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2.04

 

 

  운동이 끝나고 아버지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폭설의 전조가 화려하게 시작됐다. 경기 북부에 한하던 대설주의보가 이곳 일산에도 곧 내려질 것이라고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날씨였다. 교통정체와 각종 접촉사고 관련보도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설 속보들 사이로 전해진 뉴스 하나에 나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부모를 죽이고, 새벽에 들어와 형까지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피해자에게도 처지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보험금을 꼭 당장 손에 쥐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사정으로, 그러나 사람이 여럿 죽었고, 도덕의 가치는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사실 그에게 사정을 물을 것도 없다. 나는 이런 비극적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그 고리타분하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린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 우리의 일상이 그의 명령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상황은 존재한다. 명령은 주관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적용되고, 우리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도덕적 상황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를 좋아한다. 근래 겪어보고 들어본 바를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주관적 상황에 대한 옹호가 자기변호로 곧잘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주의가 발현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다채로운 가치들에게 저마다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환경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활용해서 무관심 속, 혹은 수면 아래의 가치들을 끌어올려 대중들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양한 직종이나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다원주의를 구축하는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두 말 할 것 없이 이는 열린사회와 발전을 위한 청신호이다.


  그러나 상대주의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칸트와 롤스의 편이다.) 특히 도덕의 영역이 그러하다. 도덕적 판단을 개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낮은 도덕을 가진 자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이만큼 위험한 모험도 없다. 도덕적 판단은 전통과 공론 상의 토론 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형성된 고귀한 도덕적 가치로부터 어느 정도 견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개인에게 이러한 숙고의 시간을 주지 않는 분위기가 장시간 이어진다면 도덕적 해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


  “왜 도덕인가?”


  도덕의 든든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에게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부모가 아이의 도덕 교육에 열의를 다하지 않으면 아이는 사회의 도덕을 등진 채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어른에 대한 공경, 약자에 대한 배려, 질서를 위한 양보, 공동체적 가치를 위한 헌신 등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회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권리를 무시할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변덕에 당황하게 된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원제 : Why Morality)』는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철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발전되어 왔는지, 그 반대편의 논지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들로 풀어 설명한 철학·윤리 명저 중 하나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라 표기)』와 같은 선상에 있는 책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논평과 보도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정의』에 있는 주장과 사례들이 거의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기도 한데, 두 책을 병행해서 읽거나 순차를 두고 읽는 것은 도덕의 쟁점들을 학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샌델의 정치철학은 미국 정치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당연한 배경이다. 우리의 고민은 그들의 것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키려는 응용이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제 1장은 경제, 사회, 교육, 종교, 그리고 정치의 영역으로 나눠 그것들과 도덕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샌델은 방대한 양의 사례들을 이곳에서 제시한다. 대부분은 『정의』에서도 그대로 인용된 사례이다. 공공기관의 상업화는 대학의 역할에 대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에 대한 『정의』의 주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고, 소수집단 우대정책인 일명 AA는 『정의』의 것과 동일하다. 존엄사, 배아 복제, 낙태, 동성애, 그리고 클린턴의 교묘한 거짓말(그것과 칸트 사이의 관계) 등도 그러하다.


  제 1장의 역할은 소제목 그대로 독자들에게 질문에 답할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도덕·철학적으로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올곧이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애매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인간의 도덕적 난해함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때문에 A라는 사례에 대해서는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던 사람들도 B의 사례에 대해서는 “그래도 이건 개인의 판단에 맡기긴 어렵다.”고 입장을 바꾸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샌델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개인에게 도덕적 판단을 맡길 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막대한 논란들이 얼마나 큰 문제를 유발하는지 체감시킨다.


  충분히 사례들을 읽은 독자들은 제 2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공동체(共同體)’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오늘날 ‘나’라는 개인 한 명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까지 여겨지는 사적 공간을 지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 ‘나’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나’가 아닌 다른 영역으로부터 수많은 개입을 받아서 ‘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전자는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후자는 결합되어 있다. 이를 각각 ‘무연고적 자아’, 그리고 ‘연고적 자아’라 부른다.


  샌델의 철학적 목표는 도덕성의 회복에 있다. 사실 미국에서 도덕이 부각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도덕이 부족하다는 설명으로는 이 현상을 진단할 수 없다. 그들이 도덕을 갈구하는 배경은 자유지상주의의 전성기가 끝나가는 근래의 미국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그들이 대외적으로 보여주거나 주장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공동선의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다. 최근 문제가 된 여러 비극적 사건들이 미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언론의 보도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서로를 묶어주는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것은 국가와 공론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독립된 자아들이 연결된 자아들로 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도덕의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 2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샌델이 ‘도덕적 연대’의 구성을 역설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위한 반박된 논리는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롤스이다. 공리주의가 반박되는 곳은 우리도 쉽게 예상하겠지만 다원성의 영역이다.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자유지상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노직도 반박했는데, 그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분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는 자유지상주의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은 ‘행운의 임의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잘 생기거나 예쁘고, 또 누구는 부모가 부자이거나 스타이다. 어떤 사람은 지독한 가난을 배경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는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과연 무시해야 할까?


  롤스가 이를 반박하고 ‘차등원칙’이란 걸 내놓았는데, 이도 샌델의 비판을 받는다. 차등원칙은 ‘행운의 임의성’이 허용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롤스는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돌아가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다면 ‘행운의 임의성’은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롤스에게는 그러한 인정을 할 최초의 집단인 도덕적 연대가 없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롤스는 분명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지만 공론의 장에서 종교와 신념 등 가치가 개입될 사안에 발 담그는 것을 꺼려했다. 차라리 그런 사안이 발생하면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도덕적 연대’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이다. 연대는 무언가의 신념을 토대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 신념이 반드시 종교나 국가 등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샌델의 말을 인용해본다.


  “도덕과 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즉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와 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도덕과 확신의 힘은 어느 정도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190쪽)


  분리되지 않은 개인. 이것은 사회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게는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정의』의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어떤 면에서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주의를 상기시키는 정도밖에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비판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일찍부터 자유주의의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공동체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제 2장에는 『정의』에서 언급된 적이 없는 한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존 듀이이다. 그를 제 2장에서 소개한 건 순전히 샌델의 전략이다. ‘실용주의’, ‘교육자’ 등의 타이틀로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관심을 받은 적이 있는 듀이는 실용주의와 자유주의, 이 두 가지의 카드를 쥐고 당시 미국 사회를 진단했다. 샌델의 지적처럼 듀이의 실용주의과 자유주의는 그 쓰임이 우리의 비근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그의 실용주의는 철학이 사람들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적으로 당시 논쟁되었다. 또 하나, 그의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개인들 저마다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여기서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긴 이야기는 차치하고, 여하튼 듀이는 샌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듀이의 자유주의가 찬양하는 개인은 자신의 일과 가족, 지역공동체, 그 공동체의 정치에 참여하고, 강요나 위협, 타의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으며,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시민이다.(216쪽)


  그러나 이미 느꼈겠지만 이는 상당히 이상적인 시나리오이다.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실천, 혹은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냉소적 비판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 샌델도 두 가지 목소리를 언급한다. 그들은 첫째로 거대사회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최근 번역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미래의 사회적 재앙을 막기 위해 소규모 사회와 지역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저서들이다. 이미 거대사회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불가역의 흐름인 듯도 하다.


  둘째로 문제시되는 건, 과연 우리에게 어떤 확고한 의지가 있어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에는 도덕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것이 난점이다. 샌델의 지적처럼 “덕성을 주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대한 샌델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우리에게는 해당될 여지가 미국보다 훨씬 적어 보인다. 샌델은 공동정체성이 증가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로부터 희망을 보는 듯하다. 그는 시민들은 미국의 거대정부를 “멀리 떨어진 곳의 강력한 힘”이라 여기는 동안 일종의 괴리감을 보상받기 위해 다중연고적 자아를 형성해왔다. 그는 역설한다.


  “우리 시대에 특히 두드러지는 시민 덕성은 때로는 주어진 의무를 수용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자신의 길을 협상하고,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304쪽)

 

 

 

*    *    *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여기서 몇 가지 생각의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거의 직관적으로, 이 모든 논의들이 우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에게 『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줬던 교수도 학우들에게 『정의』가 등장하게 된 미국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개인주의와 지역이기주의 등으로 말이 많은 사회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피부로 느끼는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때문에 이런 것들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한 그 독자는 공동체주의를 특별한 논의로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혹시 우리의 잃어버린 가치를 공동체주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쟁점들을 검토해보는 방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공동체주의의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우리 사회의 것이 그렇게 일치하는 것 같진 않다. 공동체의 부정적 단면들이 자주 회자되는 한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판적 논평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 독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점들을 찾고자 노력해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전자보다 더 건강한 생각이라고 본다.


  당연한 결론이겠으나, 도덕은 특유의 난해함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의 판단능력을 검증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질문은 언제든지 던져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던져질 질문들 중에는 우리 사회가 한 번도 고민해보지 못한 것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일례로 다문화가정이라는 사회적 현안으로부터 다원주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근래의 모습은 예전 세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열린사회를 지향해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올바로 판단할 수만 있다면 고민은 해결되고 편견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샌델의 논의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고민의 사례들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도전적인 의지이다. 샌델의 지적처럼 미국은 정치철학의 불모지 중 한 곳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불명예를 씻기 위해 수많은 갑론을박으로 도덕의식을 형성해가고 있다. 사실 여기에, 즉 미국의 시민의식에 미국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하고 우리 역시 스스로 체감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그것에 대해 여럿이 모여 생각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잘 하는 것도 아니다. 고민거리들이 생기면 편을 이룬 집단의 양적 공세를 빌려 그 순간을 넘기는데 급급한 것도 사실이다. 간단한 수준의 흑백논리도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여전한 위력을 갖는다. 이를 두고 수준이 높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샌델의 책은 방향성이 명확하지만 우리는 그가 방향을 잡기 위해 가지를 쳐나간 부분에서부터 다시금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다. 분명 우리가 놓치고 지나간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실천이 고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