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14.11.02



  한 가지 두려움이 있다. 곧 삶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질 것이다. ‘대단히’라는 저 부사의 의미를 나는 잘 모르겠다. 사회생활의 초입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자박자박 걸으며 나름대로 사유한 이 세계의 모습이, 혹은 모양이 서서히 바뀌어갈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늘 그렇듯 적응된다. 도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항상 약삭빠르게 적응하곤 했으니. 그러나 문제는, 아니 두려움은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 계절 지나가는 것마저 지나치며 살지도 모른다는.


  고집하던 속도가 있었다. 이 공간을 찾아와 기꺼이 누추함을 견뎌주던 나의 몇 안 되는 당신들은 그 속도가 얼마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물리. 타인이 보면 멈춰 있는 것만 같고 그리하여 매우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미미한 속도를 사랑했다. 글은 지렁이처럼 쓰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생각의 밭을 가꾸려면 맨손과 자갈, 그리고 꿈틀거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분히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에 ‘거느린’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주변을 생각하게 되었다. (배운 바) 철학과 닿아보자면 그건 장자에 가까웠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철학적으로 여겨본 적이 (이따금 굳이 글감으로 따져볼 때는 제외하면) 거의 없다. 들판에 세워놓은 나를 지팡이 든 방랑자로 만드는 것에 나는 익숙했다. 목동이 되지 않았다. 나를 세상 위에 띄워놓고 바라보면 나는 더 넓고 큰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의 적잖은 양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그런 기회를 줬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는 읽는 속도만큼 걷거나 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마치 식물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순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듯이,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자란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가장 느릿느릿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마음도 속도를 늦추는 완보를 하게 된다.” (문태준,『느림보 마음』, 57쪽)


  최근 방송작가 과정을 밟아가면서 나는 나를 새로운 분위기에 몰아넣는 나름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익숙지 않은 단어와 과제 사이에, 프로들 사이에, 제작의 입장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중압감 사이에. ‘어른’을 이해해가는 길목에서 나는 벌써 그들이 무엇을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그리고 생(生)을 위해 자신의 모양을 얼마나 바꿔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의 보온병 속에서는 어른들의 이기와 무지, 혹은 무감각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의 특권이란 게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해로부터 반보 물러나서 다시 바라본다.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이기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으며, 또한 무감각하지 않은, 그리하여 일상을 쪼개 그 속에서 세상을 분별하고 성찰할 줄 아는 어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끝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대단한 책임감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세간이 몹시 부러워하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 안에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밭을 부단히 경작하는 어른의 모습이 내가 좇는 이상에 가깝다.


  “구태여 우리 모두가 새벽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나는 다만 ‘홀로 앉아 있음’의 시간으로 새벽을 선택한 것이다. 비껴 앉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이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이다. 뒤가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그이는 이마를 앞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로만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옹벽이 있다. 옹벽을 만나 옹벽을 종일 고집스레 이마로 밀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문태준, 위의 책, 143쪽)


  그것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지 않을까 싶다. 삶의 새벽을 만드는 것. 아마 작가의 삶을 꿈꾸는 것도 그런 까닭. (프로의 길을 걷는 선배들에 따르면 그 삶은 무척이나 치열하다지만) 누구나 사는 대낮의 삶에서 내 손으로 조용히 태양을 내려 노을을 만든 뒤, 그들에게 새벽을 지을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태준 시인이 그 새벽을 나에게 선물한 것처럼. 물론 그 새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하루를 서랍 속에 넣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새벽의 모습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벽은 대낮과는 다른 의미로 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대체로 멈춤과 느림과 여유, 아득한 고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조우와 관련이 있다. 새벽이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불면이 아니라면 새벽은 (조금 선정적으로 말하자면) 늘 노곤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잠으로 달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진정한 새벽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그건 과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당신의 삶에 있어 당신 스스로 새벽을 만드는 일. ‘이것을 할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렇게 할 능력이 되는가?’를 물어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삶은 거대한 바다로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다로 흐르는 강물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목할 만한 선각(先覺)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제시되어왔다. 다양한 말을 통한 일관된 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큰 위안을 받는다. 잠시 멈추고, 생경한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순간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물리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멈춤이다. 나는 책만큼 그 멈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 시인의 이 책은 멈춰 있는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걸음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위대한 역설이다.


  “사랑이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나는 알 것도 같다. 너무 손을 대면, 손 타면 안 된다는 그 말의 귀함을 나는 알 듯도 하다. 애써 성공하려 하지 말고, 애써 실패를 초래하지도 말라는 가 말을 알 것도 같다. 애써 헤어지려 하지 말고 애써 만나려 하지 말라는 그 말을 알 것도 같다. 삶이나 사랑은 강과 같아서 다만 유유히 흐를 뿐이다. 초봄의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그것이 시간의 변화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나에게 처음으로 용납한다.” (문태준, 위의 책, 337쪽)


  멈춤의 역설로부터 나는 세상을 배운다. 빠른 것이 소위 ‘대세’이고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속도의 기술이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그 흐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뛰어드는 일은 쉽다. 어른들이 슬그머니 나의 귓가 뒤에 와서 들려주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그 일들은 빠른 속도에 알맞게 자기 자신의 덜어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아픈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리하여 정말 아프도록 뼈저린 일이리라.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다져나가야 하는 밭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자동차를 무서운 속도로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 멈춘 다음, 근처 밭으로 가 생각의 농부가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할 나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적정 속도로 달려도 양옆으로 차들이 바람에 날린 종잇장처럼 지나가버리는 게 이곳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멈춰 세울 수 있는 비(非)물리적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생각이 끊어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문 시인은 이 책 어딘가에 그곳이 궁금하다는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나는 이 놀라운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커다란 모습을 갖춰간다고 믿는다. 빨리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크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그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의 세계. 한 욕심이 있다면, 그건 이 세계를 놓치기 아깝다는 욕심이다. 씨앗 뿌리고 정성 들여 이 밭 가꾸면서 그렇게 생각해본다. 멈춰 선다. 변화하는 모든 시간의 기름칠로 내 무딘 손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 밭 일구기 좋은 가을이다.


  “여름 매미가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나도 소견이 좁아 시절의 오고 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무딘 마음의 안쪽으로도 가을은 와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 위의 책,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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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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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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