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4


    봄날의 햇살에 걸터앉는 것도 좋다.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댔다 등을 댔다 하며 뒹구는 것도 좋다. 찬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에 숨는 것도 좋다. 매한가지로 책을 읽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제 막 일출을 마친 가을의 품을 우리 독자들은 왜 그리도 편애하는 것인지. 사계 중에 가장 사랑하는 모습을 꼽으라면 그들 중에도 가을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뭐, 1/4 정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책은 분명 그렇다. 거의 다 익어간, 붉어지는, 떨어지는, 바람에 구르는, 쌀쌀해지는, 하늘이 맑은, 더러 눈 내리는 날이 그리워지는 이때가 제격이다. 최초의 책은 가을에 만들어진 건가. 혹시.


    사람마다 다르고 나이마다 다르다고들 한다. 겪은 일도 그 가지가 부지기수일 텐데, 그런 우리들 사이에 저마다의 가을이 갖고 있는 의미를 너무 일반화해서 이해하는 건 별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이들의 가을은 어떨까. 일상의 ‘오후 3시’ 같은 느낌일까. 부모님께서는 “심하게 가을 탔어.”라고 표현하시지만 사실 난 그 뜻을 모르겠다.


    지금은 없는 한 가수는 서른 즈음이 되면 세상 일 중 흥미로운 것이 하나둘 사라져간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가을이, 그 중 어떤 가을이 내게 유난한 의미를 갖고 있진 않다. 둔해진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인정하면 스스로 섭섭해지고, 그런다. 생각한 것, 겪은 것, 그 중 저물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쓰라린 상처 같은 것이 드물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을’하면 나는 주름이 떠오른다. 세월이 만든 산맥들 사이로 낮게 그림자가 지고, 점점 짧아지는 해가 어둠으로 사라지는 모습이다. 아, 그러고 보니 책이 그렇다. 나보다 많은 주름을 가진 이들이 적어 내려간 생각들이다. 겉보기에는 정갈한 평면 같지만 뭐 하나 빙판 위 날을 딛고 있는 것 같은 속도로 읽히는 것이 없으니, 나는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덜커덩거렸던가. 책을 품은 가을의 힘은 혹 그것이 아닐까.


    봄을 기(起)라고만 할 수도 없고, 겨울을 결(結)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봄에 피었다가 그 철에 지는 만물처럼 봄은 그 나름의 뜻과 생각을 피게 하고 여름에 접어들면 여름의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 또 그 사이가 명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의 시기를 놓고 보면 가을은 분명 결(結)에 가까운 느낌이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이 어딘가로 향하고, 그 끝에는 종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의 철로는 없는, 여정의 종착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 마침표 뒤로 여백만 남겨놓는 책처럼 말이다.


    다 읽고 덮은 뒤 독자가 느끼는 일렁이는 그 기분. 책이 주는 묘한 성취감과 아쉬움까지. 그러고 보니 닮았다. 책과 가을. 그간 보내온 시간을 셈해보고, 손에 든 바구니에 수확을 하듯, 혹은 모난 돌 사이에서 모양 좋은 것들을 골라내듯 둘은 우리가 정지해 있는 시공을 늘려준다. 한없이 길어져 그 끝이 겨울의 문턱을 넘어갈 때도 있지만 가을은 느려진 시간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갈 것들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유속 느린 강가에 살포시 멈춰선 무언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가을의 시간도, 책의 시간도 우리를 자꾸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으로 만든다. 떨어진 밤 알알이 주워 부푼 호주머니처럼 또 무엇을 얻게 될까, 기대하는 건 독자된 이들이 갖고 있는 순수한 동심이다. 그리고 노을 같고 주름 같은 가을. 끊어지지 않는 어떤 흐름 같은 것도, 여기서 이렇게 보니 보인다. 가을의 하늘은 그냥 텅 빈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도 빈 곳이 있으면 채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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