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2
책은 바다다. 밀려들어오는 바다다. 지표에 누워 있는 나는 얼굴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억겁의 수면들을 안경처럼, 혹은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세상을 본다. 나는 눈을 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눈 위에 있는 여러 겹의 막으로 세상이 쏟아져 들어온다. 감으면 안 보는 것이고, 충격적인 상이 맺히면 잠을 설치는 것이다. 책은 글자의 군대이지만 나는 이미지로 된 상처를 입는다. 독서라는 건 한동안 잠수하는 것. 빠져나올 수 없는 경험. 물속에서 물 위를 바라보려고 하는 태생적 한계. 이 상태가 오래 되면,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숨 쉴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자. 그래서 바보라는 소리도 듣는다. 다들 숨을 쉬고 살아가기에, 왜 숨을 쉬지 않으려고 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멋지게 대답할 수는 있지만 그 겉멋 속에는 내일의 독서가 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다. 나는 “왜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이를 여태 본 적이 없다. 그건 존재의 문제다. 왜 독서가 존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나도 모른다. 죽으려고 뛰어든, 아니, 죽으려고 누워 있던 밀물 전의 바다에서 나는 썰물이 준, 달이 빚어낸 신비로운 조화에 감사하며 한창을 호흡하다가도 곧 쏟아질 글자의 폭격을 기다린다. 죽으려고 사는 것일까. 말장난 같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나와 당신의 로망이다.
일상은 편하다. 아는 지도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눈 감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모르는 길을 가면 내비게이션을 보느라, 도로표지판을 보느라,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쫓긴다. 초보 운전자가 복잡한 서울 시내에 들어가면 갖게 되는 공포는 웃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사납게 몰아치는 행렬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막강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포에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이 편하다. 나름 박아놓은 이 땅의 말뚝 안에서 우리는 울타리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며, 아는 만큼 산다. 하지만 책은 우릴 울타리 밖으로 내친다. 글자에 저항할 수 있는 철갑을 입은 이가 몇이나 되는가. 책의 세상은 우리를 두드린다.
마음을 때리는 것. 어디 있는지 모를 그 나의 ‘마음’이 타격을 받을 때, 그 타격을 육체적 고통으로 느끼는 이들도 있다. 나는 자신에 대한 회상과 작품 활동을 연결시켜 오래도록 고민하다 병을 얻은 한 화가를 안다. 그 화가가 보내준 이메일, 그 창작의 고통은 꼭 같진 않아도 나 역시 느꼈었다. 왜 그것은 그리도 아픈 것일까. 명치를 주먹으로 세게 한 대 맞은 것과 그것은 또 왜 다른 아픔을 주는 것일까. 책은 세상을 긁는다. 부스럼은 더럽다. 어떤 책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입 속으로 날벌레들이 수도 없이 들어온 것 같은 역겨운 감정만 남기기도 한다. 딛고 선 땅을 뒤흔들어버리는 책도 있다. 살을 베는 것도 있다. 엄동보다도 시려 읽는 내내 몸을 떠는 책도 있다. 익숙한 이 세상을 엘리스의 나라로 만들어 붉은 여왕과 쉼 없는 꼬리잡기를 해야 하는 책도 있다. 다 상처를 남긴다. 이렇게 말하면 콧방귀 끼는 이가 있을까. 독서는 자학에 가깝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싫다. 성장은 남이 봐야 아는 것이고, 자기 자신은 한참 뒤에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옛 모습이 화석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단히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실로 성장하기에, 저 말이 사실이기에 그래서 싫다. 아프지 않으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현자들이 그렇게 말했고, 가까이는 어른과 선생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고, 얼마나 아프며, 그 상처는 어떤 크기와 모양으로 얼마나 남게 되는지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고 떠벌리는 이들은 가라. 고통을 아는 자는 곧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정신 속 가사(假死) 상태에 있는 이들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만 본다. 손을 내밀어봤자, 내밀 손도 없고 붙잡을 손도 없다.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신이, 절대자가, 최상자(最上者)가 있다면 이 세상의 본성은 가혹한 놀이판이라고 할, 이건 정신의 놀이가 아닌가. 피해가는 이들은 그 지옥을 모른다.
“그대는 나를 마치 허약한 어린아이나 전쟁에 관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처럼 시험하지 마라. 나도 전투와 전사들을 죽이는 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나도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마른 소가죽 방패를 돌릴 줄 알며, 그것이 내가 보기에 방패를 든 전사로서 싸우는 법이다.” (호메로스, 천병희 譯, <일리아스>, 98쪽)
헥토르가 아이아스에게 외치는 구절이다. 강건한 장수 한 명이 상대 장수에게 이렇게 외치면 향후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용기백배의 호언은 우리에게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모양을 그리며 흩어져 창백한 배경을 내보여야 하는 가을 하늘이 꼭 우리의 모습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문자 앞에서 혹은 조용히 읽거나 혹은 침묵하며. 어쩌면 그 모습은 공포와 경외와 숙고 속에 어떠한 계시를 기다리는 수도승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장황한 글은 모니터 옆의 티끌을 훔쳐내다 써내려간, 한낱 사물과의 동질감을 느꼈더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티끌이다. 티끌은 쓸어가는 자에게 시끄럽게 지껄이는 법이 없다. 펼쳐든 책 앞에서 나와 당신은 어디로 쓸려 가는가. 어디가 그렇게 아픈가. 우린 서로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독자라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