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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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내가 옳았어.’


  싯다르타는 지혜를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부처에게 말했다. 나는 그때 무릎을 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면지에 그간의 생각들을 거칠게 적어 내려갔다. 장자(莊子)를 공부하던 때의 기억들이었다. 노장(老莊)은 가르침[敎]을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멘토링’ 저서들의 수많은 문장들, 자신의 삶으로부터 지혜를 전수하려는 연장자들의 수많은 말들이 초라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전적으로 싯다르타의 편이었다.


  그러나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지금 무척 어지럽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나는 성찰, 경험, 고민, 욕망, 여하튼 여러 면에서 그저 평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재치 있게 말을 할 줄 아는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


  부처는 왜 이 말을 싯다르타에게 남겼을까. 나는 이 말이 왜 중요한가를 곰곰이 추적하면서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마음이 번잡하다.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    *    *

 

 

  데미안을 제외하면 나는 헤세와 만난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사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소설 속 싯다르타가 부처(고타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부분에서 내가 그간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고타마 싯다르타((瞿曇 悉達多). 헤세는 그를 둘로, 즉 고타마와 싯다르타로 나눴다. 아니, 나눈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싯다르타’가 당시 한 사람만 일컫는 이름은 아니었을 테니까. 여기서 나는 잠시 쉬어가야겠다며 책을 덮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나러 가는 길. 헤세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만남은 나에게 별로 숭고하지 않았다. 큰 깨달음을 얻게 되거나[大覺], 어떤 섬광을 보거나, 신을 만나거나 하는 체험은 없었다. 다만 나는 지혜와 관련된 나의 의문을 싯다르타의 말을 통해 곱씹게 되었다.


  지혜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그건 교육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식뿐이다. 그렇다면 세존(世尊)의 제자들이 세존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깨달음과 관련된 지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지식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오직 세존 혼자이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설파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여기서 일종의 관계가 발생한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여기에 함정이 있다. 모르는 자들은 아는 자가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겪더라도 결코 아는 자의 ‘앎’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사실이다. 부처의 깨달음은 부처가 한 고행의 방식을 모방한다고 해서 마땅한 결론인양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싯다르타가 또 다른 세존이 되는 결말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으로도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정리하건대 깨달음은 결국 각자의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깨달음. 그러나 그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그것 하나로 단일하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결국 헤세가 하고자 하는 말 하나 때문에 ‘종교적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소설. 말도 안 되는, 아니면 딜레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만약 누군가가 ‘실패’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성공적인 실패’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나의 말에 반드시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어떤 기구한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가 보도록 애써볼 터이다.”


  세존을 만나고 나서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다시 태어났다는 선언과 함께 1부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나를 보는 작업. 결론적이지만 이것은 범아일여의 ‘아(我)’를 성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고집스러운 집착은 예상과는 달리 싯다르타를 일상의 탐욕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다. 아름다운 여인 카말라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사실 탐욕의 전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아니면 그보다 앞서 만난 한 여인의 욕정에 싯다르타가 문득 욕정으로 응대한 것을 시점으로 봐도 되겠다.) 그는 카말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사랑을 배워보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소.”


  싯다르타는 계획을 착실하게 밟아간다.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의 일을 도우면서 이름도 널리 알리고, 신뢰도 얻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모으게 되면서 그는 카말라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아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유희로 여기며 범인(凡人)과 자신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오로지 카말라만이 이 ‘범인’의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일상에의 집착이 시작된다. 헤세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정말로 실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실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말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자기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카말라는 이를 간파했다.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유희할 뿐, 사랑하지 않는 그의 삶은 분명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영혼에 집착하는 삶을 포기하고 그는 카말라와의 애무로 상징되는 감각의 삶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싯다르타는 “흉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가 불안감을 점점 높이면서 그로부터 자극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아니, 스스로 찢어지려는 것처럼. 쉽게 말해 그는 윤회의 덫에 걸린 것이다.


  싯다르타가 윤회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를 헤세는 한 마리의 새가 죽는 꿈으로 묘사해놓았다. 새의 딱딱한 시체. 싯다르타는 무가치하게 끌어온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그러나 아직 ‘큰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는다. 꿈으로부터의 깨달음, 그리고 내면의 소리. 싯다르타가 겪은 두 번의 반전은 헤세가 말했듯이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비근하게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싯다르타는 “기차를 제대로 탄 것”이다.


  자살의 고비를 넘기고 강가에서 회생한 후, 싯다르타가 얻게 된 높은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여기서 한 번 쯤 헤맬 것이다. 부처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이다. 부처는 자비를 말한다. 자비와 사랑은 다르다. 그러나 헤세는 둘을 섞는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헤세는 싯다르타를 빌려 세존 역시 사랑을 왜 모르겠는가 하고 고빈다(소설 속 싯다르타의 오랜 친구. 싯다르타와는 달리 세존을 따르는 스님이 된다. 싯다르타와 헤어진 후 고빈다는 강가에서만 싯다르타와 세 번 만난다. 실제 브라만교의 높은 인물 중 한 명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와는 활동시기가 다르다. 고빈다는 7세기 사람이다.)에게, 아니 독자들에게 말한다. 헤세에게는 사랑이 그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온 듯하다. 흔히 말하는 고귀한 사랑이든, 아니면 세속적인 사랑이든 소설 속 싯다르타는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카말라에게서 배운 사랑은 종교적 의미로 본다면 참된 사랑이 아닐 것이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사랑의 고귀함을 깨달은 뒤 이렇게 생각하고, 또한 이렇게 행동하게 된다.


  “자기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에게 사랑은 “사랑한다.”는 존재만으로 그 빛을 내뿜는 것이다. 사물과 세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 자비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 있을까?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사랑과 자비를 구분하려는 것은 ‘단어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조리 체험했다.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도 체험했고, 썩어 들어간 삶도 체험했다. 그런데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싯다르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이 과정은 깊고 낮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깊고 낮다는 것. 그것은 싯다르타를 자연스럽게 뱃사공 바주데바와 만나도록 한다. 둘은 이미 한 번 만났으나, 바주데바가 보기에 지금의 싯다르타는 예전의 싯다르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고빈다 역시 싯다르타를 만날 때마다 그의 오랜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 한 가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것은 카말라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 대한 그의 집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싯다르타는 아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말라와 아들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낸다.)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싯다르타의 아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거의 방관에 가까울 정도로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어떤 ‘가이드라인’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거대한 감옥처럼 느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가르치려고, 도와주려고, 혹은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아들이 험한 말을 하고 떠났을 때, 싯다르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집착. 그것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웠던 것 같다. 사랑은 상처를 주니까. 상처가 아프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더 강해진 사랑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짐작했을 것이다. 싯다르타가 아들을 보내줄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싯다르타는 또 다른 세존이 된다. 그러나 그는 고타마 싯다르타와 같은 세존이 아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에게서 나는 후광은 빛이라는 점에서 고타마의 것과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가 빛나게 되었는가에 집중해야 하고, 사실 헤세는 그것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헤세가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싯다르타의 비참한 삶이 우리의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이 그와 우리의 차이이다.

 

 

 

*    *    *

 

 

 

  나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싯다르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풀어놓고자 했다. 어지럼증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헤세가 들려준 메시지는 단 하나였으며, 소설은 해피엔딩이었고, 헤세의 메시지와는 달리 나는 뭔가를 한 건 해결한 같은 포만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이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다시 어지럼증에 포위되고, 한동안 비참해지게 된다. 얼마나 굴러 떨어졌고, 또 그곳으로부터 얼마만큼 기어 올라갔는지를 나 스스로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싯다르타처럼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고, 삶의 고도를 언젠가 체감할 것인데, 나는 과연 구렁텅이에서, 아니 윤회에서 빠져나와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지, 이것을 멀찌감치 떨어진 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비참함의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나는 헤세의 작품 앞에서 진솔한 사람으로 남으려고 한다. 항간에는 이 작품이 전 세계의 청춘들에게 지대한 영향과 깨달음을 줬다고 평가하는 글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헤세라면 그렇게 말했을까. 그는 진리를 묻는 우리들에게 다만 침묵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싯다르타』는 우리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헤세 그 자신을 위한 작품이다. 이제 독자에게 남은 것은 명확하다. 나에게로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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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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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