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48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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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대학을 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건 고장 난 삶의 나침반이었다. 제각각의 지침을 따라 팽그르르 어지럽게 돌아가기만 하고, 가끔 내가 보지 않을 때는 무심히 멈춰 나를 기만하는 것도 같은 그 기계가 그렇게도 거슬렸다. 어떻게든 일은 얻을 테고, 그러기 위해 학점도 받을 텐데, 나는 늘 어중간한 듯했다. 허공의 십자로.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수중 어딘가. 대학이, ‘대학(大學)’이 하나로 모아지는 결론을 내놓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뻔했지만 배신감이 컸다. 20대의 끝 무렵에야 졸업했다. 조금 더 들이부어야 할 열정, 조금 더 들여다보아야 할 고민이 있었다. 대학은 이제 공간이 아닌 시간이 됐다. 취업과 점수가 아닌 삶을 위한 대학에는 쉼이 없고 끝이 없다.


    돌아보면 늘 이런 생각이다. 얻은 것이 아주 없진 않았다. 오히려 더러 얻게 된 그것들이 어떤 결정(結晶)을 갖춰가는 마음 속 모습, 혹은 느낌 같은 것이 기운을 내라고 북돋는다. 이런 나와 같은 불안에 물 먹은 스펀지처럼 푹 젖은 사람들, 나는 아마 그 중 하수에 속하겠지만, 그들은 어떤 길을 걷든 ‘종교’라는 세계를 빗겨갈 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맹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종교 대 종교, 종교 대 세계, 종교 대 자기 자신을 항시 빗대어 생각해보며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 내가 겪은 종교는 피상적이었다. 유아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중학생 무렵부터 냉담자가 됐고, 견진성사까지 받았으나 교리는 모르고 신은 믿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도킨스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종교’라는 나무에 달린 마지막 붉은 잎까지 모두 떨어뜨린, 늦가을의 비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더불어 내상도 입었다. 불신하나 종교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희망이었는지는 올해 가을까지도 몰랐다. 오히려 이 희망이란 건 도킨스 류의 비판서(주로 ‘엣지’의 필진들), 혹은 국내 저자 중 김근수, 김경집 등 종교의 세태를 꼬집은 인문학 저서들의 일침에 쉽게 가려지기 일쑤였다. 왜 일까? 그러면서도 나는 <꾸란 주해>, <불타 석가모니>, <우파니샤드> 등을 들여다봤다. 이런 말을 가벼이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리’라는 걸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난조의 비판을 읽는 와중에도 그 마음은 죽지 않고 버텨냈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 도킨스 류와는 정반대에서 종교의 역사를 조망하는 그 책을 읽으며 확신했다. 진리, 그게 뭔지는 모른다. 종교적 삶을 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왜곡된 종교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침들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던 내 나침반의 광기를 잠재워줄 수 있으리라, 다시 한 번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굳이 태양에 다가가지 않아도 빛은 늘 자신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런 기분이다. 빛이라 말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생각, 경험, 그런 것들.


    그런 탓에 주제와 테마가 종교와 관련된 것이면 마음이 가라앉고 오래 책상 앞에 앉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는 보리슬라프 페키치가 <기적의 시대>에서 예수의 입을, 혹은 그 주변 인물들의 입을 어떻게 빌렸는지 읽어보고 싶었다. (이윤기의 번역이라 더욱 믿음이 간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맹신에 젖은 이들에게, 혹은 문자주의에 빠진 이들에게는 대표적인 이단소설(異端小說)로 기억될 소지가 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 기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걸 ‘입은’ 사람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예수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종교적 맥락에 취해 성경만 읽은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던질 수가 없다. 과연 그들이 예언의 성취를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배반의 키스’ 장본인인 유다의 개인적 입장을 생각해볼 시도라고 할 수 있는가.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는 종교를 들여다보는 다른 눈이다. 장담컨대,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종교를 가장 많이 들여다본 이다.



*   *   *



    항간이 쓰는 ‘기적(奇蹟)’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기이한 일, 불가사의한 일. 유의어 ‘이변(異變)’이 변고의 뉘앙스를 가져 대체로 부정적인 것과는 다르다. 신의 옆에 가져다 쓸 수 있는 단어도 ‘이변’이 아니라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겪은 자, 혹은 기적을 입은 자의 삶이 이후 더욱 나아졌을 것이라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소설 <기적의 시대>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들여다봐도 그 사례들은 굉장히 많다. 종교적 체험도 일종의 기적이다. 그걸 겪고 개종한 이들 중 성인(聖人)의 반열에 든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페키치는 그 공식을 부순다. 거의 철저하게 부숴버려서, 기적을 입은 자들이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를 욕하고 죽이려고까지 한다. 성경은 예수의 행적 중심으로 기록됐다. <기적의 시대>는 성경 속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이 서있다.


    ‘에글라’는 나병 환자다. 목소리 좋은 전령관 여로보암이 전 남편이고, 지금은 나병 환자이자 시체닦이인, 힘센 거구 우리야와 산다. 그런데 예수가 에글라의 병을 낫게 해준다. 에글라는 예수를 ‘정신이 돈 듯한 젊은이’ 정도로 생각했지만 연민이 생겨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로 한다. 분명 의심은 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면 여로보암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야와의 삶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그녀는 여러 사람을 지아비로 섬길 수 있는 여자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말없이 떠났다. 에글라는 정결함을 얻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속까지 다 정화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라삐 이스마이의 주장이었다. 그는 권위가 있는 노인. 장황한 설명으로 에글라를 속 타게 하면서도 정화의식은 건성으로 했다. 그렇게 정화가 ‘선언’된 에글라는 여로보암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는다. “정을 떨어뜨리려는 듯한 어조와 두려워하는 기색”(82쪽)이 역력했다. 돌멩이 쥔 사람들이 몰려와 에글라를 치려고 하자, 그녀는 다시 나병환자들이 있는 신(新)얍느엘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둥이 장로는 나병환자의 징표인 방울을 달아달라는 에글라를 막았다. “정결한 자들은 문둥이를 두려워한다더라만, 문둥이에게도 정결한 자들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96쪽) 부정하다며 쫓겨난 에글라는 정하다며 쫓겨나기도 하는 신세가 됐다.


    그녀가 한 가지 잘못한 게 있다. 이 일화가 욕정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런 뉘앙스였다면 페키치는 여러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낸 그녀보다 주변인들을 더 시시콜콜하게 그려낼 필요가 없었다. 에글라의 잘못은 마태오 8장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의 1절, 혹은 루카 5장 12절에 나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을 어긴 것. 그 탓에 기적은 괴상한 운명으로 반전됐다. 또 하나는 예수의 잘못도 있다. 그는 예언에 있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얍느엘에서 본 에글라가 너무 딱해 보여 유다의 만류에도 기적을 행했다. 그것은 과연 ‘기적’이었을까? 여기서부터 페키치는 기적을 변형시킨다.


    기적의 비극은 계속된다. 일그러진 손으로 오지그릇에 동전을 구걸하는 벙어리, 그리고 절름발이인 메세제베일로는 예수의 기적으로 혀가 풀렸다. 그 탓에 평소 증오하던 로마를 향해 “로마 타도, 이스라엘 만세!”를 외쳤다가 십자가형을 받았다. 바르티마에우스는 예수가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기적이 싫다. “시작될 때마다 희망으로 맞은 무수한 새날들이 절망 속에 저물고는 했습니다.”(128쪽) 상상 속의 세계가 실제로는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온 세상을 돌아 좋은 것을 찾겠다며 방랑하던 그는 어느 날 눈을 파버린다. 예수에게 구원을 받아 의회당으로 끌려가게 된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구원이라는 이름의 돌림병이 돌고 있으니 저희 같은 소박한 사람은 마땅히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133쪽) 두 미치광이인 아나니아와 레기온은 자신들의 독특한 두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길손인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 이성을 찾게 됐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삶은 무서웠고, 세상은 좁아졌다. 아나니아가 말했다. “이자가 우리 세계를 부숴 놓고 말았구나.”(153쪽) 미치광이 ‘절친’이던 둘은 이성을 찾자 화를 내며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서로를 때렸다. 반죽음이 된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는다.


    막달라의 기적은 충격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힌놈의 죽음’ 파트와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예수와 만나 자신의 처지를 낫게 해달라고 할 작정이었던 막달라에게 예수의 제자들은 그 만남을 막는 방벽과도 같았다. 그러다 그녀는 토마를 만나게 되고, 의심 많은 토마는 영혼을 추구하는 매춘부 막달라에게 불쾌감을 느꼈지만 결국 예수에게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때 마침 유다가 와서 토마에게 반전을 알려준다. 막달라와 두 여자(매춘부 수산나, 간통죄 범한 여인 요안나)는 예전에 예수에게 성성을 얻고 악마와 인연을 끊은, 다시 말해 정화된 여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여인은 왜 또 예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 부족해서? 토마는 궁금증에 뒤를 따라가 물었는데, 막달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시 매춘부가 되고자 합니다.”(194쪽) 유다의 우김으로 예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을 정화했지만 정작 그 셋은 “결국 우리의 육체는, 기적이라는 이름의 쇠고랑이 채워진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것.”(196쪽)이었다. 안에서 터져버린 시체, 즉 영혼이 감옥에서 탈출한 수산나만이 그 쇠고랑을 끊어버린 것. 성경을 통해 알려져 있는 막달라는 이 소설에서 사라지고 없다.


    부활한 라자로와 관련된 베다니아의 기적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라자로는 ‘혁명가’ 예수를 지붕 아래서 재웠다는 죄로 의회관리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하인 하므리가 그 시신을 갖고 왔는데, 예수의 곁에서 얘기만 들어 언니 마르타의 원성을 산 마리아는 예수가 라자로를 부활시킬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므리는 기가 찼지만 라자로 장례 후 나흘이 되던 날에 예수가 나타나더니 진짜 라자로를 살렸는데 그는 구더기, 부패제, 흙 등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유다는 사두가이파에 대한 구세주의 개인적 승리라고 평가했고, 예수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번에도 라자로는 끌려갔다. 술에 취해 있다가 잡혀간 것이다. 사두가이파 니고데모는 살아 있는 것이 잘못이라며 라자로에게 “다시 죽으면 되는 것”(243쪽)이라 사형을 언도했다. 라자로는 두 번째로 부활한 날 밤에 수의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므리가 “또 예수가 그랬습니까?”(251쪽)라고 묻자 라자로는 욕지거리를 했다. 영원히 죽음과 부활이 반복될 판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하인에게 맹세 하나를 해달라고 했다. 화장을 해서 시신을 남기지 말아달라는 부탁. 화장을 하면서 기도하는 하므리의 말은 아이러니하다. 자기 주인은 기적의 최고 ‘피해자’란다.


    이렇게 일곱 편의 기적 아닌 기적이 끝나고, 페키치는 네 편의 죽음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이것 역시 성경과 다른 성경 속 이야기다. 첫 번째인 ‘힌놈의 죽음’은 배신자의 대명사인 유다를 증오하는 신자들에게 굉장히 거북할 것이다. 이는 유다가 금전출납부에 기록해둔 이야기로 재편된 것인데, 유다 자신이 쓴 것이므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 예수의 무능함, 혹은 의존증과 다른 사도들의 무식함을 재료로 잘 빚어져 있다. 토마도,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도, 마태오도, 베드로도, 안드레아도, 심지어 예수도 에브라임에서 떠나지 않는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언대로 예수가 죽어야 했지만 아무도 유다의 보챔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유다야, 두렵다.”(289쪽)라고 말하는 예수를 겨우겨우 설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유다는 나귀를 빌리고, 예루살렘 입성 시 굶주린 사람들을 동원해 환호하게 하고, 환전상을 내쫓고(이것 때문에 오히려 벌금만 물었다.), 앉은뱅이 기적을 행하게 했다.


    그는 예언에 절대적이다. 카리스마가 없어 율법학자들을 실실 비웃게 만든 예수의 공회당 설교 이후 상황은 말이 아니었지만 꼼꼼한 유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되돌아보다가 배신의 예언이 이뤄지지 않은 걸 알고 최후의 만찬을 연출한다. 물론 그 자신이 배신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예수는 유다를 지목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죽게 된다는 미소. 정신을 차린 유다는 의회당에서 30냥만 받고 군병들과 함께 게쎄마니로 가 예수를 체포했다. 이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죽지 않는다. 힌놈 골짜기로 가서 죽을 자리를 마련해놓고 왔지만 죽기는 싫다. 그런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사방의 문에서 사도들이 유다의 도망을 막는다. “성서의 말씀의 올가미가 유다의 목을 죕니다.”(346쪽) 결국 유다가 선택한 피난처는 막달라 마리아의 집. 그러나 그녀가 누구던가. 게파(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들어와 유다를 끌고 갔으며, 유다는 그들의 손에 들려 목줄이 걸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예수가 부활하는 날이니 잊지 말라는 것. 예언에 목을 맨, 자신을 예수와 야훼의 동급으로까지 여긴 유다의 최후였다.


    이어지는 모리야의 죽음은 사실 앞선 기적들과 맥락이 같다. 앉은뱅이로 태어나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벌어먹을 수 있어 다행인 발람은 예수의 기적을 받아 다리가 나았다. 의형제간인, 같은 앉은뱅이이자 비럭질을 해 먹고 사는 에녹이 먼저 낫고 나서 예수를 발람에게 데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역시나 중노동을 하며 예수를 저주하게 됐다. 훗날 발람과 에녹은 예수의 기적을 입었다는 동패들과 예루살렘에서 만나던 중, 예수의 기소 소식에 증언을 하러 의회당으로 갔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니 그를 기소하여 죽게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은혜를 입은 뒤 팔자가 나아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361쪽)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발람은 자살하고 에녹은 채석장으로 돌아갔다.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에는 바라빠도 등장한다. 다핫의 아들이자 모압 사람, 과월절의 전통에 따라 사면된 도둑. 그 대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이가 예수다. 바라빠가 15년의 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로마를 찬양하는 헤로데의 염탐꾼의 목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자들의 웅변에 감화된 이. 로마에 대한 하느님의 복수를 꿈꾸다가 오랜 옥살이 중 생각을 거듭해 ‘복수’만 머리에 남게 됐는데, 그 복수를 위해, 즉 사면의 순간 간수장 티론에게 적절한 저주를 퍼붓기 위해 온갖 표현들로 문장을 다듬어왔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그가 문장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 여러 도움을 받으면서도 예수 ‘탓’에 사면되는 바람에 시간이 모자라 예수를 증오하게 됐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에게 물어봐도 예수는 모르쇠다. 결국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던 바라빠에게 그 저주의 긴 문장은 “너, 너…… 로마의 개새끼야.”(391쪽)로 줄어든다. (더불어 몸도 야윈다.) 그는 사면될 때 티론이 아닌 새로 온 간수장을 만났다가 예루살렘 도성으로 나왔는데, 예수가 자신에게 건넨 말을 생각해내더니 1시간 만에 수레에 치어 시신을 발견됐다.


    마지막 골고타의 죽음은 페키치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사건을 완전히 틀어버린 부분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세상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것이 지금 세상의 결과다. 그렇다면 <기적의 시대>를 빌어 펼쳐낸 픽션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비틀어야 했을까. 답은 하나다. 예수가 예언대로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으면 된다. 그렇게 예수 대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이는, 정말로 “나는 이 모든 역사와 고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403쪽)고 말할 수 있었던 이는 다름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이다. (그가 억지로 짊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페키치는 기꺼이 그 일을 했다고 썼다.) 아무런 관련도 없던 시몬이 보기에 예언 속 ‘하느님’은 오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은 개죽음이다. 그러니 죽어가는 와중에 무슨 진리가 있는가. 불레셋 사람과 즈가리야 사이에 박혀 있는 채로 시몬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육신의 것이다. “진리 말고 물을 다오 로마인들아.”(403쪽) 허망한 삶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몬의 말을, 페키치는 쉼표와 마침표도 없이 적어 내려간다.


    하지만 이 모든 충격적인 반전은 시몬이 불레셋 사람에게 밝힌 자신의 정체를 독자인 우리가 눈으로 읽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 시몬의 모든 불평과 의심은 예수의 것처럼 적혀 있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말까지도 예수의 불평 같다. “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다.”(406쪽)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새 왕국을 간절히 바라던 시몬은 예수를 대신해 잠시 십자가를 질 요량으로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예수는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술에 취한 군병들은 예수를 찾지 못해 시몬을 대신 못 박았다. 중죄가 두려웠던 백인대장은 시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발표했다. 페키치는 시몬의 말을 빌려 분명하게 말했다. “세상은 구원되지 않았다. 원죄는 닦이지 않았다.”(407쪽)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글레오파 마리아에게 일요일에 나타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준 뒤 흑해 동쪽의 먼 땅으로 떠나 두 번 다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예언에 빠진 유다, 십자가를 짊어진 시몬만 죽고 예수는 살았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해괴망측한 망언과도 같은 이 픽션은 구원받지 못한, 다르게 말하자면 종교의 이름으로도 어쩔 수 없는 (혹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기도 하는) 지옥과도 같은 세상 비극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   *   *



    “나는 페키치의 이 소설이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지언정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410쪽)


    번역을 맡은 이윤기의 말이다. 종교의 권위가 다듬어온 전통에는 사고 범위의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걸 벗어나면 이단이자 신성모독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를 벗어나 종교를 이해하려는 지난 노력들 덕분에 그 한계를 벗어나 생각해봐야 하는 까닭을 잘 알게 됐다. 이를 내다본 종교 관계자들은 ‘열린 종교’를 표방하며 세상과의 적극적인 대화에 나선다. 마찰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열린 문으로 오고 가는 진솔함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끔 자극하기도 한다.


    그들은 아마 페키치의 질문, 그가 소설에 담은 질문의 의미를 꿰뚫고 있을 것이다. 기적을 입은 이들이 실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것이 그들의 타고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안정으로 과장되어 있긴 하나, 과연 그것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예수 사후 우리는 그가 말하던 삶의 최고 가치들을 얼마나 흡수하여 실천했는가. 모든 것을 예전의 전통대로, 그리고 문자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건 페키치가 종교 자체에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 과녁이 되어 질문을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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