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8.10



  배후(背後). 눈에 보이지 않는, 등 뒤의 존재, 혹은 세상. 음모론의 총본산. 실질적인(de facto) 세력. 뭐라고 부르든 우리가 그 실존을 의심하면서도 확신하는 이상한 것. 얼마 전, 모 방송사의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뒤돌아보면 죽는다."라는 콘셉트로 출연 연예인들이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몇 시간이고 고개를 뒤로 돌려보지 못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적이 있었다. 한 연예인은 목에 박스를 두른 채 등장해 그날 누리꾼들의 댓글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자기 자신의 뒤든, 상대방의 뒤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곁눈질을 해야만 한다. 배후는 호기심과 공포가 교차하는 곳이다.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배후는 이중적 공간으로 남는다. 있거나 없거나. 그래서 우리는 믿거나, 믿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심심풀이 '땅콩'의 재미있는 이야기나 경험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현상을 가리킬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현상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살기 힘들게 만드는 것 같으면 배후는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근현대의 공포이다.


  인도 사상을 믿거나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틈날 때마다 읽고 있는『우파니샤드』에서 공포를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형태가 없고 …… 외부와 내부에 어디든 존재하며 탄생을 거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완전히 순수한 그리고 다른 어떤 불멸의 존재보다도 더 훌륭한 존재.(이재숙 역, 『우파니샤드』, 191쪽)" 마지막 대목에서 '훌륭한'이라는 뜻을 존재적으로 강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 문구는 공포에 대한 찬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포는 우리의 찬사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공포가 인류를 발전시켰다는 수많은 사회인류학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공포는 우리가 제거했으면 하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걸 시인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 밑줄 그어 놓은 문구를 이면지에 적어놓고, 책 한 권을 읽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인상 깊었던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원제 :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이다. 사실 이 책에 '공포'라는 단어가 그리 자주 언급되는 건 아니다. '공포'가 직접적인 주제도 아니다. 바우만은 원제에 적힌 부제처럼 'Uncertainty', 즉 불확실성의 대양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몹시 어색하지만 수동태 구문을 굳이 써서) "어떻게 살아지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책을 덮었을 때, 단 하나의 단어가 귓가에 맴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공포'이다.


  현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아무래도 개방성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야."라며 사람을 많이 만나서 연을 이어놓으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개방적인 사람이 되라는 의무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개방성이라면 차라리 간단하고 쉬울 것이다. 현대의 개방성은 "내가 내 방문을 열 의사도 없었는데, 외부에서 갑자기 방문이 열리는" 왜곡된 개방성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이 어느 시점에 "우리 방문을 함께 활짝 열자!"고 약속을 해서 국경이 열리고, 문화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시장 네트워크가 전 세계로 팔을 벌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너도나도 세계가 열렸다고, 비근한 말을 빌리자면 '지구촌 사회'가 됐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니, '개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늘이 열리고 비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물은 삽시간에 불어난다. 폭우가 내리는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한 경험이 있다거나, 장대비 속에서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물이 불어나는 것은 정말이지 찰나이다.


  개방성, 아니 '전지구성'은 결국 수많은 현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들이 사는 사회는 "자신의 여정을 확고하게 결정할 능력이 없고, 일단 선택해도 그 여정을 지킬 능력이 없는 무력한 사회(p.17)"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서의 능력은 대부분이 경제적 지위를 의미한다. 공포가 엄습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주변을 살핀다. 정확히 무엇이 자신에게 덤벼드는지 알지 못하지만, 테마파크의 '마녀의 집'에 들어간 사람처럼 몸을 움츠리고 사위를 살핀다. 현대인들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거나, 호신술을 배우거나, 집에 CCTV를 설치한다. 그러나 이건 공포의 근원을 막아낼 수가 없다. 벽에서 물이 새고 있는데, 우리는 걸레로 바닥에 흥건한 물만 닦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게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 내전 중인 국가, 혹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특히 안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국가는 이미 '열린사회'를 표방하기 때문에 국가 방어의 임무를 변덕스러운 시장에게 전가했으며, 따라서 국가는 (바우만의 뉘앙스대로 말하자면) 정치인을 앞세워 호들갑을 떨면서 테러나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만 하는 '개인 안전 국가'로 전락했다.


  최근 들어 꽤 많은 불만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변의 완성체로 여겨지는 민주주의도 우리의 공포를 제거해줄 수가 없다. 바우만이 예로 든 분석 중에 프로이트의 것이 있다. 프로이트는 '우월한 자연의 힘', '우리 육체의 연약함'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보다가 안 되면 이런 문제들 앞에서는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규칙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불호령처럼 떨어지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불신하거나 스스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는 문제의 장본인이나 악당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렇게 생겨난 공포는 자연에 대한 공포보다 어쩌면 더 고약할 것이다. 학자 카스텔은 이 모든 것이 개인화 때문에 발생했으며, 특히 사회에 있어서 규칙이, 그러니까 '법률'이 보장해주는 개인이 우리의 실존과 멀리 떨어져 있어 사회적 공포가 유발된다고 주장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국가가 하는 일은 개인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포를 관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물론 그 시절보다 오늘날의 법이 더 '민주적'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으나) 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충분치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바우만은 법은 "혼자 내버려둬도 이미 안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안전해지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옛 국가들이 왕의 뜻으로든 신의 뜻으로든 확실히 정해주던 자연적인 소속감이나 미래에의 약속,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에 이르러 사라지면서 모든 것은 민영화되고 그 책임은 개인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사실상 우린 내던져진 존재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법으로 보장받는 개인의 한계에다가 경제적 격차가 부정적인 요인으로 부각되면서 사회적으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리라 기대되는 '위험계급'들은 마치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나오는 '광인들의 배'에 탄 사람들처럼 이 사회에서, 혹은 국경 없는 세계에서 배제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무슨 허황된 음모론이냐?"라고 반박하는 이들이 없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그러나 배제된 사람들은 이미 대양 위를 표류하고 있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미얀마 등은 오늘날 가장 많은 난민을 배출하고 있는 국가이다.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심각한 종교 갈등, 대테러전쟁, 혹은 내전에 시달리는 국가들이다. 이곳에서 떠난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인도양 위를 떠돌다가 호주로 간다. 보트피플이다. 예전에 호주의 노동당 정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을 처리하기 곤란해지자, 인도네시아 남부의 크리스마스 섬을 거대한 난민수용소로 개조했다.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은 호주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지만 호주 정부도 난처해하는 눈치였다. 호주 내 무슬림의 35%가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이라는 것만 봐도 호주 정부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의 부피가 느껴진다. 난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돌아가도 고향은 없다. 바우만은 여러 학자들이 난민의 처지에 빗댄 표현을 적어 놨다. 비공간(non-lieux), 유령마을(nowherevilles), 바보들의 배(Narrenschiften). 이들은 법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불필요해진 사람들', 잉여인간이며, 이미 비관용적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해외로 나가도 문제, 국내에 남아 있어도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지위 역시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 충분한 안정권에 든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바우만의 진단은 이렇다. "'쓰레기' 판정은, 그것이 과거에 인식되던 방식처럼,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구에만 국한되기보다는 모든 이들의 잠재적인 전망이 된다ㅡ즉, 모든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 쓰레기 판정을 받거나 미래에 쓰레기 판정을 받거나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p.57)"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서는 간접적 위협이지만 후발 국가들에서는 "유일하게 번성 중인 산업(p.59)"이다. 1970년대는 세계대전 이후 '영광의 30년'이었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지는 시대였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난민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난민은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실시하는 한편 이민을 반대하는 정서에도 비위를 맞출 수 있는(p.88-89)" 능력이 요구된다. 바우만은 분노의 대상인 엘리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막강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눈에 분명하게 보이고 제자리에 있으므로 넘쳐 나는 분노를 쏟아 부을 수 있는 손쉬운 표적(p.82)"인 난민을 아니꼽게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이건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우리의 얄팍한 도덕관념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난민이 지금 바로 '우리집', 혹은 '우리 마을', 아니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공간으로 주제를 바꿔 생각해보자. 우리의 공간은 대부분 아마 '도시'가 될 것이다. 도시는 아름답다. 대체로 그렇게 느끼게 된다. 나라를 상징하는 여러 대도시들이나 역사적인 도시는 우리의 자랑이 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여행 중인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도시와 함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소위 '글로벌'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는 위험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리 주변을 감시한다고 하더라도 안전에 대한 확신이 희박하다. 마치 언제 암이 걸릴지 모를 것 같은 막연한 불안처럼. 또 하나 바우만이 (사회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지적한 것은 도시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시 안에도 여러 국가들이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난민에 비유될 만한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잊음으로 해서 안락함을 얻게 된다. 그들은 '이방인'이 된다. 바우만은 우리가 원치 않는 그들과 사는 도시의 방식을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인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영구적인 생활방식"이라 부른다.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이방인이 굳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지칭하는 건 아니다. 전 지구적인 문제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런 문제가 세계를 표류할 때에는 별 반응이 없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뒷마당에서 문제의 기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일어선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은 표류하고 있으며, 이미 분리된 도시공간에서 이웃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하다. 구내로 출입을 금지하는 아파트 단지들의 메마른 인심을 지적하는 뉴스 보도가 한때 새삼스러운 관심을 받았었다. 이제 우리는 이질공포증(mixophobia)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공간을 '금단의 공간(interdictory spaces)'으로 탈바꿈시킨다. 과연 세계는 열렸는가?


  무관심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안전의 범위는 의외로 좁기 때문에 어디까지 안전의 경계선을 그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별로 멀지 않은 곳까지만 말뚝을 박아놓게 된다. 만약 어떤 문제가 들이닥쳐서 우리가 결코 저항을 하지 못할 것 같다 싶으면, 우리는 말뚝을 내버려두고 안전한 다른 땅을 찾아 이동할 것이다. 부동산에 가면 사람들이 대부분 물어보는 게 그거다. 윗집에 아이들 사나요? 담배 피는 이웃 있나요? 보안을 잘 되어 있죠? 이사는 어느 정도 '도망'이거나 '개인의 생존'과 직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각각의 유토피아에서 사는 사냥터지기와 정원사에 비유해 신랄하게 설명해 놨다.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사냥터지기의 유토피아는 "만사는 어설프게 손댈 바에야 손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p.158)"에 기초한다. 반면, 정원사의 유토피아는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추는(p.158)" 방식으로 건설된다. 바로 떠오르겠지만, 사냥터지기는 전근대를, 정원사는 근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우만은 정원사가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사냥터지기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뭔가 바꿔야겠다는 신념을 자신의 선택으로 짊어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입으로는 유토피아가 죽었네 살았네 비판을 하면서도 (아주 기만하게도) "숲에서 사냥감이 고갈되면, 비교적 망가지지 않아 사냥감이 우글거리는 또 다른 숲으로 옮겨(p.160)"가는 사냥터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옮겨 다니는 숲 자체가 "우글거리는" 유토피아이다. 사냥터지기에게는 현실 자체가 유토피아인 셈이니, 그들은 비판을 할 여력도 없다. 그냥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엔딩, 정해져 있는 능력의 한도, 정해져 있는 스토리. 흡사 MMORPG 온라인 게임을 연상케 한다. 사냥터는 나의 캐릭터가 움직이는 맵이고, 끝나지 않는 즐거운 사냥은 도무지 고갈될 기미가 없는 다채로운 퀘스트(임무)이다. 죽으면 다시 부활하기까지 하니, 무엇이 과연 우리를 두렵게 할까? 사냥터지기에게 삶은 다만 귀찮거나 즐거울 뿐이다.


  바우만은 책을 끝내며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마지막 장을 언급했다. 바우만이 인용한 구절을 소설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렇다. 쿠빌라이는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의 여러 '가상의 도시'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가상의 도시라는 것은 틀림없다. 13세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현대적 도시들이 등장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도시들은 세계 그 자체와 인간을 의미한다. 쿠빌라이가 소설의 말미에 가서 마르코 폴로에게 유토피아의 존재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차례였다. 마르코 폴로는 유토피아로 가려면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마치 우리 범인(凡人)들이 할 것 같은 의심을 토로한다. 그곳이 지옥이면 어쩌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폴로는 지옥에 대응하는(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하나는 지옥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역,『보이지 않는 도시들』, p.208)"이다. 이건 바우만의 말마따나 '고투'이다. 바우만은 소설의 저 구절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책을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p.175)." 투사가 되라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사냥터지기임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정원사가 되라는 주문과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