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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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0



  독자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짚어내는 육감이라고 할까. 아쉽게도 이 놀라운 능력으로도 작가의 깊은 생각을 정확히 꿰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책을 잡는 순간 손으로 느껴지는 표지의 재질, 번역되거나 번역되지 않은 제목, 서문의 첫 마디, 책의 두께,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프로필이나 작가의 사진 등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융화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우리는 이렇게 돌려 말하곤 한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가?" 둘은 결국 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의 관심사에서 빗겨나간 것 같은 책을 귀신 같이 솎아 내곤 하지 않는가.


  나와 같이 인문학(최근 국내에 『인문학의 미래(원제 : The Future of the Humanities)』로 소개된 영미권의 저명한 인문주의자 월터 카우프만의 분류에 따르면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이렇게 여섯 분야가 인문학에 포함된다.)에 발의 팔 할 이상을 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책을 고르는 직감은 꼭 필요한 능력임을 넘어서서 일종의 미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책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얻는지는 더 이상 이 직감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인문학은 직감(과 영감)의 영향을 상당히 받으면서도, 그 안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학과는 또 다른 예리함과 질서정연함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명확한 해결책 없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며 매 순간마다 대안을 제시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이 쉽게 다루기 어려운 분야로 남아 있다.


  하기야 인간과 인간사와 삶을, 그 자체로도 정의하기 힘든 그것들을 퍼즐 조각 맞추는 것처럼 딱딱 눈에 들어오게끔 파악하고자 하는 것, 그건 치기 어린 욕심일 뿐이다. 그런 욕심은 감상적으로 끝나곤 한다. 건설적인 인문학은 우리에게 여러 의미를 제시한다. 한 두 개로 끝나지 않는 의미의 열거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우리를 권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고민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지는 호기, 뇌의 튼튼한 벽, 그리고 '오래 가는 건전지'를 장착한 감성이 필요하다. 우스갯소리였으나, 실제로 인문학은 우리의 정주(定住)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노마드(nomad, 유랑자, 유목민)'의 개념을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방랑, 유랑, 혹은 여행. 어쨌든 움직여야 하는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에 있어 우리는 지도를 그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예견하며, 기준과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지도가 정말이지 눈에 아주 잘 들어오도록 방에 걸어두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한 작가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도시들이 그려진, 그러니까 존재했는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전혀 없는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누가 그것을 들여다볼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하나 둘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 싶을 때 그 지도를 몰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지도에서 그들이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더 의미 있는 도시를 찾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눈에 보이는 도시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 중 한 명인 나의 이야기를 이제 써보려고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에 대한 사변이다.




*     *     *



  이 소설은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만 이뤄져 있다. (사실 이따금 칼비노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도 하나, 매우 드물다.) 대륙을 다스린 쿠빌라이 칸과 대륙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 황제는 이 베네치아의 젊은이보다 어림잡아도 마흔 해를 더 산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이 저물어가는 시기, 그리고 그의 제국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에 젊은 베네치아인은 (연대상으로도 뒤죽박죽인) 이상하고도 기이한 도시들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게 된다. 그의 보고는 일반 사신들이 황제를 알현하며 쏟아놓는 사무적이고 원칙적인 보고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의 보고는 문학적이며,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감상적이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도시의 실존 여부를 차치하고 오로지 폴로가 소개하는 도시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든다. 칼비노는 폴로의 입을 빌려 총 55개의 도시(여기에 각 장(章)을 열고 닫는 황제와 폴로의 대화록들에 등장하는 유일한 도시, 즉 달이 쉬어가는 도시 '랄라제'를 포함하면 56개)들을 그려낸다. 이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섬세함', '교환', '눈', '이름', '사자(死者)', '하늘', '지속', '숨겨짐'이라는 큰 의미망에 각각 속해 있다. 도시의 이름이 너무 많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책을 덮었을 때 남는 것은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로, 혹은 전체로 뒤섞여 의미가 희뿌옇게 남은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도를 그려보고자 했다. 도시의 이름을 적고, 그 도시를 설명하는 폴로의 말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생각된 것들을 밑에 길게 적었다. 칼비노가 특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유난히 길게 썼거나, 어떤 의미에 대해 반복적으로 묘사(집착)하고 있다고 느껴진 것들은 '※'로 따로 적어두었다. 이렇게 A4용지 8장의 짤막한 정리본을 만들고, 그 위에 펜으로 이것저것을 연결하거나 덧붙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의 끝을 보려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완독했을 때, 결코 "완독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았고,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읽었다고도 할 수 있고, 읽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삶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는 것과 그 무엇이 같지 않단 말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한글로 번역해도 본문이 200페이지가 겨우 넘을 정도의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칼비노가 그의 문학적 성숙기에 일기처럼, 그리고 시처럼 남긴 단편들을 조합해 펴낸 책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을, 수많은 나의 오만들 앞에서 선언해야 했다. 동의하겠지만, 마음이 아픈 와중에 실패를 시인한다는 건 적잖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아픔으로부터 나는 또 한 번 '인문학적 치유'를 실감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칼비노가 이 책을 쓰고 난 뒤, 그렇게 희뿌연 연기처럼 남아버린 이 작품의 수많은 의미들을 과연 하나로 꿰찼을까? "유레카!"를 외쳤을까? 알았다면 그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는 분리된 채 그 문장, 혹은 문장 몇 개만으로도 충분히 아포리아로 기능할 수 있는, 두 번 세 번 고쳐 읽어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장들이 널려 있다. 몇 개 예를 들어볼까? 이런 것들은 어떤가?


  "모든 도시들은 그것이 마주 보고 있는 사막으로부터 자신의 형태를 부여받습니다.(p.27)"

  "여행자는 나무와 돌들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걷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p.21)"

  "거짓은 말이 아니라 사물 속에 있습니다.(p.79)"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

  "사람들이 말하는 도시는 존재에 필요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도시 자리에 존재하는 도시는 존재감이 그다지 없습니다.(p.87)"

  "살다 보면 자기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가운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날이 찾아오게 돼. 그러면 마음은 다른 얼굴, 다른 표정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옛 형상을 새기고 각 얼굴에 가장 적당한 가면을 찾게 되지.(p.122)"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p.40)"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 탐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아직은 언뜻언뜻 보이는 행복의 흔적들을 자세히 찾아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p.76)"


  이렇게 진리로 구성된 예시들을 독서 노트의 구석에 깨알 같이 적어놓으면 밥 한 술 덜 먹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포만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포만감은 가짜다. 우리의 (정신적) 위(胃)에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소화될 수 있을까? 위액이 식도로 역류할 정도로 굶주린 상태에서, 그것이 일종의 끓어오르는 열정 따위가 아닐까 착각하며 자신의 주린 배를 도도하게 쓰다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도대체 칼비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폴로와 칸의 의미심장한 대화들,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스마트폰 배경에 넣어 매일 확인하고 싶은 매력적인 아포리아들 사이로 나 있는 단 하나의 뾰족한 바늘을, 나는 진심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에 찔려 나의 공복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려줄 한 줄기의 피가 나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면 했다. 이 출혈의 아픔이 나를 진리의 숲 속에서 탈출시켜 숲 바깥의 냉정한 응시자로 만들어줬으면 했다. 나는 A4용지 여러 장에 문자로 적어놓은 내 지도를 바라보다가 그 바늘 하나를 발견했다. 발견의 기쁨이 우선 찾아왔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나를 이 책을 읽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놨다. 나는 지도를 한 바퀴 돈 셈이었다. 유랑과 방랑과 여행과, 여하튼 그런 '이동'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하듯. 조금 긴 칼비노의 문장이다. 나처럼 천천히 곱씹어보길 바란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p.129)"


  칸과 폴로의 대화가 전부인 줄 알았을 독자들은 '당신'이라는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충격을 느끼게 된다. 칼비노가 각 장(章)을 열고 닫기 위해 마련한 앞뒤 공간의 글에서 유일하게 '당신'이라며 독자들을 겨냥한 부분이 이곳이다. 아, 그리고 그 앞 문장의 이 단어, '뒤범벅'이 갖고 있는 혼탁함, 무질서, 무기력, 불가피 등등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져버리는가 말이다. 결국에는 '불완전'이었다. 그리고 '지옥'이었다. 내가 칼비노에게 직감적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완전의 추구, 유토피아의 바람과 같은 오만방자한 요구를 현명한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직시하도록 한다. 안개이다. 지옥이다. 뒤범벅이다. 혼탁함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 선택뿐이다. 칼비노는 말한다. 지옥의 일부분이 되어라. 그렇게 하기 싫다면, 조금의 용기를 더 내어서 "지옥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p.208)"하라. 그렇다면 그 눈은, 지옥이 아닌 것을 감별해낼 수 있는 눈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제목도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데, 도대체 폴로는 그것들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칸은 폴로에게 이상향으로 가는 항로를 아느냐고 묻는다. 폴로는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있다며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나머지 것들과 뒤섞인 단편들,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는 순간들, 누군가 보내지만 그걸 받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호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도시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춰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부적절한 풍경의 한가운데로 나 있는 지름길, 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햇빛,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면 충분합니다.(p.207)"


  무엇 하나 '완벽'이라는 꼬리표를 단 것이 없다. 의심스러울 만치 불완전한 것들이며, 별로 신뢰를 주기 힘든 것들이다. 지름길이 항상 대로(大路)와 대로 사이로 나 있어 우리를 빨리 이동시킬 거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지름길은 또 다른 샛길과 연결되어 있기 십상이므로 우리는 목적지를 잃고 지름길들의 거미줄 속에서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 속의 햇빛은 어떤가? 광자(光子)를 분산시키는 안개의 작은 입자들은 빛에 대한 불확실성, 혹은 빛을 내거나 빛이 비추고 있는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는 전문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거면 충분하다고 칼비노는 말한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끝에 가서 만나게 될 것"이 바로 뒤범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결국 불완전을 주시하고, 불완전을 상기하며, 그것을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가 야기하고 겪게 될 수많은 문제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한 편의 인생이 연극된 극장에서 막이 내려갈 즈음, 우리가 서글퍼 울지 않고 연극의 주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세상을 한 바퀴 돌았다고, 지도의 모든 도시를 알 것 같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여정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을 때, 생각해보니 나는 아주 슬펐던 것 같다. 오후 내내 그랬다. 하지만 한창 감정이 고조될 이 새벽에, 나는 얼핏 보면 칠흑 같으나 실은 완전히 어둡진 않은 밤의 미숙한 암흑을 보며 불완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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