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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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4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울력’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울력이 뭐지?’ 나는 입안에서 이 단어를 굴리고 굴렸는데, 생각보다 발음이 예쁜 것 같아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두레나 품앗이와는 달리 무보수로 어떤 집안의 어렵거나 힘든 일을 도와주는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라고 했다. 대가가 없다는 뜻이다. 무보수의 도움이라. 생활의 거의 모든 것에, 심지어는 이렇게 타이핑을 두드리는 1분 1초에도 대가가 부여되는 세계의 나로서는 ‘형이상학적 도덕’처럼 들린다.


  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즐비(櫛比)하다. 문자 그대로 “빗살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다. 도심은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복잡성의, 불투명의 공간이겠으나, 높은 곳에 올라 조망해보면 그야말로 즐비의 공간일 것이다. 그 즐비의 공간 사이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루를 돈 안 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음, 너무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돈에 대한 강박증을 느끼는 건 확실하다. 돈이 곧 자연과도 같은 시대이니까. 그런 까닭에 돈 없이 할 수 있는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우리는 왠지 모르겠지만 바코드 하나쯤은 안 붙어 있나 확인하곤 한다. ‘순수’라는 - 물론 ‘순수’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 전무하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 호숫가에 돈을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이 생기더니, 둘레길 주변으로 자판기가 들어온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울력할 수 있는 순간도 ‘즐비’하다. 어떤 건물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때, 혹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진 않나 쳐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문을 여는 아주 간단한 수고라도 덜어주고자 문을 잠시 잡아주는 것도 울력이다. (물론 냉방 중인 건물에서는 자제하는 것도 울력이겠다.) 초등학교에서는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길을 건너실 때, 옆에서 안전하게 도와드리라고 배우는데, 그것도 울력이다. 백지장을 나눠드는 것도, 에티켓도, 매너도 다 그렇다.


  이렇게 살펴보니, 울력은 다름 아닌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다. 영웅의식이나 어떤 비장한 헌신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소위 “짬날 때” 잠깐 거들어주는 것 정도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을 ‘구원’해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동체’라는 단어로 울력을 생각할 때마다 유독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나사렛의 예수이다. 나는 그를 믿는 가톨릭의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견진성사’라는 것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 예수는 신이나 신의 아들, 현전(現前) 같은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가르침을 펼치고 그것을 아주 비범하게도 직접 실천한 ‘스승’이다.


  내가 ‘울력’이라는 단어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예수이다. 그가 이 단어를 들으면 무릎을 치면서 자신이 설파하려고 했던 모든 바가 그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말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그럼 나는 우리말이 이 정도로 알차고 예쁘다고 자랑을 했을 것이고. 예수의 시대에 서남아시아(중동)은 여느 지역과 비슷하게 못 살고, 관리들이 부패를 저지르며, 수많은 교파들로 나뉘어 신의 뜻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릇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다. 예수가 돌연 나타나서 그 짧은 생애를 바치며 당대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헌신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성경』을 완독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리고 사실 『성경』이라는 것도 원전(原典)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텍스트이고, 그것이 정말 예수의 말이 맞는지도 꾸준히 의문거리였기 때문에, 내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 말할 수는 없다.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실 그를 따르는 무리에 섞이고 싶어 하겠지만 당시 예수를 비방하고 의심하던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마이크로 외치고 다니는 것이나, 왜 주말에 교회 안 다니냐고, 그 좋은 시간에 뭐하느냐고 비꼬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흘려듣는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예수의 말이 아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세계를 비판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예수가 재림한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알아볼까?


  이런 세상을 ‘눈먼 종교’라 아주 강하게, 적나라하게 비판한 인문학자 김경집이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책을 냈다. 마침 나는 서재에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A Devil's Chaplain)』, 샘 해리스의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The Moral Landscape)』,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Beyond Religion)』 등을 꽂아두고 어떤 책을 먼저 읽을지 가늠해보고 있는 차였다. 하지만 책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김경집의 것을 택했다. 독자는 자신이 평소 비판하고 싶어 했던 대상을 저자가 대신 정확한 근거와 신랄한 묘사로 비판해주면 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런 건 어떨까?


  “성탄절이 되면 우리 모두는 잠시 착각하는 것 같다. 마치 자신들이 동방박사들이나 목동들과 함께 혹은 그 곁에 있는 것처럼. 혹은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여관에 있었던, 방을 내주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여전히.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 정작 삶은 태연하게 예수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성탄절을 맞아 잠시 아기 예수 탄생의 축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잊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p.34)


  “복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니 내가 사랑을 실천할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갖추고 있느냐는 물음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만 전도의 측면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 가운데 하나다. 핵심은 전도의 열정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는 걸 망각했기 때문이다.(p.56)


  김경집은 『성경』의 여러 대목들을 요목조목 살펴보면서 신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속뜻을 인문학적인 견지에 맞춰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벗어나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참조하고, 얼핏 보면 좀 너무하다 싶을 예수의 행동을 다른 각도로 재조명하면서 예수가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를 짚어나가는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글을 지루하게 끌고 가거나 어려운 말을 쓰는 성격의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과의 비교나 『성경』의 예시 사이에 여러 일침들을 적어놓았다. 단어나 맥락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심어놓은 각주도 넓은 시야를 키우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심심하면 펼치는 종교 용어 문제,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용어 ‘분쟁’도 이 책에서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종교의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에게라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부류의 독자에 속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읽으면 이중의 반성을 하게 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첫 번째 반성은 기독교(가톨릭+프로테스탄트)계열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예수의 뜻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부분 중요하며, 그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일 것이다.


  두 번째 반성은 무작정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하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다. 병폐로 만연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종교로부터 엄청난 손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경우는 많지 않다. 종교가 사회의 여러 현상들과 하나로 섞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비판할 수 있는 ‘거리’에 놓인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비판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수고를 우리 역시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처럼 『성경』을 여러 번 고쳐 읽고, 자기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보며, 어떻게 해야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우리도 마땅히 고민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건 전문가들의 몫이지.”라고 둘러댈 뿐이었다. 왜 그것이 전문가들의 몫이 되어야 할까? 당위성이라도 있을까? 우리는 그 벽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높게 설정해놓은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교양으로 종교비교학에 대한 강의, 그리고 종교와 정치에 대한 강의를 인상 깊게 들은 후부터 여러 경전들을 나란히 놓고 그 오래된 뜻의 진의를 내가 한 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아마 평생을 읽어도 깨우치긴 어렵겠지만,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나의 서재에는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한 한 권짜리 간략한 입문서부터 시작해서 『성경』, 『꾸란』, 『우파니샤드』등 여러 경전,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책, 과학과 비교한 종교비판서(주로 도킨스와 비슷한 노선의 작가들), 작가가 쓴 종교 이야기(오정희의『이야기 성서』) 등이 꽂혀 있다. 그 외에도 종교는 주요 인문학 도서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비판할 거리를 찾았으면 그 쟁점을 이해하고, 경전 속의 진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적 제도나 (김경집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학적 프레임’ 같은 것은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방해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저자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을까.


  옛 사상들을 읽어보면, 큰 뜻은 깨우치기 어렵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 중에는 말이 너무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걸 도대체 어떻게 실천하며 살지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여러 번 읽어 외울 정도가 되고, 마치 어렸을 때부터 외웠던 기도문처럼 어디서든 암송할 수도 있으며, 머리로 완전히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그건 예수를 따르던 12사도들도 그러했다. 오직 예수만이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왜 그는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못했을까? 그는 어째서 욕심을 버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들을 버릴 수 있었을까?


  교회에 가서 목사와 함께 뛰며 노래를 부르거나 성당에 가서 신부가 주는 밀전병을 받아들고 예수의 몸이라 외우며 먹는 걸로 우리가 예수의 뜻을 따를 수는 없다. 그건 나쁘게 말하면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종교적 자위’일 것이고, 좋게 말하면 ‘정신적 위안’이다. 절차들이 우리를 어떤 신념 아래 참여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판의 견지를 갖고 있는 독자들의 생각처럼 저자 역시 종교의 병폐가 그런 곳에서부터 시작됐으며, “말뿐인 세상”으로는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라는 건 이룰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못 박는다.


  사실 실천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여러 경전들을 교차로 읽으며 할 수 있는 일은 생각이 여무는 시기라고들 하는 40~50대를 대비해 여러 큰 뜻들이 내 머리 안에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유연성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늘 강조해왔다. 그건 중국과 인도의 옛 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자꾸만 갇혀가고, 익숙한 것에 더욱 천착하기 때문에 신념도 신앙도, 혹은 좋은 뜻도 오래된 저수지의 고인 물처럼 썩어버리기 십상이다. 적어도 내가 여러 좋은 책들을 읽으며 알게 된 건 이런 것이다. 내가 물어볼 수만 있다면 예수도 내가 바라는 답을 들려줄 것이다. 예수에게 “저는 불경을 읽었습니다.”라든가, “저는 당신을 따르는 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저서들을 읽었는데, 아주 감명 깊더군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오늘날 일부 강경한 신자들이 펄쩍 뛰며 화를 내는 것처럼 반응할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할 것이다. 여러 뜻이 서로 통함을 그는 금방 간파했을 것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내가 본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문둥병에 걸린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나누고자 새로 임명된 이블린 백작(극중 올랜도 블룸)에게 “예루살렘은 만민을 환영하노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가톨릭 신자이든 모두 와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왕은 백작에게 종교를 구분하지 않은 용어로 “무력한 자(helpless)들을 도우라.”라고 말한다. 그건 대가가 없는 일이다. 백작은 평민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의 큰 ‘울력’의 뜻으로 모아 정말 왕이 부탁한 일을 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백작은 그렇게 했다. 마른 땅에 물을 내서(그는 기계에 능숙한 장인(匠人) 출신이다.) 사막을 개간하고, 기사의 뜻을 순수하게 지켜내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는 왕이 죽은 후,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는 새로운 왕의 왜곡된 뜻으로 인해 살라하딘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진 상황이 되자, 예루살렘의 백성을 지키고자 출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들을 기사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확실히 전쟁은 무자비했다.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고, 백작은 살라하딘과 서로 군사를 물리기로 결정(승리로만 따진다면 무슬림의 승리)한다. 서로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백작이 살라하딘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살라하딘은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기도 하지.”


  내 서재에는 사이먼 몬티피오리가 쓴 『예루살렘 전기』라는 제법 두꺼운 책이 있다. 아니, 사실 ‘엄청’ 두꺼워서 읽을 엄두를 지금까지도 못 내고 있는데, 목차를 보거나 빠르게 넘겨만 봐도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은 분쟁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역사가 아무리 왜곡하고 비틀려고 해도 지금까지 올곧게 전해지고 있는 한 사람의 큰 뜻이 더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 김경집이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거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건 아무래도 예수의 부활이다. 『성경』에는 예수 말고도 부활한 이가 몇 있지만 사실 급이 다르다. 그런데 예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이라든지 예수가 부활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거니와,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예수는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 몸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 부끄럽고 탐욕적이며 사악한 나, 실천하지 못하고 공염불만 되뇌는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는 것은 참 어렵다.(p.295)


  실천은 개인의 몫이지 남한테 전가할 몫이 아니다. “왜 너는 안 하냐?” 이게 아니라, “왜 나는 못 하는가?”를 거듭 물어보면서 나를 자꾸 큰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매일 같이 우리는 변덕쟁이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막 망가지고 싶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마치 현자가 된 것처럼 엄숙해지기도 한다. 뒤돌아보면 어린 애 같아 쑥스럽고 민망하기도 하다. 가끔은 하느님이든 염라대왕이든 어쨌든 내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심판을 받는다면 얼굴이 얼마나 빨개질까 공상의 염려도 해본다. 그러나 실천은 행동에 초점을 둔다. 안 하는 것보다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실천의 미덕인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근육’에 비유했던 것처럼 이런 미덕은 계속 해봐야 계발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끄럽지만 계속 해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이라도 자주 갖기 위해 큰 뜻을 담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 아니면 직접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긴 ‘천사’ 같은 사람들의 선행을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보는 것도 좋다.


  김경집은 예수의 뜻을 고쳐 생각해보면서 ‘신’의 영역에 올라가 있어 우리가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 뜻을 우리의 바로 옆으로 끌어내린다. 그 작업의 연속인 이 책에서 내가 유난히 자주 볼 수 있었던 표현은 “더불어.”였다. 바로 울력이다. 내가 인상 깊게 들은 종교 강의 중 하나에서 담당 교수(그녀는 여러 종교를 비교하는 개신교도였다.)가 재밌는 말을 해줬던 것이 지금 기억났다. ‘오병이어’는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교수가 하는 말이 정말 그랬겠냐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른이고 아이고 품안에 제 몫은 가지고 있었겠죠. 못 먹을 때였으니까. 먹고 살아야 하면 뭐든 못 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무리의 사람들에게 말했죠. 나눠야 한다. 함께 해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겠지만 아마 예수가 앞장서서 자신의 품에서 먹을 것을 뜯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줬을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했겠죠. 저 사람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네. 그래서 품에 있는 걸 주섬주섬 꺼내 머뭇거리며 주변에게 나눠줬고, 그렇게 했더니 품에 아무 것도 없는 배고픈 사람들까지도 넉넉하게 다 먹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물론 그녀의 ‘새빨간 추측’이다. 하지만 나는 그 훈훈한 ‘울력’의 광경을 상상해봤다. 진짜 기적은 예수가 마법사처럼 음식을 부풀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울력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방점은 ‘기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먹었다는 것에 찍어야 한다. 사실 이 정도로 울력의 힘은 대단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말씀에 이런 게 있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의 뜻은 말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할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이 땅에 ‘재림’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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