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7.31



  축구팬들 중 메시와 호날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축구팬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메시가 호날두보다 잘 한다는 이들, 호날두가 메시보다 잘 한다는 이들, 그리고 그런 건 비교할 가치가 없다는 이들.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위의 주제로 남긴 댓글들을 보는 것은 퍽 재미있다. 자칭 '전문가'라는 축구팬이 어디 한 둘일까. 그런데 이런 편견을 물리고 천천히 하나씩 읽어보면 하나같이 타당한 말들이다. 하지만 이 두 선수의 재능에 대한 경외와 감탄의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메시는 메시 나름대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하게끔 특화된 선수이고, 이는 호날두도 마찬가지이다. 알다시피 축구는 11명이 한 팀이다. 국제대회에서 교체 가능한 인원수는 3명이다. 따라서 많아 봤자 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선수는 양팀 합쳐서 총 28명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포지션'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메시와 호날두를 비교하는 건 축구팬들의 소일거리이다. 그건 그들의 주관에 맡기자. 어차피 결판이 나지 않을 논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메시와 호날두의 공통점이다. 이 둘은 적어도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대회에서는 절대로 골키퍼로 출전하지 않는다. 메시와 호날두를 골키퍼로 출전시키면, 그 둘은 더 이상 '메시'와 '호날두'가 아니다. 재능은 발휘될 수 있는 '제한된 환경'에서 드러난다. 대학생인 나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 (불특정의) 당신에게 메시와 호날두의 재능은 별 필요가 없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의 어떤 욕망 때문이다.


  지난 주, 경주로 가는 KTX 기차 안에서였다. 가족과 함께 떠나는 모처럼의 피서. 행신역에서 신경주역까지는 2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KTX 안의 분위기는 수학여행처럼 왁자지껄하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책 한 권을 가져갔다. 3시간 정도. 얇은 책 한 권이면 되겠다 싶어 나는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The Case Against Perfection)』을 들고 갔다. 이어폰에서는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이 반복해서 흐르고, 나는 비행기처럼 레일 위를 날아가는 KTX 안에서 샌델의 여러 사례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내가 읽은 샌델의 네 번째 책이다. 그의 책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던 터. 그는 우리가 사회에서 심각한 (그보다는 '근원적인') 문제로 회자될 것들에 대해 별다른 인식 없이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준다. 항상 그랬다.


  지금까지 (예컨대 피터 싱어와 같은 학자들의 동물윤리까지 포함해서) 여러 윤리와 관련된 사상들을 어깨 너머로나마 접하면서 내가 본 가장 강력한 윤리 법칙은 아무래도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간혹 자신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이들에게 칸트의 한 마디는 일면 감동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과연 '도구와 목적'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실타래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때때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가언명령의 세계에 있다.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세계에 살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도덕적 당위를 공부한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앞뒤가 잘 안 맞으면 웬만해서는 그걸 안 믿는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리라. 도덕은 필요에 따라 내가 꺼내서 쓰는 '도구'이다. 목적의 도구. '양면의 얼굴을 가졌다.' '가식적이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봤다. 만약 대다수의 인류가 현재 '상용화'중인 도덕에 대해 어느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중요한 건 우리가 스스로를 야누스라고 비하할 것이 아니라 그 도덕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닐까. 도덕은 분명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알아온 자연의 참모습은 도덕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였다. 인간이 도덕관념 없이 아프리카 한복판에 던져져 있던 그때, 전쟁의 참화 중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형편이 되었을 때, 인간에게는 '가치'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아름답게 숨겨준 것이 도덕이라는 사실은 굳이 미사여구로 숨길 '극비'가 더 이상 아니다. 모든 것이 그 근원에서부터 의심을 받아왔던 20세기가 지나 도덕의 외피를 쓰고 있던 인간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21세기이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도덕은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의 몫은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도덕의 미래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이다. 샌델이 수많은 사례로 (하지만 별로 길지 않은 책에서) 말하려는 건 바로 이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첨예한 논쟁은, 바로 우리를 '메시와 호날두'로 만들어주는 공학에 대한 것이다. 영화 《가타카(Gattaca, 1997)》에 비유하건대, 머지않아 우리는 누구나 '메시와 호날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와 호날두'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뜻이다.


  샌델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서두에서 축구 이야기를 꺼냈으니, 여기서도 한 번 비유해보자. 먼 미래의 당신이 축구 경기를 본다. 도구나 룰이 바뀌지 않은 정확히 오늘날과 꼭 같은 축구다. 경기가 시작됐다. 최고의 스타가 골을 넣었다. 1 대 0. 그러나 곧 상대편의 스타가 골을 넣어 경기는 1 대 1 동점. 그런데 선제골을 넣은 선수는 소위 '자연산(natural)'이지만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유전자가 강화된(gene-enhanced)' 사람이다. 둘의 실력은 거의 비등해서 축구팬들이 너도나도 누가 더 잘 한다는 식의 논쟁을 할 정도다. 바꿔 말하자면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공학의 힘을 빌려 선제골을 넣은 선수의 재능을 따라잡은 경우이다. 자, 우리는 둘 중 누구에게 더 환호하는가? 물론 이렇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문제였으면 애당초 샌델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았다. 샌델은 손을 든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왜 그런가?" 과연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질문이 "쉽게 답할" 만한 문제일까? 공학은 우리의 윤리 '패러독스'를 어디까지 몰고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위에서 예로 든 시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샌델이 말한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뭔가가 있는(p.29)" 까닭이다. 그러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는데) '유전자가 강화된' 나의 모습을 즐겁게 상상하는 나 자신이 보인다. 정작 공학의 힘을 너도나도 빌리려는 세상에서는 평균의 수치가 지금보다는 더 많이 올라가겠지만 키가 180cm 정도 됐으면 좋겠고, 별로 운동하지 않아도 공학과 약물의 덕을 봐서 날씬하면서도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몸매를 갖게 되면 좋겠다. 기억력도 지금보다 2~3배 이상 강해지고, 인지능력도 향상 되서 지금이면 4~5일 읽을 책을 단 하루 만에 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혹시 또 모른다. 서양의 오랜 욕망 중 하나였던 '청춘의 샘(The Fountain of Youth)'을 인터넷 시장에서 단돈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날이 올는지.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의 반응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어차피 고통뿐인 인생이 길어서 뭐하겠냐는 세간의 비근한 반응도 있겠다. 그러나 공학이 우리에게 행복한 장생(長生)을 보장해준다면? 인간은 뭐든지 만들고, 뭐든지 판다. 그리고 이득을 위해서라면 거추장스러운 도덕의 장막 따윈 쉽게 걷어낸다.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바라보는 '루저'들이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샌델의 책에 실린 수많은 사례들은 이미 우리가 공학의 힘을 빌려 얼마나 완벽한 인간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완벽한 인간이라. "키 175센티미터 이상, 튼튼하고 몸매가 날씬한 여성으로 가족의 병력에 문제가 없어야 하며,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도 1400점이 넘어야(p.28)"한다는 뜻일까? 배우자를 선별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벌써 우생학의 매캐한 냄새를 느끼게 된다. 배우자를 선별했으니, 이번에는 자녀를 '개량'할 차례일 것이다. 샌델의 사례들은 자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섬뜩한 사회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책에는 '과잉 양육'이라는 단어로 묘사되어 있다. 모두들 자녀를 스포츠스타로 키우려고 한다. 이는 흡사 자신의 자녀들을 사회적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각종 투자를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모습과 같다. 사실 둘은 공학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샌델은 이 차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세태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만화로 다룬 인터넷 웹툰들이 여럿 있는데, 그 밑에 달린 댓글을 보면 가슴이 저리다. 모든 것이 막연하게만 보이는 사춘기의 그들이 그 막연한 시각으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회상이 댓글들에 붉은 피처럼 묻어 있는 까닭이다. 샌델은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대의 과잉 양육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다. 이것은 당혹스럽게도 우리를 우생학 가까이로 끌고 간다.(p.101)"


  우생학을 끔찍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 우생학'의 개념을 들려준다면 더러 솔깃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인류를 위해 결함을 예방한다는 주장은 꽤 논리적이고 합당한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말처럼 "그건 개인의 선택에 맡길 일이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생학적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공학적으로 강화할 '명분'을 얻게 되고 만다. 이 논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개인'이라는 주체 문제를 감성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래, 내가 한다고 하는데 그걸 왜 문제 삼아야 하는 거야?"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윤리적 해이 현상(물론 이런 가치편향적인 단어 말고도 다른 용어가 있겠지만 샌델은 나와 비슷한 표현을 썼을 것이다.)'으로부터 우리의 도덕을 방어할 만한 논리는 없는 것일까? 샌델은 하버마스의 두 가지 개념을 든다. 하나는 우연성(contingency)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freedom)이다. 우리는 가공품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연하게 태어나며, 누군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공학은 둘을 '계획'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둔다. 우리는 누군가의 하위폴더가 된다. 자연을 원래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씩 정리해 사진과 문서로 '정복'하려는 인간의 야욕이 인간 자신에게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우연성과 자유가 우리의 전제조건이라면, 그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과연 무엇이 '도덕적 지평'이 될까? 샌델은 겸손(humility), 책임(responsibility), 그리고 연대(solidarity)을 든다. 왜 그럴까? 자연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어떤 현상이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통제하려는 충동을 자제(p.132)"하려고 한다. 인과는 '통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메시와 호날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위치에 합당한 재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위치에 다다를 수 없는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아무나 ○○을 하냐?"라는 비아냥거림의 의미는 재능에 대한 인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다다른 어떤 위치에 대한 자만을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는 노력으로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다. 천재지변으로 산에 오르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그건 '우연'이다. 만약 그것을 우연으로 돌리지 않으면 (삶의) 과정에 있어 발생한 수많은 일들의 태반은 우리의 탓이 된다. 책임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샌델은 이를 재치 있는 유머로 말한다. "농구 선수가 리바운드를 놓쳤을 때 코치가 야단치는 것은 제 위치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떨까. 유전자 치료 좀 받지, 키가 작아서 리바운드도 못 받는 거 아니냐고 야단치지 않을까(p.133)" 조금 웃기지만 이는 무서운 상황이다. 첫 번째 지평인 겸손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가난한 자보다 더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p.138)"이라는 능력주의적인 인식이 저변에 깔리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런 사회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건 왜일까?) 가진 자는 겸손하지 않다. 우쭐거린다. 이러면 연대는 없다. 그래서 마지막 지평인 연대마저 파손된다. 이게 샌델의 주장이다. 그의 이 말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신은 성공에 부적격한 사람이니 유전적으로 부족한 면을 강화할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p.138)."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 이것은 우연성과 자유를 본성으로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는 도덕적 지평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반쯤 건넌 것도 같다. 인터넷의 소위 '낚시 기사'들 제목을 들여다보면 '우월한 유전자'라는 문구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몸매의 우리가 날 때부터 날씬하거나 근육질인 몸매의 연예인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우월한 유전자'라는 문구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논쟁은 뒤로 물리자. 우리는 대부분 부러워한다. 내심 말하진 못하지만 저런 몸매가 원래부터 주어진다면 그걸 꺼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 때문에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그 자체를 강제의 힘을 빌려 스스로 '개량'하거나 혹은 내가 아닌 타인을 강제로 '개량'시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본성을 바꾸는 것(p.144)"이다. 샌델은 이를 "자율권을 포기한 극단적 형태(p.144)"라고 못 박는다.


  우리는 태어났다.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태어나는 현상은 자동사가 아니라 피동사로 설명해야 옳다. 삶 또한 우리가 '갖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프런티어 정신, 벤처 정신 등등을 운운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적극적으로 바꾸고 개척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의 총체 정도로 여겨진다. 신의 이름 아래에서 피동사의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과는 달리 현대인의 대부분은 누구나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신이 물러갔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어디까지나 순수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우주의 비밀을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우주의 정복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우리가 미래를 향해 걸어간 뒤, 훗날 그 발자국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위대한 정복의 길이라 느낄까? 아니면 무모한 위압의 뼈아픈 상처라 여기게 될까?


  샌델은 우리를 힘겨운 논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뒤, 의외로 아주 간단하면서도 원칙적인 답변을 쥐어준다. 어쩌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보다 샌델의 (이 용어는 조금 조심해서 다뤄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자 강명신氏가 209~211쪽을 할애해 적어놓은 설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공동체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이 바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이지 않을까 싶다.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 이것은 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를 빌려 주장한 '옳음>좋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좋은 것보다는 우리에게 옳은 것을 해야 하며, 그 옳은 것이란 '목적의 도덕적 중요성'에 기초한다. 간단히 예로 들어보자면 이렇다. 의학의 목적은 치료이지 신체 개량이 아니다. 후자를 추구하면 의학의 목적이 훼손된다. 그렇게 훼손된 의학은 우리의 삶을 훼손시킨다. 어떻게?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가 파손되는 모습 그대로. 이런 가치들이 대체 왜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상상만 해봐도 충분하다. 겸손, 책임, 그리고 연대의 가치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실 그런 것들이 극단적인 디스토피아 예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고갈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금방 꺼지지 않고 오래 타는 건물에서 더 많은 유독가스가 나는 법이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예전의 사람들이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근원적인 문제로 달려가고 있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시대적 책임이라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민감해야만 한다. 사유만으로 근원을 탐구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의 여러 도덕사상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겸손'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야말로 내가 우러르는 현자들의 마음가짐이라는 것도 여러 경전들을 통해 알게 됐다. 이미 우리가 탐구하던 근원에서도 도출됐던 '모범답안'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샌델 역시 현대의 여러 현상들을 파노라마로 보여주면서 우리가 평소 별 것 아니라고 여겼던 그 마음가짐을 상기시켜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에게 늘 중요하게 요구됐던 것들. 누군가는 겸손이 지나친 복종으로 이어진다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 사람은 일종의 '신(神)에의 복종'을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내가 아는 겸손은 그 어떤 자세보다도 열려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된 미덕이기도 하다. 강제를 통해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가둬버리려는 우리 자신에게.


(p.s 줄기세포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이슈가 됐었다. 그와 관련된 샌델의 입장을 살펴보고 싶다면 '에필로그'를 참조하면 된다. 샌델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찬성하지만 인간 복제는 반대한다. 이는 배아의 '지위'에 관한 논쟁과 '(생명)존중과 사용'의 양립 논쟁이라는 굉장히 첨예한 문제를 관통하면서 내놓은 샌델의 주장이다. 나 역시 샌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지만 샌델이 말하는 줄기세포 사용의 '선'이라는 것이 지켜질 수 있는 정확한 경계선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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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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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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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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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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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5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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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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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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