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2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차의 속도가 지나쳐버린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쫓는다. 그 눈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눈으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마음에 넣어두니까. 실시간으로 흩뿌려지는 의미들이 내가 사는 속도만큼, 혹은 그 의미의 절대 속도만큼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사소한 욕심이 아니다. 아이의 투정도 아니다. 잠시 뭔가에 홀린 사람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그물이 되어보려는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착각이 낳은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부터 많은 것들이 진다. 이미 진 것들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무 같은 비석을 세우고, 위로의 낙엽을 태운다.

  가을.


  거리를 걸었다. 비 내린 아침의 날카로운 공기가 비릿하기도 했다. 그렇게 목을 넣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두툼히 넣어 걷고 있는데, 낙엽 한 무리가 내 앞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보도블록의 맨살이 드러났다. 건드리면 안 되는 가을의 치부를 본 것 같았다. 전술한 바, (굳이 말하건대) 이것은 진부한 착각이었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때때로 가을을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착각은 가을의 절대명령이기도 했다. ‘멈춰라. 너를 멈추어라.’ 이 짧은 메시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떠오르게 되는 당연한 궁금함이 있다. ‘왜 가을의 풍경은 우리의 걸음을 끊는 것일까?’ 가을을 대하는 마음이 스스로 베일을 벗는 일은 결코 없으니, 그러하기에 우리는 시를 쓰고, 노래를 듣고, 허구를 현실로 끌어오기도 하는 것이리라.

  가을.


  그것은 아주 긴 발음이다. 길게 풀려나가는 두루마리와도 같다. 하늘로 바람 따라 날아가 풀리며 결국 구름 없는 청아한 파랑이 되어버리는 풍경이다. ‘가을’이라는 단어를 손으로 만져보면 때론 전혀 촉감이 없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미 수확이 끝나 기울어진 노을처럼 누워 있는 논밭의 내음이 그곳으로부터 풍겨오는 것도 같다. 거두고 난 것을 먹는데도 마음이 허할 때가 있다. 잔인한 11월일수록 더하다. 가을 하늘 청아함을 바라봐도 우리의 눈으로는 도무지 우주를 바라볼 수가 없으나, 그럴수록 시선이 우리 안으로 아득하게 굴러 떨어진다. 그것을 건져 올리는 것도 일이다.

  가을.


  어김없이 찾아와도 해마다 더욱 진하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부터 ‘가을’이라는 걸 알았을까? 지금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얼마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도 같고, 그로부터 결국 가을을 전혀 모른다는 결론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가을이지 않은가. 아침마다 느끼는 공기의 냉랭함과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과 그렇게 헝클어져도 다시 빗고 싶지 않은 이 마음도 다 가을이지 않은가. 언젠가는 줄기차게 서리가 얼 것이고, 첫눈이 내릴 것이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가득 채우고 있는 지금의 가을, 그 의미와 그 풍부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불안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사뭇 포근하기도 하다. 어느 유명 시인에게서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라는 ‘시적 발악’이 나오길 기대하며, 내 마음도 그렇다고 말해본다.

  가을.


  한 마디로 이것 역시 붙잡아둘 수 없어 비석으로 세워둬야 하는 시간. 마땅한 장례식도 없이 추색(秋色)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고, 하필 무더기로 썩어간다. 그러나 시신을 밟아대는 이 계절의 발걸음들은 하나도 잔인하지 않다. 그 소리 듣고 사는 것이 가을의 생리이다. 우리가 밟는 것 중에서 눈과 모래 같은 것들은 그저 자연의 섭리인 것으로만 느껴지기 일쑤인데, 낙엽은 전연 다르지 않은가. 시간이 흘깃 떨어뜨려 바닥을 나뒹구는 그 의미로, 세상에 수도 없이 피어난 시. 그리고 세상은 하나의 시집. 당신과 나는 독자. 그러나 오늘부터 11월. 붙잡고 싶지만 이미 반절이나 지나가고, 그나마도 대부분 붉게 떨어져버린.

  가을.


  장인(匠人)이 다듬어낸 정교한 그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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