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8일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보다 더 깊은 사람들의 ‘글’이라는 것을 대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는 데에 있어 별다른 사고절차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려는 사람들이 어떤 분위기와 문제를 유발하는지는 충분히 봐왔다. 융합과 소통의 사회임을 자처하는 21세기이지만 겉만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슬로건의 문구 같다. 오히려 오늘날은 어떤 책의 제목처럼 분노에 익숙한 사회이다. 분노로 곪아버린 여드름이 때가 되면 벌겋게 터져 나오는 듯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 상당수는 우리와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사건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개 부정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사회의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단과 방법, 규모가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그 까닭일 것이다. ‘쿨’하다는 특정한 성향에 대한 미화가 유난하다. 사람의 성격도 유행을 타야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만약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보다는 일반적으로 조금 더 ‘깊은’ 사고를 할 줄 아는 시대에 살게 된다면, 그들은 이 시대를 뭐라고 평가할까.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본 (그래서 가족들을 위해 나름 번역을 해줬던) 영화 <K-PAX>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자신을 외계행성 K-PAX에서 온 방문객이라고 소개한 프롯(케빈 스페이시)이 정신과 의사인 마크 포웰(제프 브리지스)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하나 말씀드리지요, 마크. 당신네 인간들, 인간의 대부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책, 그 어리석음으로 우주 전역에 알려진 정책에 동의합니다. 당신들의 부처와 예수는 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두 인물에게 주목을 하지 않더군요. 심지어는 불교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까지도 말입니다. ‘인간’이란. 가끔은 당신네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게 어렵기까지 합니다.” (Let me tell you something, Mark. You humans, most of you, subscribe to this policy of "an eye for an eye, a life for a life," which is known throughout the universe... for its stupidity. Even your Buddha and your Christ had quite a different vision, but nobody's paid much attention to them, not even the Buddhists or the Christians. You humans, sometimes it's hard to imagine how you've made it this far.)
인간에게는 수많은 한계가 있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없이 통상적으로 보면 그토록 많은 인간 ‘개체’가 존재했음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삶을 살거나 가르침을 전파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정신의 경지와 단계가 탁월하여 타인을 구제하고 구원해줄 수 있는 이의 수가 적은 것이 (다들 동의하는 바대로) 당연한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주목을 하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그들을 제대로 주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주목할 만한 이는 누구이고, 오늘날의 주목할 만한 이는 누구인가? 이유는 무엇이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초등학생들이 풀 단답형 문제의 질문처럼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K-PAX>의 프롯이 던진 따끔한 경고는 언제까지나 유효할 것이다.
월터 카우프만, 지그문트 바우만, 알랭 드 보통,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막스 피카르트, 에리히 프롬 등이 그러했다. 그들이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우리가 ‘물화(物化)’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물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임을 자의적인 선택에서이든 아니면 외부 압력으로부터 강제된 결과이든 간에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끌려가는 삶이 편하기는 할 것이다. 그로부터 자존감에 상처를 받고 내내 마음고생을 한다고 해도 주변의 물화된 환경들이 언제든지 위로해줄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화는 대체로 감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강도 높은 쾌락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고행과 같은 수행의 길이 그나마 반대 극점에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평소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독서와 사색이라는 방법밖에 없다. 물화되어 있지 않은, 정돈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위험천만한,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것. 독서와 사색은 우리를 정신으로 안내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이다.
현대문학을 가르친 한 교수가 그랬다. “여러분은 작가가 될 꿈을 꾸지 마십시오. 그 고단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한 명의 충실한 독자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낭만적이고 쉽습니다.” 물론 반어적인 의미였다. 2년 전 강의였지만 뇌리에서 이 말이 떠나지 않는다. 정신적인 삶의 고충이 얼마나 무게감 있는 것인지는 그 결과물이 하나의 사회에 알려졌을 때 그 사회가 겪게 되는 소위 ‘후폭풍’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고, 그 규모가 개인이 상상하기에는 너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신적 삶을 사는 ‘그들’과 우리[凡人]의 현저한 차이다. 우리가 할 말도 그들이 하면 다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통해 쟁취된 것이기에, 또한 증명된 것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삶 내부로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어쩌다가 한 번 쯤은 우리가 무한히 생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새로워지며, 신념이 다시 세워진다. 자주(自主)의 거대한 산맥이 삶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정신적 삶의 위력이다.
독서와 사색이 정신과 닿아 있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타인의 정신적 삶을 맛볼 수 있다. 후에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정도 마음 다잡고 살다가도 다시금 우리의 삶은 대체로 물화적인 영역으로 선회하기 마련이고, 이런 일상에서 버둥거리며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시도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알 만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후에 다시 타인의 정신적 삶에 ‘접촉’하는가에 달려 있다. 순전한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든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든지 우리는 ‘접촉’이라는 일종의 사건에 주목해야 한다. ‘접촉’이라는 사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중요하다. 책을 읽으라는 대중적인 충고도 명백한 증거를 가진 조언이다. 그러나 책이 매한가지로 좋은 것만은 아니듯이 우리에게는 ‘접촉’이라는 사건을 조금 더 제한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이것이다. “무엇과 접촉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독서량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예 책을 안 읽는 이들에게야 전 세계의 독서량 데이터를 가지고 설득을 할 수는 있겠지만 책을 읽는 이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자신들이 믿기를) ‘독자’층에게는 어떤 책을 읽어서 자신의 정신적 삶을 외부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키는지를 자문하도록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점에 있어서 수많은 이들이 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 하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데 열정적이고,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보다 확장된 독서를 하는 이들을 ‘보통 독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대부분은 ‘보통’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안이한 독자에 머물고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책 한 권을 써야 한다는 식의 다소 보수적인 것 같은 말을 나는 거의 전적으로 지지하고 믿는다. 양심적으로 생각했을 때, 독서는 연비가 매우 낮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며 (주로 시간문제 때문에 먹히는 말이지만) 발췌독을 권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듯한데, 과연 작가가 아닌 우리가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나쳐도 되는지를 어떤 수로 제대로 판단할 수가 있을까?
한 권의 책이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를 굳이 작가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하나의 결과물이 저 가벼운 종이 안에 묶여져 있는 현상(혹은 기술) 자체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런 독자라면 “작가가 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부터 우리의 또 다른 독서는 시작된다.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일인지를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 하나의 문단, 그리고 하나의 장. 한 권의 책 곳곳에서 우리가 탐구하고 사색, 경험할 수 있는 세상으로 수도 없이 뻗어나가는 부지기수의 선이 있다. 안 그래도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독서이다. 한 권도 많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