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2015.10.01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시리아가 자랑하는 고대 신전인 벨 신전(Temple of Bel)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시리아 측에서는 “기본적인 건축 구조는 아직 남아 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UN은 인공위성으로 찍은 이미지를 분석하여 처참하게 무너진 신전 본 건물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를 BBC가 뉴스로 발표하면서 벨 신전의 비보를 듣고 조마조마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범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ISIL, 우리가 흔히 IS라고 부르는 수니파 테러조직, 이슬람 국가가 한 범죄였다. 반달리즘의 전형이다. 벨 신전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신전이었다. 이리나 보코바 UNESCO 사무총장은 이를 두고 “문화 청소(a form of cultural cleansing)”라고 비난했다. 하버드와 옥스퍼드는 UNESCO와 합동으로 약 5천 여 대의 카메라를 파견하여 앞으로 훼손될 우려가 있는 문화유산들을 3D 사진으로 저장하겠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인류 가치가, 그 집약들이 지금 화약고 속에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곳의 무고한 사람들이 왜곡된 종교 해석을 일삼는 정치적 싸움 탓에 목숨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주요 포털사이트 검색어 10순위 안에 ‘IS 김군’이 오래도록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중동과 아프리카 등 주요 분쟁지역의 폭탄테러 소식이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분단과 대치라는 군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도 그곳의 끔찍한 상황은 살갗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아마 ‘이슬람’이라는 타문화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적잖은 영향을 주고받았을지는 몰라도 이슬람권의 테러가 바로 우리의 이웃동네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는 그 사건들을 정리한 뉴스보도나 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주장처럼 IS의 확산과 대규모 수준의 국제테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내부적인 문제와 종교적 교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IS 지도부의 성향 때문에 알카에다의 9∙11 테러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에게 대입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IS 문제로 (일부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큰 고통을 겪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IS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외교적이거나 정치적 의미에 있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IS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오해를 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려는, 그렇게 편을 쉽게 갈라버리려는 단순한 (정치적) 사고의 절차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분위기여서 하는 말이다. ‘테러-이슬람’의 구도가 자칫 우리의 머릿속에 굳어버릴 수도 있다. 서정민의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한편으로는 오늘날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이슬람 전역의 항변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슬람의 초기 역사에서 시작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슬람국가(IS)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살펴본다. 이슬람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국내 저자들의 소개서가 적잖기 때문에 이와 겹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저자는 이슬람 형성 과정에서 어떤 내부 갈등이 있었는지를 주로 살펴본다. 특히 그가 주목한 부분은 오늘날의 ‘과격 이슬람주의’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들으면서 늘 생각한 것이지만 이슬람의 문제는 사실상 무함마드 사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들은 어렸을 때 죽었고, 그는 후계자인 ‘칼리파’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서로 자신이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로 이어지는 정통 칼리파 시대, 즉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말하는 지상 최고의 이상적 국가의 시대가 끝나자, 이슬람은 세속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가의 확장과정에서는 내전이 발생했고, 극단적 사상이 등장했다. 이슬람은 타민족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오늘날처럼 시아파와 수니파가 정치적인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일이 드물었지만 문제는 정치적 상황에서 계속 발생했다. 십자군 전쟁, 그리고 몽골의 침입 등이 있었다. 이후 이슬람은 원래 주인공들이 아닌 투르크인들이 재통합했고, 그들의 쇠퇴와 멸망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서서히 이슬람공동체 곳곳이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 지금 아랍권 국가들의 국경은 서양의 손이 그은 것이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서양이 인위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아랍권 나라가 바로 레바논이다. 프랑스가 만들었다.)


    서양의 위협 속에 근대적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이슬람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혁의 ‘삼두마차’로 불린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는 서구의 제도와 기술을 도입해서 내부의 문제를 풀어가자고 주장했고, 무함마드 압두는 교육의 개혁을 강조했으며 일부다처제를 폐지하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라시드 리다는 셋 중 가장 강경하여 기독교 세계를 ‘암적 존재’라 규정하고 칼리파 제도 부활을 통해 정통 칼리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 세 주장을 보면 당시 이슬람공동체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는지 이해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상이 행동으로 옮겨진 첫 사례가 온건했다는 것이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된 무슬림형제단은 토론과 자선을 통해 영국에 대항하며 이슬람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은 나빠진다.


    세계대전으로 현재와 비슷한 국경이 그어졌지만 정부의 권위주의와 전쟁 배경 속에 극단적 이슬람주의가 등장했다.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몰랐다. 자신들과 맞지 않는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노선의 이념이 팽배했다. 지금은 자힐리야(무지)의 시대이니 하키미야(알라의 주권 회복)를 해야 하는데, 이는 글로벌 지하드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중동의 비이슬람 정권과 서방, 특히 미국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됐다. 식민통치와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과격 이슬람주의의 선명한 등장을 예고한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국가 수립 선언(1948년)이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땅’이라 했고, 유대인들은 ‘약속된 땅’이라 했다. 둘 사이의 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뉴스를 보니, 팔레스타인 측에서 얼마 전 체결한 평화조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엄포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에 곧 반응할 것이다. 둘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을 던진 채 이 지난한 분쟁의 원인을 서로에게 미루고 있는 형세다. 강건파인 하마스도 이런 와중에 등장했던 것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도 큰 충격이었다. 서방 세계는 당연히 놀랐고, 무엇보다 중동의 이슬람공동체도 놀랐다. 서방의 비호를 받던 이란의 세속왕조의 부패를 이슬람의 뜻으로 몰아낸 사례였기 때문이다. 단일혁명으로는 최대 규모의 시위대가 이 혁명에 동참했다. 해외 도피 중 이란의 국민들을 선동했던 호메이니가 귀환했고, 호메이니는 자본주의와 미국 패권주의, 세계 불공정을 타파하겠다고 했다. 이후 탈냉전시대와 1차 걸프 전쟁을 거치며 반서방정서가 이슬람사회 전역에 만연했고,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1세기 아랍의 봄 이후 IS 등장에 이르는 역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가 테러와 이슬람을 하나의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된 것은 어쩌면 서방의 뉴스 보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슬람교가 보수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미지를 이슬람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학자들은 IS와 관련된 이슬람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몇 가지 원인들이 저자의 갈무리 글에 들어 있다. 독립과정에서 서방이 일방적으로 정한 국경,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저소득층 문제의 심각성, 부족에 충성하려는 지방민들의 특성, 책임 없는 정부로 인해 발생한 국가분열사태, 그 과정에서 성숙하지 못한 국민국가 등이 학자들이 꼽는 사태의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종교를 왜곡하고 극단적인 방법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지금 IS가 통치하고 있는 영토는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시리아 정부는 지금 반군과도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토는 매우 좁다. (여기에 쿠르드족의 문제까지 겹쳐 시리아 정부가 고려해야 하는 문제는 상당히 많은데, 문제는 그들이 극단적 방법으로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IS가 침투하여 무상교육, 무료복지, 소득 재분배, 식수와 전력, 연료 등을 공급하면 저소득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 IS는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세력에게는 공포를 선사하지만 장악지역의 민심을 얻는데 있어서만큼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랍의 봄을 통해 무너져버린, 혹은 약점을 드러낸 중동의 여러 정부들이 IS의 확산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그만큼 IS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칼리파 국가를 선언하며 자신들과 손을 잡아야만 ‘합법적인 지하드 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있다. ‘IS 김군’ 사건으로 우리에게도 이미 IS의 SNS 홍보 실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서양에서도 그들의 홍보에 ‘선전의 정석’이라는 평을 달았을 정도다. 여러 해외조직이 IS에 가담하며 충성을 맹세한 것 외에 이슬람과 아무런 관련도 없던 이들이 IS의 선전에 매료되어 비행기를 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IS에 접근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다. 여기에다 전문미디어 설립, 온라인매거진 발행, 앱 활용, 드라마 방영 등으로 포근한 이미지를 대외에 뽐내는데 성공했다. 미 정보국은 90여 개 국에서 약 2만여 명이 IS에 지원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과 무기 등으로 이미 준국가의 형태를 갖춘 상태다. 다만 비타협적 성격을 가진 세력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공포통치가 자행되고 있어 빠른 확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전망이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한 히즈불라(헤즈볼라), 알카에다, 나이지리아의 보코 하람, 소말리아의 알 샤밥 등과 IS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IS는 테러 집단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민병대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는데, 테러 집단과는 달리 확실히 통치하는 영토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60여 개 국이 연합군을 꾸렸고, 오바마 대통령도 “죽음의 조직(network of death)”이라 부르며 국제사회의 동참을 적극 요청할 정도다. (IS는 수니파이므로) 시아파 맹주 이란도 이라크와 시리아 사태에 개입하고 있다. 군대의 규모 상 격차가 있어 IS가 주변국을 실제 위협할 것 같진 않고, IS 사태가 타국으로 확산될 조짐도 낮긴 하지만 IS의 등장으로 중동의 불안정한 분위기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으며 그들은 더 오래 살얼음판의 정세를 지나야 할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그 분위기 속에서 탄압받는 이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 열거한 몇몇 사례들을 보면 이념의 차이가 불러오는 잔혹성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시각에서 현재의 IS 사태를 주시하거나 분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 및 온건 이슬람주의와 테러 세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같은 담론이나 시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239쪽)


    저자 서정민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슬람국가’, 즉 IS라는 용어만 놓고 보면 그들이 하는 행태가 이슬람의 뜻과 딱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대표적인 전쟁범죄, 예컨대 일부 소수파나 소수민족, 혹은 그들이 적대시하던 민족의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삼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왜곡된 이슬람 교리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행동이 앞서고 교리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가 정치의 해석 아래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졌는지 이미 충분한 사례들을 통해 들어왔고 또한 알고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이슬람권 사람들은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대해서도, IS 사태에 대해서도,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 각지에서 매일 같이 들려오는 폭탄 테러에 대해서도 비난과 비탄을 쏟아낸다.


    뉴스만으로는 중동의 사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다. 테러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구조대원들이 피투성이의 노약자를 끄집어내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오열한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로 잔인하고 때론 선정적이다. ‘테러-이슬람’의 구도가 그 사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짤막한 뉴스는 그 정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 정황이다. 이 책과 같이 중동 문제를 분석한 책들이 숱한 뉴스 보도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과 중동은 오해받아선 안 될 정도로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들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와 그들이 섞여 사는 지점은 문화 다방면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말미에서 내 가슴으로 파고든 문장들이 있어 옮기며 마친다. 이슬람은 테러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는 아랍어다. 커피에 넣는 설탕도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다. 면, 알코올도 아랍어라는 점을 한 번쯤은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긍정적인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24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