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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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우리에게는 한 가지 슬픔이 있다. 기계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는, 즉 불가항력의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라는 태생적 슬픔이다. 그러나 이 슬픔은 하루도 빠짐없이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가 슬픔의 편에 서 있을 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낄 때, 슬픔과 행복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너는 위선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어 라다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라다크 사람들은 우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들도 맥도날드를 먹고, 나이키를 입는다. 우리 중 일부가 “그래봤자 소용없어요!”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 중 나이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옛 삶을, 당신들은 그토록 그리워하는 거지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얻어진 셈인데, 중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도 그거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커피숍에 앉아 소로의 『월든』을 읽는 현대인이다. 커피숍에 앉아있기만 하면 『월든』쪽으로, 그리하여 중간으로 걸어가 서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건 반대편에 있다. 한 쪽 사이드에서만 공을 돌리다보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축구팬들은 알 것이다. 이때, 시야가 넓은 선수[현명한 저자]는 반대편에 있는 동료[독자]에게 정확한 롱패스[저서]를 보내준다. 또 다른 수[진리]가 생기고, 상대편[우리의 폐습]은 다시 수비전형을 갖춰야 하는 번거로움에 빠진다. 골[삶의 목표]을 넣으려면 되도록 경기장을 크게[여러 저자들의 비판을 수렴해] 써야 한다.


  읽는 이에게는 미안할 정도로 식상한 비유였나?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긴장하고, 시야가 좁아지며,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결국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 때 즈음 되면 골을 넣는 것, 이기는 것, 페어플레이 하는 것, 어느 것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아주 고통스럽다는 것만 느낀다. 누구든 이런 삶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편을 바라보는 책은, 그래서 읽어야 한다.


  반대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추천한다. 앞만 보고 달리거나, 개인기술을 남발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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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끄러운 세계의 반대편에는 침묵의 세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다 건너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우리, 그리고 세계의 깊은 곳까지 침전하려는 노력과 탁월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막스는 문학과 에세이, 인문학적 진단, 철학, 종교(그리스도교), 신화, 역사의 경계를 ‘침묵’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붕괴시켜버린다. 막스에게 유일한 경계가 있다면, 그건 침묵의 세계와 시끄러운 세계(‘잡음어’와 ‘라디오’, ‘소음’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세계)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이다. 우리는 그가 말한 침묵의 세계에서 이미 한참을 벗어난 우리 조상들의 후손이다. “좁힐 수 없다.”는 건 우리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막스의 글에 적응하는 어려운 과정을 잘 치렀다면 독자들은 한없이 슬퍼지는 독서의 연속을 견뎌야만 한다. 침묵의 세계는 막스의 뛰어난 비유와 문학적 묘사로도 도무지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허상을 보는 것일까? 침묵의 세계의 실존을 추적하겠다고 책의 문두에서 막스는 선언했지만 도대체 어떤 모습이 우리 앞에 그려지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면서 부재, 결핍, 상실 등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것이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쓰레기통에 아무렇지 않게 버렸고, 혹은 강탈당했으며, 그리하여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설명이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갖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때문에 막스가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방법 자체가 실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나는 과학을 존중하고, 과학적 이론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존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굳이 실증적 자료들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는 걸, ‘비과학의 영역’에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한 권의 경전과도 감히 비교할 수 있다.


  종교 경전들의 특징은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는 것에 있다. 막스가 ‘고대의 언어’라고 해서 특별히 고찰한 부분에서도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말 자체가 자세하지 않아 그 자체로 말 이면의 세계와 아주 면밀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 그 말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가리킴, 즉 지칭의 명백한 능력은 사물 자체를 말 안의 개념 속에 종속시켜버린다. 이러한 말에는 무한의 가능성도, 충분한 공간도, 포괄성도 없다. 현대인들이 에둘러 말하는 걸, 뭉뚱그려 묘사하는 걸 옛날의 유행이나 고리타분한 것 따위로 대부분 치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무한의 가능성, 충분한 공간, 그리고 포괄성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 사실 막스도 이 단어를 쓰는데 있어 상황마다 차이가 있다는 걸 굳이 주지시킨 적은 없는데 - ‘말’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부정적 이미지를 갖진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막스에게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했었다. 시끄러운 세계와 침묵의 세계. 그렇다면 말 역시 각각의 세계에서 존재할 것이다. 막스가 사용하는 ‘말’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시끄러움 속에서 나와 기계적이며 수평적인, 그래서 틀에 박힌 “고아의 말(waisensprache)”인 경우가 있고, 반대의 경우에 ‘말’은 아기, 노인, 시인, 농부 등이 사용하는 “침묵으로부터 출발한 말”, 그래서 야성적인 침묵을 인간 안의 침묵으로 ‘능동적’으로 바꿔주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전자, 즉 ‘고아의 말’이다. 그러나 시원(始原)에는 말이 침묵으로부터 나왔다. 막스는 그것을 수직적 관계로 설명한다. 침묵에서 거침없이 뛰어 올랐으나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 태양의 홍염(prominence)과도 같다. 거대한 백열가스인 홍염은 태양의 표면에서 솟아올랐으나 다시 표면으로 둥글게 내려오는 고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지구가 여러 개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크다. 옛 침묵과 말의 관계는 이러했을 것이다. 크고, 넓었을 것이다. 막스에 따르면 침묵에서 떠오른 말은 삶과 부활을, 다시 침묵으로 떨어지는 말은 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천체의 운행과 진리 사이에는 어떤 겉보기의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성스러움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도, 동시에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도 막스가 들려주는 침묵의 모호한 정체는 신적인 것과 닮아 있다. 실제로 막스는 침묵이 말로 변환되는 과정에는 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그렇게 변환된 말 중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소음에서 태어난 말”과는 다른 말의 예로 ‘복음’을 든다. 종교에 적(籍)을 뒀으나 무신론자인 나에게 침묵의 세계를 ‘신’과 몇 차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막스의 시도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했을까? (나는 “종교적 해석?”이라고 이면지에 수차례 적어놨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과학적 반박을 포기한 상태였다. 막스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현대문명, “잡음어”와 “라디오”로 묘사된 우리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옛 사람들은 말을 통해 막스가 ‘짐승의 단계’라 했던 형상과 상징에서 벗어나 그것의 지배자가 된다. 여기서 나는 괴테의 인용문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음의 저 낮은 곳까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구절을 여기에 옮겨본다.


  “인간의 외면(인간의 형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은 그 내부를 위해서 비상하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124쪽)


  물질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말과 마주 선 채 형상으로부터 독립하여 풍요한 침묵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것이 막스의 해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얼굴에는 자연의 침묵이 새겨져 있다. 흔히 산사람은 산처럼 생겼고, 어부는 바다처럼 생겼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그렇다. “풍경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자기 자신의 유적을 가지고 있고(121쪽)”라는 막스의 기막힌 문장은 인간의 얼굴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옛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얼굴을 고치면서 외면의 성장을 도모하기도 하고,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자리 잡아 볼품없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차라리 응고되어 있는 동물들의 고독한 침묵보다도 못하다. 이것의 모든 원인은 잡음어에 있다. 막스가 ‘잡음어’에 어떤 묘사들을 붙여놨는지 열거해보면 그 정체가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세포분열, 양적증가, 말의 망령들이 주고받는 말, 사이비 말, 죽은 말, 허술한, 구멍이 뚫린, 악마적인, 불확실한, 무책임한, 말의 파괴, 동물적, 배설, 비현실적, 위험한, 무절제의.


  그 위에 터를 잡은 라디오의 세계는 - 이걸 인터넷, TV 등 타매체의 총제적인 상징으로 봐도 무관하다 -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변조시키고, 인간의 현존성을 완전히 강탈해버리는 중이다. 세상은 이제 순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짧은 템포를 지니게 되었다. 잡음어가 수평적인 말을 통해 개별성을 죽이고 모두를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소리 큰 이가 이기는 세계가 되었다. 평등의 군중과 목소리 큰 독재가가 교묘한 짝을 이뤘다. 제 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일어났다.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정치는 쇠퇴하고, 사건은 망각된다. 창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정신병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윽고 절망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저절로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이비 연속성 속에서 인간은 모든 본질적인 것이 어떤 특별한 한정된 행위에 대해서, 어떤 창조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유 의지적인 요소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의 구제불능적인 점이다.(239쪽)


  이런 세계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부터도 이탈되었다. 막스는 “나는 생각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침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수도원의 밀실에만 존재한다는 비유로 마지막 비판의 일격을 가한다.


  나는 얼마 전 한 글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임을 그리다 돌이 될 정도의 지극정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향수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순환이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스에게서 어떤 희망을, 그 수많은 비판 속에서 어떠한 긍정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대목은 짧으나 강렬하다. 침묵이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얻거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확신이다. 소음이 제 뿔에 지쳐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상. 그래서 막스는 그 빈 공간에 침묵이 깃들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멸망 후 찾아오는 ‘인간 없는 세상’의 원초적 침묵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책 커버에는 유명한 릴케가 막스를 소개한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의 고뇌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사변이 단순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개똥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의 깊이를 체험해볼 것을 권한다. 항간의 대중들이 자기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 물론 그들은 그들의 생리대로 부인하겠지만 - 궁극의 가치와 의미들은 막스와 같은 ‘고뇌하고 쓰는 자’들이 보존한다. 우리는 우주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대중문화 상에서만 통한다. 우리가 찾는 우주는 그곳에 없다.

 

 

 

p.s 이번 방학의 마지막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작년 12월 말이었다. 오래토록 나를 괴롭혔던 책이니만큼 훗날 여러 번 읽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나 세계를 이해했는가를 가늠할 척도로 나는 이 책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 없는 이들은 읽지 말고, 주저하는 이들은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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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