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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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9



  중학생 때부터 5년 간, 나는 시를 썼었다. 아마 그에 관해서는 이 누추한 공간에서 여러 차례 말했을 것이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고, 돌이켜보면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글과 생각을 한 지점에 두고, 태양의 큰 궤도를 도는 행성이다. 시를 알 것 같다고 생각(착각)했을 때 나는 시 쓰기를 그만 뒀고, 다시 시를 만났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아 시를 쓰지 못했다. 이런 생각들을 시를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 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가 얼마나 어려운 산고를 치러야 태어나는 아름다운 아기인가를 깨닫고 있다.


  창조의 신비가 지닌 애매모호함을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거슬리는 말이겠으나, 시는 크게 두 개의 세계를 왕복하며 세포를 분열한다. 우리가 시를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을 느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는 관찰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세계이다. 전자가 우리를 시인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후자가 그런 우리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 시인은 두 세계를 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드물다. 우리는 대개 후자의 세계에 입국할 수 없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관찰의 세계는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의 세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계에도 입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뜻이다. 만약 이 누추한 공간에 들어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는 관찰을 할 줄 알아.”하고 안도를 한다면,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단 한 차례라도 관찰에 집중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는 세계로부터 의미를 뽑아낼 수가 없다. 그런 고로, 그들에게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재앙이다.


  사람은 다양한 것에 집중한다. 서로 같지 않다. 가령, 아버지와 나는 주말 산행을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야생화를 스마트폰에 담기 위해 종종 걸음을 멈추신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걸어야 하는 산행에서 내가 꽃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도 꽃을 물론 봤다. 그러나 그건 본 것이지, 관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차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자.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다양하고도 넓은가.


  이런 이유로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동녘, 2013)』을 읽으면서 굳이 그 책에 특별히 언급된 사물들에만 우리가 집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독자들은 아마 장석주가 제시한 여러 사물들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사물을 찾기 위해 생각의 여유를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 책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 헤겔, 스피노자, 프로이트, 니체 등 족적이 넓디넓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빌려 신용카드, 진공청소기, 담배, 거울, 책, 사과, 구두, 망치 같은 사물들이 어떤 의미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이걸 ‘소개’라는 단어로 표현하긴 좀 그렇다. 장석주의 글을 하나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저자는 문장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소개서’라고 설명하는 결례를 범하는 대신, 장석주 스스로가 서문에 밝힌 대로 ‘한 권의 축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먹기 힘들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따라서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거대한 축제.


  스마트폰을 보자. 아마 그 덩치를 호주머니에 덜렁덜렁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스마트폰 소유자는 열이면 아홉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다닌다. 소위 ‘그립감’이라고 한다. 지갑 이상의 위력과 능력을 가진 이 덩치를 손에 들고 있으면 그렇게 안정적일 수가 없다. 스마트폰 중독자에게서 스마트폰을 뺏으면 손을 떤다고 하지 않던가. 기술이 우리에게 침투한 깊이를 우리는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다. 인문학적인 눈으로 보면 그건 기술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강탈한 흔적이다. 우리가 (사실 대부분인) 한쪽에서 기술의 진보를 여러 TV 광고들을 앞세워, 그리고 열렬한 소비자들을 앞세워 찬양하고 있을 때, 반대쪽에서는 기술의 거센 강물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강둑에 서서, 휩쓸려 가는 이들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강물이 너무나도 빨라 미칠 정도로 스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쉽진 않다. 굳이 맹자를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생활의 균형감(중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안다. 하지만 이건 한쪽으로 너무 쏠려버린 모양이다. 인문학자는 뭐라고 말할까?


  “휴대전화는 시공을 초월한 ‘나’의 확장이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사람들은 ‘나’의 시공을 무한대로 확장하고, 그 대신에 ‘나’의 핵심이라고 할 자아가 자아로써 있도록 단단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독의 온전함과 자유는 한꺼번에 잃어버렸다.(pg.28)


  그러면서 저자 자신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골동품 애호가라서 의도적으로 새 것이 헌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당연히 아니다. 저자는 기술의 화려한 진보에 기대는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고독과 자유를 수호한다. 고독과 자유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둘 다 워낙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 의미를 도통 알 수 없거나 혹은 의미가 희석된 경우가 대부분이겠으나, 이것은 우리의 영양분과 같은 것이다. (좀 더 사유를 해보고 싶은 사람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어보길 바란다. 이건 확신에 찬 강력한 권유이다.) 비유컨대,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비타민 C를 체내에서 못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기술이 고독과 자유의 섭취를 차단한다. 기술은 인간에게 고독한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의 기회를 박탈한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A사의 본점에 들어가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을 들고 나오면서 본점 직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자유?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비평’을 하면서 자신은 기술로부터 충분히 멀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자위를 할 수도 있다. 나도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런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모든 행위가 사기이며, 어리석은 짓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럴 것이다. 사기일 수도,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자일 수도 없고, 더군다나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태어난 우리와 같은 세대가 ‘머니(money)’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체내에서 비타민 C를 못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필연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결함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기와도 같고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점을 올바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나는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자아성찰’이라는 단어의 모습이 과대 포장된 선물상자, 혹은 질소만 잔뜩 들어 있는 과자봉지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여긴다. 장석주가 여러 철학자들을 빌어 설명한 여러 사물들의 ‘오늘날의 의미’는 우리에게 다양한 강도의 저항력을 준다. 물론 중력처럼 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영원히 막진 못하겠지만 인문학의 저항력은 우리가 일탈하는 속도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본질적인 이질감이다. 다른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을, 혹은 옳다는 것을 읽자마자 우리가 행동을 교정할 수 없는 당연한 모습에 비춰보자면, 인문학은 우리에게 고통(저항력)을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마친다. 그것이 우리에게 완벽한 형태의 자아성찰인가? 그건 종교도 하지 못한 일이고, 그러므로 오늘날 판을 치는 ‘힐링’ 저서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일탈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는 병행해서 사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런 단어를 쓰긴 좀 그렇지만 이건 ‘사회적 진화’에 해당하는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면 아무런 법 없이 살 수 없으며, 또한 그가 아니면 문명의 보고(寶庫)에서 물건을 꺼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건, 중요한 행위는 무엇일까? 인문학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회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멈추는 것이다. 멈춰 있는데, 눈은 뜨고 있는 것이다. 눈은 뜨고 있는데,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인데, 관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시인의 두 세계 중 전자의 세계, ‘관찰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문학의 증언들은 우리의 여권과도 같다.


  그곳의 세계는 다양하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치국들까지 포함해도) 나라들보다도 많다. 일본에 존재한다는 1억 이상의 신보다도 많다. 그곳에 가려면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권이 필요한 것일까?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유로패스처럼 기차만 타면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여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그건 도둑놈의 심보다. 인문학은 작은 것 하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걸 표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 들여다보는 자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이,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여권 없이도 다른 나라를 갈 수 있는 ‘초’이동적인 방법을 알게 된다. 마치 영화 《K-PAX(2001)》에서 주인공 프롯이 한 광속여행처럼. 쉽게 말하자면, 사물 하나에는 세계로 연결되는 수많은 노드들이 있다. 예컨대, ‘카메라’라는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장석주를 만나고 있으면, ‘거울’이라는 세계를 한창 돌아다니는 장석주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몫은 인문학 저자들의 쓴 소리를 기꺼이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생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를 이리저리 다듬을 용기를 지닌 독자들의 몫이다. 이런 용기가 없다면 ‘카메라’는 그냥 찍는 기계이고, ‘거울’은 그냥 비춰보는 도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세계는 정확히 그 정도로만 느껴지고, 흘러지나갈 뿐이다.


  이곳은 사소한 세계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의 말이 여름이면 어김없이 귓가에 울리는 짜증나는 모기소리로, 아니면 한낮의 더위를 잡아먹고도 남을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의 짝을 찾는 매미소리로, 그렇게 제각각 들릴 수도 있겠다. 왜 그런 걸 신경 쓰느냐고. 왜 당연한 이야기를 그렇게 힘을 줘서 이야기를 하냐고. 저자 자신은 그렇게 살 용기가 있느냐고.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놀랍다. 정작 자신이 아플 때에는, 손톱이 손톱 밑의 살을 짓누르는 사소한 아픔에도 그렇게 아파하면서 우리의 세계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가 있을까? 사소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에 있는 눈이며, 우리가 얻기 힘든 심안(心眼)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은 좀 보라고,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와 여러 생각을 나눈 한 지인은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는데, 이 매력적인 철학자의 인용문이 『철학자의 사물들』에 실려 있다. 알랭의 책 『여행의 기술』에 있는 한 대목이라고 한다. 장석주가 인용한 구절을 통째로 나 역시 인용해보려고 한다. 인문학이, 혹은 인문학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아주 감미롭게 표현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절박함에 그 글의 촉감이 고스란히 와 닿는다.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 (또 말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로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pg.235-236)


  그러니 작다고 무시하지 말자. 지금 내 앞에는 A4 이면지에 온갖 생각과 독서메모를 적는 M〇〇 팬이 하나 있다. 요즘 나오는 예쁜 팬들과 비교하자면 별로 특별하지도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녀석을 손에 쥐고 땀이 날 정도로 이것저것을 낙서하면서도, 나는 이 녀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엇을 만났는지, 이 공간을 찾은 당신에게는 말 안 할 거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어떤 것. 딱 그 정도만 말해주고, 나머지는 나의 수많은 감정 속에 교묘히 숨겨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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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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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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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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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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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5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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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6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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