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07.15



  마약과 알코올 등에 중독된 산모에게서 태어난 기형 신생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마가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들어간 모습, 항문이 없는 모습, 손가락이 하나 적거나 엄지 바깥으로 하나 더 나 있는 모습, 노안(老顔), 꼽추, 조산된 미숙아보다도 훨씬 작은 모습. 내가 그들을 본 것은 중학생 때였다. 지금도 매해 열리는지 모르겠는데, 《인체신비전》은 어렸을 때만 해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친구들과 나는 여학생들의 비위에 거슬리도록, 아니면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객기를 부리며 해부된 시체들과 피부가 벗겨진 시체들로 즐비한 《인체신비전》의 팸플릿을 펼쳐든 채 교실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 가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생긴 시체들을 보며 낄낄거리던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그 무렵 삶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에 이상하리만치 동요되고 있었다. 현장학습이 효과를 본 극명한 사례라고나 할까. 또 하나 마음속에 확실한 진리처럼 다가온 것은 "나는 기형이 아니다."라는 안도감 섞인 구분이었다.


  불쾌한 콘텐츠들을 필터링(걸러주기)해주는 'safesearch' 기능을 잠시 꺼놓고 구글로 'malformation(기형)'을 검색해보면 보기에도 끔찍한 사진들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역겨움을 물리고 그러한 '운명'을 타고 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꺼내기 시작하면 나는 얼마나 다행인 삶을 살고 있으며, 저들은 얼마나 불쌍하기 짝이 없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의 부모님이 지금의 부모님이 아니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였을 가능성은 동일하다. 천문학적일 뿐이다. 삶의 시작은 어느 정도 결과론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채 태어난 까닭에 빛조차 보지 못하고 죽을, 혹은 태어나긴 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아이의 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제도가 있다면 기꺼이 지지를 보내주고자 할지도 모른다. 바버라 해리스의 프로젝트프리벤션이 그러한 비영리단체이다. 나는 그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아래에 사이트 소개란을 대충 번역해 놨다.


  "프로젝트프리벤션은 마약과 알코올, 혹은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여성과 남성들을 장기간 혹은 영구적으로 피임시킬 목적으로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 우리의 임무는 지속적으로 중독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우리의 제안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위탁을 제공하며, 그들이 임신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피임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탁 양육되는 아이들의 수를 낮추고 있으며, 매번 자신의 아이를 지우기만 할뿐인 출산으로 중독자들이 느낄 죄책감과 고통을 방지하고 있고, 의학적이거나 정서상의 문제없이 태어날 행운을 가진 아이라 할지라도 위탁 양육의 상황에 놓이면 종종 사랑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원하고 싶어 하는 평생의 갈망과 마주하는 까닭에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예방하고 있습니다.(Project Prevention offers cash incentives to women and men addicted to drugs and/or alcohol to use long term or permanent birth control. (……) Our mission is to continue to reach out to addicts offering referrals to drug treatment for those interested and to get them on birth control until they can care for the children they conceive. We are lowering the number of children added to foster care, preventing the addicts from the guilt and pain they feel each time they give birth only to have their child taken away, and preventing suffering of innocent children because even those fortunate enough to be born with no medical or emotional problems after placed in foster care face often a lifetime of longing to feel loved and wanted.)"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원제 : What Money Can't Buy)』에서 위의 사례를 언급한다. 우리의 감정적인 생각에 비추어 보자면 프로젝트프리벤션은 세계 각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위에 번역해놓은, 이 비영리단체의 취지만 읽어보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필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샌델에 따르면 프로젝트프리벤션은 여러 모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여성의 생식능력은 판매가능한가?"라는 매우 첨예한 질문이 놓여 있다. 종교적 의미, 혹은 도덕적 의미를 정치로부터 배제해서 미국 국민들의 개인적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지상주의가 지난 반세기동안 미국을 지배한 사상이었다. 그런 미국이 변화하고 있다는, 즉 새로운 사상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의 대표작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며, 자신이 아닌 누군가(혹은 무엇이)가 도움을 줬으면 한다. 될 수 있으면 그 누군가는 큰 단체, 그것도 아주 커서 공신력을 가진 단체여야 사람들의 성에 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샌델이 제시한 '공동체'라는 개념이었다. 그곳에서는 토론을 해야 한다. 계속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그로부터 의미를 도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시장논리에 너무나도 깊게 빠져 있기 때문에 '값'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고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길 거부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샌델은 값[돈]으로 판단 할 수 없는[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권유한다. 이것이 내가 이 자리에서 리뷰하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가장 큰 틀이다. 기본 질문은 이렇다. "과연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시장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p.80)"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사람은 샌델이 공적 담론에 도덕적 신념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중심적 사고의 영향력과 권위, 그리고 2008 금융위기 때에도 그러했듯이 정부의 대응능력 부재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증오와 공허감 같은 것들이 신념의 생명력을 깎는 중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자 한다면 우선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서문으로 시작해 제 1장부터 제 5장까지 샌델이 엄선한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대부분 찬반의 극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문제점들을 담고 있다. 샌델은 보통 사회적 문제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사례들을 그 나름 판단한 강도의 순서대로 늘여놓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제 1장 '새치기(Jumping the Queue)'에서는 추가비용을 받고 빠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 즉 재화지불능력과 재화가치평가 정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성립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져본다. 암표를 예를 들어보면, 그레고리 맨큐는 "암표 거래가 바로 시장이 효율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예."라고 하고, 판매 반대의 입장에서는 공정성, 공공자원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 신성성 등을 근거로 든다. 재화가 공공성을 강하게 띠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시장의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샌델이 제시한 도덕적 관념의 기준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훨씬 더 고민하게 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샌델의 사례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고찰을 요구한다. 제 2장은 인센티브에 관한 내용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앞서 이 졸문을 열며 내가 예로 든 불임시술 프로젝트이다. 해리스의 입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중독의 영향력을 타인(주로 곧 출산할 자녀나 성장 중인 자녀)에게 넘겨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불임시술 프로젝트를 보면 한편으로는 강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뇌물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선 '강압'이라는 개념에서 어떤 물리적인 뉘앙스를 지워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강압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의 조건을 의미한다. 근로자가 싼 값에 일하기로 회사 측과 정식적으로 계약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면 계약에서 유리한 쪽은 아무래도 회사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마약중독자들은 대체로 사회적 빈곤층에 해당한다. 때문에 불임시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가로 돈이 지불된다면 출산 여부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돈 때문에 '끌리는' 수가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강압'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의 유의사항은 '뇌물'에 대한 이해인데, 여기서 말하는 뇌물은 광범위한 개념의 부패행위로 (그것은 재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어떤 대상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즉 도덕적으로 낮은 차원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임시술 프로젝트로 인해 떨어진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여성의 생식능력이다.


  이렇게 도덕적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며 반대를 해도 사실 어디까지가 강압이고, 뇌물에 해당하는 행동은 어느 선까지인가를 우리는 또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우리가 수요와 공급만으로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경제학에 기대어 고찰의 기회를 놓치는 건 뼈아픈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샌델이 우리에게 함께 떠맡자고 제안한 부담의 실체인 것이다. "비시장 규범의 지배를 받는 사회적 관행에 가격효과원칙이 적용될 때에는 신뢰성이 떨어진다.(p.130)"면서 샌델은 인센티브가 문자 그대로의 효율을 보장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학점 A를 받으면 돈을 주겠다는 인센티브에 대한 결과도 들쑥날쑥하고, 그가 이스라엘 어린이집을 예로 든 것도 그러하다. 내재적 장점이, 그러니까 우리가 주로 선(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장점이 인센티브 없이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데도 인센티브가 특정 행동에 지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샌델은 이런 식으로 자녀출산권, 탄소배출권, 탄소상쇄정책, 야생동물(검은코뿔소, 바다코끼리 등)사냥권 등을 사례로 소개한다. (인센티브에 관해 읽을 때에는 도덕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처벌인 벌금과 도덕이 배제된 가격인 요금을 구분한 샌델의 설명도 참조해야 한다.)


  샌델도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인데,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 3장에 소개된 몇몇 사례들을 읽으면서 몇몇 경제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미덕'을 시장이 어떤 식으로 잠식해가고 있는지가 설명되는데, 사실 시장논리나 도덕적 관념을 배제한 채 우리는 미덕에 입각해서 과연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선물만 해도 그렇다. 마음이 진정한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추석 때만 되면 어떤 선물을 줘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하게 그냥 돈을 봉투에 넣어 준다.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현금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싶다는 사람(Alex Tabarrok)이 있지만 그 '사실'은 이미 우리의 생활이 된지 오래다. 샌델은 이렇게 미덕이 변형되어 우리가 미덕마저 구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입한 미덕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까? 샌델은 돈을 주고 산 졸업장의 명예는 보트를 산 뒤 얻게 되는 만족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신랄하게 비꼰다.


  샌델은 시장논리에 대한 가치 '수호'의 입장에 서서 주로 공정성과 부패를 그 근거로 드는데, 내가 읽은 경험에서 보자면 샌델은 공정성보다는 부패 쪽의 입장인 것 같다. 그는 미덕, 공공재화 등의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되는 것을 강조하며, 그런 강조를 위해 반대의 사례들을 여러 개 언급한다. 재화가 시민의 미덕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스위스 핵폐기물 처리장 찬반 논란의 사례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샌델은 두 학자(Bruno S. Frey, Felix Oberholzer-Gee)의 말을 인용해 "재정적 인센티브를 도입하면 시민의 의무의식이 밀려나는 경향이 나타"난다면서 그 까닭을 "좋은 행동을 한 대가로 보상금을 주는 것이 그 행동의 특징을 바꾸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쉽게 말해 마음속의 동기와 돈이 주는 동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 중에서는 시장 논리로 미덕을 아낄 수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유명 인사들이 꽤 있나 보다. 샌델이 대표적인 예를 세 개 적어놨는데,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다.


  가령 한 학자(Kenneth Arrow)는 이타적 미덕이 희귀하기 때문에 많이 쓰면 고갈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Sir. Dennis H. Robertson)는 '사랑의 경제학(Economizing Love)'이라는 개념을 통해 경제학이 사랑의 고갈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으며, 다른 학자(Lawrence Summers)는 "이타심을 아껴둠으로써 보존하는 것이 훨씬 낫다.(p.179)"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세계 경제학에 큰 영향을 끼친 명사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덕을 '갈고 닦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끼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p.180)"라고 한 샌델의 말이 옳다.


  제 4장에는 '데스풀(Death Pools)'이라는 소제목을 달아도 괜찮을 것 같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시장 논리가 행한 여러 가지 사례들이 언급되는데, 도박과 보험 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가 샌델이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쟁점이다. Death Pools는 문자 그대로 '죽음 도박'이다. 샌델의 어조는 이 장에서 더욱 단호해진다. 우리는 '생사의 갈림길'이라는 말을 쓰며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다. 죽음도 사고 팔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을 시기적으로 예측해서 도박을 할 수 있고(이것이 바로 '데스풀'이라는 도박), 임직원의 죽음을 통해서 기업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으며(기업 소유의 생명보험. '청소부 보험(janitors insurance)'이라고 한다.), 말기환금에 투자했다가 상대방이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중개인을 고소할 수도 있다. "오늘날 삶과 죽음을 거래하는 시장은 한때 이를 억제했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목적을 앞질렀다.(p.206)" 박대성의 『미네르바의 경제전쟁(2011)』에 따르면 우리나라 생명보험 규모는 920억 달러로 세계 10위권에 해당한다. 도박과 보험의 거리는 의외로 가깝다. 도박은 누군가가 일찍 죽었으면 하는 거고, 보험은 보험가입자가 오래 살수록 이득인 것이다. 이 보험을 팔 수 있는 전매사업도 생명을 판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아니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장관행은 "윤리적 민감성이 무뎌질 가능성(p.196)"을 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마지막 장은 명명권(Naming Rights)에 대한 것으로 2~4장에서 뜨겁게 달궈졌던 고찰의 온도를 조금 식혀주는, 어찌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다. 야구팬인 자신의 이력을 설명해주는 부분부터도, 아마 야구팬이 많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많은 어필을 할 것이다. 대신 나는 축구팬이기 때문에 예를 조금 바꿔서 명명권의 사례를 몇 가지 들어야겠다.


  우리나라의 이청용 선수가 뛰는 볼튼 원더러스는 1989년부터 작년까지 스포츠용품 회사인 리복(Reebok)의 후원을 받았다. (올 시즌부터는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는다.) 리복은 볼튼 원더러스와 모범적인 후원 사례를 남겨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1997년에는 볼튼 경기장의 명명권을 사서 그 이름을 '리복 스타디움(Reebok Stadium)'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고 만 아스널은 과거의 영광을 옛 구장 하이버리에 남겨두고 신축 경기장을 2006년에 완공했다. 이 경기장을 산 회사는 에미레이트(Emirates) 항공. 그들은 서남아시아(중동)의 엄청난 자금(1억 파운드)을 투자해 2004년 10월 5일 명명권을 사는데 성공, 현재 아스널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에서 홈경기를 갖는다. (하지만 이 명명권은 UEFA가 주최하는 국제대회에까지 효력을 미치지는 않는다.) 런던의 명소 테이트 모던을 건축한 헤르초그&드 뫼롱(Herzog & de Meuron) 건축사는 아마 건축도에게는 유명할 스위스 회사인데, 이 회사가 만든 또 하나의 랜드마크로 알리안츠 아레나(Alianz Arena)가 있다. 독일에서는 그 외양 때문에 '고무보트(Schlauchboot)'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경기장은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를 꺾고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석권해 세계 축구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재고하게 한 바이에른 뮌헨과 그들의 (규모 상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라이벌인 1860 뮌헨이 같이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알리안츠 아레나는 건물을 둘러싼 외벽의 색깔이 빨간색(바이에른 뮌헨)과 하늘색(1860 뮌헨)으로 바뀌는 놀라운 건물이다. '알리안츠 아레나'는 물론 알리안츠 회사가 명명권을 사서 붙은 이름인데, 2005년 시즌부터 시작해서 30년을 쓰기로 계약했다. (비슷한 예로 박지성과 이영표가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몸담았던 PSV 아인트호벤은 필립스 스타디온(Philips Stadion)을 홈구장으로 쓴다. '필립스'라는 이름으로 명명권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사실 이 경기장은 애당초 네덜란드 회사 필립스가 노동자들을 위해 1910년에 건설한 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요즘 재벌 회사들이 투자를 목적으로 명명권을 사고파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하겠다.)


  명명권과 머니볼, 스카이박스, 홈 슬라이딩 후원 등을 보면 구단주와 이사 등 구단의 수뇌부들이 점점 커가는 스포츠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비싼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하고, 홈팬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경기장 입장료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재벌들의 구단 운영 개입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미국의 스포츠 재벌 말콤 글레이저의 가문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했을 때 맨체스터 거리에서 일어난 엄청난 시위를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 중에서는 시민구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FC 유나이티드 맨체스터'라는 팀이 하부리그에서부터 천천히 승격 중이라는 사실을 가슴 벅차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와 경기장이라는 가치는 시장논리 외에 우리의 사회적 결속, 시민적 감성 등에 호소하는바 역시 크다. 때문에 이 분야에 지나치게 상업의 개입이 커지면 그 가치는 손실되기 십상이다.


  이런 시장의 개입이 시(市)운영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때는 어떤 반응이 가능할까? 뉴욕의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스내플(Snapple)과 계약을 체결했을 때, "비판가들은 빅 애플(Big Apple - 뉴욕 애칭)이 '빅 스내플(Big Snapple)'이 되려고 도시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말했다.(p.260)"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사례들을 하나로 묶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p.247)"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판단의 중간에 서서 양쪽 모두를 생각하라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속뜻은 시장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판단의 중간으로 움직이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다.


  제대로 된 인문학은 판단을 각자의 몫으로 남기지 않는다. 그건 방기이다. 경제학의 부흥과 함께 대두된 자유지상주의나 그런 식으로 개인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존중할 뿐이다. 우리는 함께 질문을 던지고 공동의 절충안을 찾으며, 가치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판단은 토론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도출해낸 샌델의 궁극적인 교훈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시민적 역량'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점검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조언처럼 해결은 공통된 문제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뒷부분에 따로 마련된 각주가 많다. 그 뒤에 김선욱 교수의 해제가 실려 있는데, 샌델에 대한 여론의 오해를 갖고 있다면 그것도 풀 겸, 그리고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정확하게 짚어낼 겸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보다도, 사실 간단한 말이지만 'the good'을 선(善)으로도 재화(財貨)로도 번역할 수 있음을 지적해 독자들의 확장된 독서를 권장하는 김선욱 교수의 지적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7-19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1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