조기업에 큰 이윤을 안긴 약들이다. 20세기 후반의 상징적 항우울제인 프로작은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뒀다. 들으면 놀랄 만한 숫자의 미국 인구가 이 약들을 꾸준히 복용해왔다.


    3부는 어떻게 불안이 약으로 처방 가능한 ‘질병’으로 규정되게 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0년대 이후에는 생물학적 정신의학이 프로이트주의자들을 눌러 약이 권장∙처방되는 의료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스콧은 묻는다. 안정제가 개발되자 불안장애진단이 많아졌고, 항우울제가 개발되자 우울증 발병률이 높아졌다. 이게 환자에게 정말 이득이었을까? 반반이다.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어 우울하다는 통설이 “그건 병이다.”라는 한 마디로 일축될 수 있어 환자의 고통이 반감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인데도 점점 확장되는 정신질환 범주 속에 포함될 수 있었다. 스콧이 의문을 갖는 것이 바로 이 ‘늘어나는 범주’다. 질병목록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차트인 DSM은 사실상 정치적 문건이고, 편찬위원회 측에서도 범주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한다.


    약물 처방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약 만능주의’의 지난 수십 년 동안 가려져 있던 그 주장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게 보도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FDA는 약물의존에 대한 보고서를 입수했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정부가 안정제로 사회를 통제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의 소외 탓에 사람들이 약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휘터커는 약이 정신병을 일으킨다고 말했다가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대부분 약물 처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건 약물의존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정신을 분자 단위로 축소하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경고하는 메시지들도 있다. 그러나 스콧은 무척 신중하다.


    “나는, 정신과 약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일에 이념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제약회사의 주장에 대해 회의할 수 있고, 인구가 약을 대규모로 소비한다면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우려할 수 있고, 정신과 약을 먹음으로써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 어떤 손실이 있을지에 신경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297쪽)


    불안의 유전 여부를 두고 펼쳐진 학계의 논쟁도 흥미롭게 볼 만하다. 초등학교 2학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의정부의 한 주공 아파트에 있었다. 물론 우리집이었다. 동생과 함께 외출을 나간 어머니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초조했었다. 오후 1~2시 사이였던 것 같다.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밖을 봤지만 복도는 휑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더 기다리던 소심한 소년은 결국 “엄마 오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대성통곡은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오후,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된 나를 진정시키려고 꽤나 고생하셨다. 이걸 ‘분리불안’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증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 존 볼비와 메리 에인즈워스의 애착 이론이다. 여기서 불안의 원인이 한 차례 입증된 듯했다. 놀랍게도 1950년대에는 육아와 아동심리발달이 별로 관계가 없을 거라는 통념이 있었다. 존과 메리의 주장은 지금 보면 상식 중의 상식이다. 어머니의 애정이 자녀의 정신건강에 중요하다. 어머니가 불안해하면 자녀들도 불안해한다. 어머니가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육아방식은 과잉보호와 애정결핍의 결합이다. 이 당연한 말을 했다가 존 볼비는 정신분석학과 행동심리학 분야의 중진들에게서 배교됐다.


    그러나 육아와 불안의 상관관계는 “불안은 유전된다.”라고 주장한 제롬 케이건의 ‘억제 기질’ 이론으로 조만간 공격받았다. 불안을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형, 예컨대 책에 소개된 COMT 유전자형으로 보자면 val/met와 met/met형을 가진 사람은 스트레스나 외상을 겪으면 심리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제롬은 양육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된 불안 유전자가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이라 주장했다. 물론 그런 과학적 발견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스콧과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고 육아방식과 연관된다는 주장에 더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넥스트 휴먼>에서 소개된 사례인데,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평생에 걸쳐 누적된 생활습관의 차이 탓에 한 명은 뚱뚱하지만 다른 한 명은 운동을 좋아하고 소식을 실천해 건강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유전자도 환경의 차이로 발현 여부가 결정된다. 또한 스콧의 말처럼 어느 하나의 유전자로 불안증 전체를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불안의 복잡다단함을 강조하곤 한다.




*    *    *




    옮긴이 홍한별의 말처럼 이 책은 분명 유사경험을 제공한다. 몸이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답답하다가 의심도 되다가 뻥 뚫리기도 한다.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할 수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에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에서 속 시원한 해결책을 하나 얻으려는 일말의 기대를 건 이가 있다면, 나는 그 기대를 접어두라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저자마저도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는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달고 사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걸 긍정적 피드백으로 계속 밀어내려는 노력, 그리고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것 말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 제목처럼 불안은 곁에 두고 가는 동반자일 수도 있다. 혹은 아주 벗어날 수는 없는, 실존의 범위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증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걸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적잖은 위안은 된다. 불안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스콧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고, 다사다난함 속에서 여러 약을 먹어가면서 불안을 안고 마감까지 끌어갔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읽고 참조하려고 했는지는 별도의 장으로 마련된 목록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의 불안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불안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콧이 남겨준 이 한 마디, 불안의 양면성에 대한 체험적 고백은 독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원망만 하면서 살진 말라는 지극히 교훈적인 위로다.


    “내 불안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가끔은 나의 삶을 막아서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이기도 하다.”(422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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