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6일





    아버지의 부고 편지를 받았을 때, '엠마 순스'라는 여공이 처음 느낀 감정은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어버리는 죄책감, 비현실감, 한기, 두려움"이었다. 엠마의 아버지는 자살을 했다. 엠마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르헤스의 「엠마 순스(Emma Zunz,)」는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지금부터 엠마가 할 모든 일은 진즉에 과거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엠마의 감정은 한 곳으로 일순간 정렬되었다. 바닥에 떨어뜨린 편지를 다시 들었을 때,  엠마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어렴풋이나마" 지각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통 무엇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그 첫 순간의 어렴풋함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원동력 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엠마는 아마 이 순간 거의 즉각적으로 자신의 복수를 확정했을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엠마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흐느꼈다. 슬픔은 복수의 동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이 대목을 너무나도 짧게 처리했다. 왜냐하면 복수의 동력이 된 슬픔보다는 복수의 이유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들에게 슬픔만을 부각시켰다면 엠마의 복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엠마에게는 떠올려야 하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던 추억을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이윽고 나쁜 기억들만 떠올랐다. 아마 당시 아르헨티나 내의 유대인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고려해본다고 하면, 엠마에게는 좋았던 추억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아버지는 공금횡령의 죄를 뒤집어쓴 것이고, 도둑은 로웬탈이다."


    엠마는 이 비밀을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있었다. 생각건대, 엠마가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느꼈던, 보르헤스가 "용트림을 하며 솟구쳐 오르는 힘의 분출"이라고 한 마음 속의 동력은 아마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는 잠정적인 계획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혹은 타인이 모르는 정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엠마의 훗날 계획을 보면 둘은 별 차이가 없다.


    엠마는 밤을 새서 계획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 모습은 보르헤스가 굉장히 무뚝뚝하게 '나열'했기 때문에 시리게 다가온다.) 공장에 가서 일하고, 저녁 6시에는 엘사와 함께 운동을 하러 가고, 친구들과 함께 일요일 오후에 영화를 보자는 계획도 했다. 심지어는 언제나처럼 폭력에 반대한다는 생각을 상기한다. 당시 엠마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도모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파업을 하면 분명 노사 간에 마찰이 있을 것이고, 과격한 사람들이 분노하여 싸움을 벌일 것이다. 엠마는 평소에 "싸우면 안 된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미 복수의 계획을 짜놓은 그 날에도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을 파업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보다도 엠마에게 파업은 "싸우면 안 된다."는 신념을 한 번 상기시키고 말 현상이 아니라, 실은 자신의 복수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좋은 도구로 이용된다. 사장 로웬탈에게 파업에 대한 비밀스러운 소문을 알려주겠다며 낚시바늘을 던져놓고, 그가 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1월 16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나마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건, 증거인멸이었다. 엠마는 한 영화배우의 초상화 밑에 숨겨놨던 편지를 찢어버렸다. 이제 아무도 그녀의 복수동기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이다. 그녀의 살인을 복수가 아닌 정당방위로 교묘하게 꾸미는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쉽다. 엠마는 애당초 남성을 "정신병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들"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 사회상에 비춰본다면 여공 엠마가 여러 차례 남자들에게 몸을 팔았을 가능성, 그로 인해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 남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잠시 멈춰서 독자들에게 문장 하나를 던진다. "그 날 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현실과 결부시켜 보는 것은 힘들 뿐더러, 아마 부당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부당한 일. 왜 부당한 일이라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안고 가야 하는 질문은 이후 엠마가, 약간 삐그덕거리긴 했지만 복수를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엠마는 그 날 오후 항구에 나가서 스웨덴에서 온 노르드스트하르난 호의 선원 중 한 명에게 몸을 팔았다. 이 일은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이런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했다고 하더라도 왜 엠마는 몸을 팔러 갔던 것일까? 남성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옛 시절에 대한 나쁜 추억이 갑자기 어떤 감흥을 일으킨 것이었을까? 마음 속에서 다시 그 일을 반복하면서 기분 나쁜 쾌감, 그 이중적이면서 상반된 느낌이 동시에 존재하는 감정을 느끼려고 했던 것일까? 보르헤스는 이 일이 "시간의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엠마는 무언가를 상기시키려고 자신의 몸을 팔아 상대방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 역시 그 무언가는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장면에서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발견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었다. 이 대목 때문이다.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일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의 흔적은 이게 전부다.) 그렇게 몸을 팔며 "육체의 비애, 그리고 혐오감"이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자신의 공포를 압도했을 때, 마침내 엠마는 옷을 입고 결전의 장소로 간다.


    로웬탈은 가난한 나라에 도입된 자본주의가 낳는 전형적인 구두쇠이다. 동시에 신을 쫓는 사람이다. 우린 그가 어떤 모습일지 거의 짐작을 할 수 있고, 그 짐작은 대부분 맞을 것이다. 그런 그를 죽이려고 엠마가 등장했을 때, 로웬탈은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엠마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엠마가 마음 속에 무엇을 품고 왔는지, 무엇을 계획했기에 밤새 잠을 안 잘 정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로웬탈에게 엠마는 밀고자, 평범한 여공, 자신이 부리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건 엠마에게 큰 이점이었다. 그러나 엠마는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원래 엠마의 계획은 정의의 사도가 되어 로웬탈에게 시원스러운 '선고'를 내려주고 방아쇠를 한 번만 당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엠마가 지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건 공포가 아니라 혐오였다. 아마 몸을 팔지 않고 바로 로웬탈에게 가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면 그녀의 계획대로 실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엠마는 보르헤스의 말마따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분노에 대한 형벌을 내리고 싶은 충동"에 단단히 달라붙어 떨어질 수가 없었다. 사소한 치욕들이 태산을 이뤄 엠마를 가공할 만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엠마는 조금 다급하게 로웬탈에게 공포에 떠는 밀고자 흉내를 냈다. 로웬탈은 물 좀 갖다주겠다면서 (물론 이건 엠마의 부탁이었다.) 부엌으로 갔고, 그 시간은 엠마에게 로웬탈의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엠마는 두 방을 쐈다. 그러자 로웬탈은 정의의 사도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정의의 사도는 고발문을 외기 시작했지만 외는 도중에 로웬탈이 피를 다 토해서 죽었다. 다 꼬여버린 것이다. 엠마는 마지막으로 이 복수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는 로웬탈이 자신을 겁탈하기에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말했다.


    엠마는 어떻게 됐을까? 알 수 없다. 아마 여공의 일은 더 이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다른 일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형무소 신세를 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엠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그러나 엠마의 어조, 수치감, 증오, 분노는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엠마를 두 가지 시선으로 각기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시선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도덕론 입장의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르헤스도 그 논쟁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엠마가 실행에 옮긴 미완성의 복수이다. 우리는 다시 보르헤스의 교묘한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아벤하깐 엘 보하리, 자신의 미로에서 죽다」의 소재처럼 눈에 보이는 그런 미로가 아니라, 복수의 미로로 들어간다. 나는 일단 복수의 미로로 들어간 엠마가 자신의 계획대로 실행에 옮긴다는 자신감(공포와 수치심으로 더럽게 뒤범벅된 괴물이다.)을 갖고 있다가 점점 그걸 잃더니 복수의 미로 끝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벽을 허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게 두 발의 총성이다.


    우리는 복수극을 보면 통괘함을 느낀다. 대개 복수하는 사람은 정의의 편에 서 있고, 죽는 사람은 악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엠마 순스」는 엄밀히 말하자면 정통 복수극은 아니다. 엠마는 정의의 편에 서는데 실패했다. 그것도 보는 이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주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렇다면 로웬탈은 악덕한 사람인가? 맞다. 그러나 로웬탈이 죽어가면서 내뱉은 욕설이 엠마의 고발문 낭독보다 훨씬 강렬했다. 마지막 순간에 이긴 건 로웬탈일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독자들은 엠마에게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갈필을 잡을 수가 없다. 불쌍하긴 한데 일단 복수를 하긴 한 것 같고, 복수를 한 것 같긴 한데 영 시원치가 않다. 우리가 빠진 보르헤스의 미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린 한동안 그 안에서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알아두면 좋은 것들


①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엠마 순스'라는 이름은 내가 의도적으로 고른 유대인 이름이다.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왠지 이상하다고 받아들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런 일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겠어.' 내가 순스의 이름을 '로페즈'라고 했었다면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Woscoboinik, 106)"


② '보르헤스'하면 단어에 상징을 넣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Zunz라는 이름을 두고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Zunz는 준회문이다. 영어로는 quasipalindrome이라 하는데, 단어를 머리부터 읽어도, 꼬리부터 읽어도 발음이 똑같은 걸 '회문(palindrome)'이라고 하니 '준(quasi-)회문'은 앞뒤로 읽어도 서로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일컫는다는 걸 알 수 있다. Zunz는 앞뒤로 'z'가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un-'이 남는데, 스페인어로 '1(one)'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이를 본질, 혹은 세상의 모든 것과 무(無)를 상징한다고 본다.


③ 순스가 항구에서 몸을 판 건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유대인은 최하층에 속했고, 유대인 소녀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 나가서 스스로 몸을 팔아 돈을 벌곤 했다.


④ 학자들은 엠마 순스가 두 개의 사회체계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남성 사장이 여성/남성 노동자를 착취하는(exploit) 경제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성 체계이다. 둘 모두를 한꺼번에 거부하는 모습이 이 소설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엠마는 복수를 하러 가기 전에 항구에 들러 한 남자에게 몸을 판다. 모든 일이 끝나자 남자는 테이블 위에 돈을 놓고 갔는데, 엠마는 자신이 완벽한 복수를 계획하기 위해 편지를 찢어버린 것처럼 그 돈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나 엠마는 곧 후회를 했다. 아마 당시 아르헨티나 내의 유대사회, 혹은 원래부터 정통 유대사회에서는 빵과 돈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던 것 같다.)


⑤ '다피아(Dapía)'라는 학자는 엠마 순스를 해석하려는 여러 시도들에 독자들이 짓눌릴 것을 염려했는지,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것이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간추려본다. '언어 미신'이라는 것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프리츠 마우트너(Fritz Mauthner)가 만든 용어이기 때문에 독일어로는 'Wortaberglaube'라고 한다. 프리츠는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너무 단어 자체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렇다.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질문을 단어로 던졌다. 가령 "what does this earthquake mean, or this deformed child, or this comet? ('지진'이란 무슨 뜻일까? '기형아'란 무슨 뜻일까? '혜성'이란 무슨 뜻일까?)"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 '영혼'이나 '물질'과 같은 단어에 매달리기 시작하면서 '믿음에 대한 정신박약(mental weakness of believing)'이 생겼다.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실제 대상이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는 뜻이다. 다피아는 이를 「엠마 순스」 읽기에 끌어와서 여러 해석을 거부하고 엠마의 행동과 생각 자체를 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엠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언어, 다른 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가 떠맡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것이 '복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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