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지혜 - 세계 여러 문화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
마가레테 브룬스 지음, 김정근.조이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2015.08.25



    세상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는 크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동면을 위해 한껏 먹어두는 곰처럼 미술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들을 찾아다니며 흡수하려고 했다. 덕분에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종교, 광물질, 나무, 외국어 등을 예전보다는 많이 알게 됐다. 그것들을 긴 시간 소화하면서는 나만의 미술관을 꾸리고 책을 써나갈 수 있겠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학자의 마음, 작가의 시선, 그리고 관객(혹은 독자)의 관심 사이를 오고 가는 상상도 했다. 참 매력적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러 종류의 블록을 앞에 둔 아이가 된 듯하다. ‘저걸 어떤 모양으로 쌓을 수 있을까?’ 조합의 문제를 생각한다. 재료의 모양과 성질을 모르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나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명제이자 불변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는 원점, 아니 바닥 같은 게 보일 것이었다. 미술의 표면을 뚫는 깊은 책들을 읽어갔고, 내가 가진 그 어떤 도구로도 더 이상 파내려갈 수 없는 신비한 물질로 된 표층을 발견했다. 그 표층의 이름은 ‘눈’이었다.


    미술은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삼스런 이 문장은 의외로 많은 걸 이야기한다.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눈을 둘러싼 세계다. 따라서 미술만큼 ‘철학하기’ 좋은 분야도 사실 드물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때로는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눈은 가끔 거짓말을 말한다. 어떤 것이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반면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는 단초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판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못 볼 수도 있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만 볼 수도 있다. 눈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눈으로는 절대적 진리나 객관을 말할 수 없다.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 이것이 진리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가능하다.) 따라서 미술도 그러하다.


    마르가레테 브룬스의 『눈의 지혜(Die Weisheit des Auges)』는 눈이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열게 해주었는지 설명해주는 대단히 깊은 책이다.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눈에 대해 쉽고 간편하게 설명해주겠다고 벼렸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글, 겉핥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근원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때때로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의 이야기 정도로 취급하는데, 잠시라도 시간을 내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눈의 지혜>는 나의 별 볼 일 없는 이름을 걸어서라도 필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구석기와 신석기(즉 구상과 추상), 고대 이집트, 동양화, 이슬람, 그리스도교, 르네상스, 현대회화로 구성된 이 책에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시대의 일화나 미술, 철학, 역사 등의 전문용어들이 실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 재료보다도 그 재료들로 마르가레테가 무엇을 엮어가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동양화에 대한 그녀의 이해에 감탄하기도 했다. 마치 동양 철학을 전공한 사람처럼 문장을 다룰 줄도 안다.) 눈은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그녀의 메시지다. 이 책은 영원과도 같은 세계로 필멸의 우리를 초대하는 한 권짜리 손길인 셈이다. 적어도 그에 관해서는 내게 가장 진득한 책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인류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의 긴 역사를 통째로 대상으로 한다 가정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유형과 무형을 본다. 여기서 ‘무형(無形)’은 정말 형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형태,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잡스러운 형태’를 의미한다. 인류가 본 최초의 유형은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이 당연 아니었다. 그리기 이전에는 그려진 형태를 봤을 것이다. 바로 머릿속으로 그려진 형태. 주로 동물이 아니었을까. 어제 동료들과 함께 잡은 야생소의 뿔 달린 머리가 바위 속에 그려져 있다. 최초의 화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눈’ 그 자체였다. 최초의 미술은 화폭이 아닌 머릿속에서 ‘발견’된 것이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이후 미술의 역사는 꽉 채우는 그림, 비워놓는 그림, 옆모습만 그리는 그림, 선원근법을 사용한 그림, 역원근법을 이용한 그림, 직접 보고 그리는 그림, 이상(理想)을 그리는 그림 등 매우 다양한 가지로 진행됐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릴 수 있다. 유형(有形). 미술은 머릿속에서 형태를 그린 최초의 이름 모를 인간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유형에 봉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 않은 대상까지도 유형의 세계로 끌어다 놨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화다. 그릴 수 없는 대상은 문자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예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글씨에서 기(氣)를 느끼는 이들이 있었으며, 아무도 보지 못한 선인(仙人)을 그림에 그려 교훈으로 삼기도 했다. 침묵은 여백이 되었다. 또한 여백으로 침묵하기도 했다. 색채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광물질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자본의 움직임에 일조했다. 인간은 이렇게 눈의 노예를 자처했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림으로 ‘거짓말’까지 하게 됐을까. 이제는 각도가 변할 때마다 달리 보이는 그림이 전시관에 걸려 관람객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낸다. 똑똑한 작가들은 눈이 사람을 얼마나 기만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한때 우리는 사진으로 시간을 그리는 지경에 이르렀기도 했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유형의 화폭을 보게 됐다. 이걸 ‘무형’이라 불러도 괜찮은지, 아예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제멋대로 던져놓고 화단(畵壇)의 고평을 받아 세계적인 화가가 된 한 남자를 두고, 그것이 예술적으로 정말 공정한 일이었는가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유형에서 해방되려는 인간의 움직임은 최대한 무작위에 가까운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유사 이래 인간이 이런 전환을 겪은 적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 폴록은 무작위적인 형상 속에서 작위적 형상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나는 그도 이 치명적 단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 무당처럼 춤을 추며 물감을 휘갈긴 것이리라. 이후 마크 로스코는 아예 형상을 떠올리지 못하게 색면(色面)만 남겼다. 이와 비슷한 일은 반세기 전 러시아에서도 있었다. 유형에서 도망치려는 인간의 무모한 시도는 추상의 형태와 색만 남기고 다 걷어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르가레테는 이 문장을 남기고 책을 닫았다.


    “형상. 성스럽고 악마적이고 가치 없고 쓸모없으며 강력한 형상들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냥꾼과 채집가로 수십 만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림이 그려진 동굴을 영원히 떠났고, 새로운 형상을 지닌 채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춤추듯 나아갔던 인간들만큼이나 현재의 인간들도 기본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르가레테 브룬스,『눈의 지혜』, 449쪽)


    나는 크게 늘어나고, 동시에 아주 작아지는 세상을 본다. 상이한 형태로 공존이 가능한 절대의 존재를, 마치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그런 기이하면서도 고차원적인,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눈은 분명 제한적 생체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인류의 형상 속 역사, 그 춤을 추는 것 같았던 화려했던 역사는 우리에게 깊은 문화적 감흥을 줬다. 인간을 고고한 존재로 만들어 자존감을 심어줬다. 수많은 예술 분야와 서로 조우하면서 우리는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을 거의 무한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그릴 것인가? 여기서 그만 둘 것인가?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더 그리게 된다. 마르가레테의 마지막 문단에도 답은 나와 있다.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렇게 “춤추듯” 나아가며 형상을 그릴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주의 손아귀에서 멸망할 때까지 우리는 형상과 함께 어우러져 주인인 듯 노예인 듯 일생을 영위하다 그 모든 것을 남겨놓고 사라질 것이다. 이따금 미술을 공부하다 감상에 젖을 때면 나는 모니터 속 그림 앞에서 깜빡거리는 눈을 비비곤 한다. 위대한 감옥의 철창을 우리는 뜯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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