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1
오랜만에 신간들을 보러 들어왔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문장 하나가 땅 위로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글 다듬는 나 같은 이들은 안다. 무릎이고 손바닥이고 팔꿈치고, 그런 아픔이 좋다.
예정된 고통을 향해 넘어지는 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진다. 글 다듬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 글을 쓴다. 어른이 되어도 습관처럼 넘어져야 하는 이 삶의 ‘아이 같음’을 매번 받아들인다. 상처 아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의 서랍 안에는 대단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이제니 시인의 <달과 부엉이>를 읽다 이 문장 밑으로 도무지 읽지를 못했다. 억울하게도 저건 두 번째 문장이었다. 하지만 남은 문장들은 상관없었다. 내 마음대로 문장을 주무르다가 잡히는 아무 종이 한 장에 코를 들이댔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날까?’ 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바라는 바를 질문으로 바꾼 것이었다. 기억에서도 종이의 향이 난다면 참 좋을 것이다. 종이의 향이 기억이니,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련해지는 많은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무력했고, 부모님도 그러하셨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력함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봤다.
“나는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한다.”
이 문장은 하나의 운동이다. ‘글쓰기’라는 운동의 성질은 기억을 종이에 가깝게 하는 것. 마치 기체와도 같은 ‘날것’의 기억을 하나의 묘비로 만드는 것. 극단적 단명의 성질을 어떻게든 없애 화석화시키는 것. 내가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모아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넣어보던가, 3개월 남짓 되는 숙성의 시간을 ‘가을’이라는 단어 안에 가둬두는 것.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안한 유동을 잠재워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 인생을 완벽하게 기릴 수 있는 묘비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한 기억을 온전히 남기진 못한다. 모르는 것은 쓰지 않고, 거짓은 적지 않는다는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이 아닌 여러 문장과 장면만이 인상에 남는 독서의 비효율은 글쓰기에도 있다.
하지만 글 다듬고 책 읽는 이들에게 그 비효율은 체념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핍이 낳는 가능성의 세계를 언제나 믿기 때문이다.
기억은 종이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두 대상은 서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절대 붙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다. 그건 기억에서부터 종이로 넘어지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과정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자신을 기꺼이 그 ‘사이’의 공간에 들여놓는 사람은 남들보다 사유의 근육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수많은 사유의 경지들 중에서 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곳은 단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