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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평점 :
2014년 9월 1일
“제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 저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저는 꼭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 어떤 극심한 곤경에 처해서도 글은 계속 썼습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휘몰아치면 다른 문제들은 마음에서 해소되기 마련입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論創作』, 297쪽)
나에게 그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작가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섭렵하겠다는 (그 나이 때에는 꽤나 순진했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오싱젠의『영혼의 산(靈山)』은 아쉽지만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건대, 지금 읽는다 해도, 혹은 황혼이 되어 읽는다 해도 ‘나를 찾는 여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정신적 고립의 파탄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부단하면서도 절박한 노력이었을 것인데, 나는 과연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았을까. 혹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의 낮은 기준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는 세상이 많다는 걸 항상 느낀다.
사실 읽기에 실패한 작품은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눈에 밟혔다. 가오싱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혼의 산’이란 아름드리나무들의 울창한 원시림과 시끄럽게 축제를 벌이는 마을, 그리고 곰팡내 나는 여관방의 이미지가 전부다. 그런 까닭에 『창작에 대하여』는 그 높던 누군가에게 느끼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 글모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과 글’에 대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저에게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혼잣말입니다.” (위의 책, 297쪽)
반드시 그렇진 않겠지만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는 한 가지 장르에만 치중하는 작가보다 ‘예술’이라는 총체적인 현상을 더 폭넓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오싱젠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들 중 한 명이다. 『창작에 대하여』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대한 가오싱젠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는 가오싱젠이 직접 모든 장르의 창작에 참여하여 얻게 된 결과물이지, 다른 이들의 철학과 견해, 혹은 체험을 빌려 쓴 말이 아니다. 가오싱젠의 직업은 ‘작가’라고 한정지을 수가 없다. 악기연주, 무대연출, 소설집필, 회화, 언론, 번역,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유년시절에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던 배경과 예술에 대한 본능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이라는 작은 예술의 그릇이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오싱젠의 국적은 현재 프랑스이다.
‘중국’은 하나의 정치적 환경이었다. (또한 다른 대부분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오싱젠이 그곳에서 떠났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환경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문학이 정치로부터 이탈하여 냉철하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환경으로 도망쳤다고 봐야 옳다. 이 책에는 가오싱젠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정치와 문학의 분리’가 여러 문장과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신의 창작 철학에 대해 설명한 1~2부는 물론이고, 대담 형식의 3부에서도 등장한다. 가오싱젠의 ‘문학 제 1법칙’이라고 (다소 딱딱하지만)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문학을 정치에서만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조나 사상적 배경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의 미학은 해석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학에 대해서도 명제를 연구하거나 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든 언어적 분석이든, 철학자들의 미학 연구는 범주와 개념, 어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미와 예술을 일종의 언설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작업은 예술창작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위의 책, 124쪽)
지금 책상 왼편의 서재에는 지난 몇 년 간 미술을 공부하며 읽었던 숱한 미학책들이 꽂혀 있다. 그 공부를 끝내고 다시 몇 년 간 작품들을 감상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던진 질문은 “과연 카라바조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바로크’나 ‘르네상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특정사조 속에서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을까?”였다. 어떤 작가든 마찬가지다. 물론 19~20세기 들어 ‘예술철학’이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예술이 사상적으로 움직이려는 시도가 빈번해지긴 했었다. 아마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예술이 이처럼 격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미술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회고하거나 추정하면서 정의(혹은 고착화)하는 작업은, 어쩌면 학문적 차원에서만 효용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는 언제나 해석의 언어들 사이로 도망쳐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위의 책, 125쪽) 그리하여 가오싱젠은 예술이 한없이 주관화된 세계에서 ‘예술의 언어’를 통해 표출되는 오묘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예술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가의 창조자로서의 본성은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집단의 의지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 어떤 공인된 진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권력이나 관념에서 비롯된 그 어떤 강제나 구속도, 예술가의 창조적 본성을 압살하지 못한다. 예술가 개인의 미학만이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며 윤리다.” (위의 책, 195쪽) 이 문장을 읽으면 대단한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오싱젠 자신도 자본주의 속의 예술을 (특히 문학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며 드러낸 것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의 세상에 조응하고 있다. 특히 예술이 향유되는 방식에서 가장 그러하다. 예술이 하나의 문화생활 속에서 소통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특성이 그 한계일 것이다. 이 소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시장(market)’이라는 말을 붙여야만 한다. 벤야민의 ‘복제’, 혹은 ‘아우라’라는 용어 역시 이 시대에는, 그리고 이 시대 이후 언제까지나 유의미하다.
예술시장 속의 대중은 유행과 기호, 그리고 (가장 중요할 테지만) 가치를 따른다. 조금 씁쓸한 표현이지만 이건 다 ‘값’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볼 수 있는 이들만 알아서 찾아오라는 식의 고가 전시회는 예술시장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술상품의 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후 발견된 거장의 작품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무엇을 주고 얻는가? 이런 전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고 나면 ‘자유’와 ‘주관’과 ‘무한’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영역은 창작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엄청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지 말 것을 농담 삼아 조언했던 한 교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때 창작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었기에, 솔직히 이 책을 사들고 처음으로 했던 기대는 ‘나의 창작’에 대한 회고였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두려워지는 수많은 세상 중에 ‘창작’이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의 자유’라는 확고한 하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는 작업은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원칙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마저도 일반의 마음으로는 해낼 수가 없다. 나는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의 겉을, 문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예술은 분명 어딘가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위안이 된다.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예술가가 되는가. 흥행여부를 떠나 100년이 지나도 기억될 이는 누구인가. 독자인 우리는 이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언제나 예술에 기대어 우리의 긴 삶과 작은 세상에 얼마든지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그러한 수단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유일한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