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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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전문적인 정보나, 대담, 혹은 그 사이사이에 빈약한 소설적 장치처럼 등장하는 별 의미 없는 대화들을 훑어 읽을 수밖에 없다면, 독자는 과연 얼마나 감동을 받을까? 소설을 평가할 때, 독자는 작가가 지닌 수많은 지식들의 편린, 그 물결치는 비늘들의 아름다움보다는 작가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감성적이고 기발한 표현들에 더 높은 배점을 매길 것이다.


  이에 비춰봤을 때, 복거일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그야말로 <무정(無情)>처럼 지루한 ‘계몽주의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만 미쳤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에 홀린 사람마냥 나는 하품을 거두며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음미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소설’이라는 틀에서 이미 벗어나 ‘이립’에게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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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에 앞서 그가 이 소설을 쓴 맥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다. 자전적 소설의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의시간에 들은 바를 정리해본다.)


  복거일은 87년에 <비명(碑銘)을 찾아서>라는 ‘대체역사’장르소설을 쓴다. 작품의 전제는 이렇다. “일제의 통치가 당시(87년)까지 계속 이뤄졌다면 어떠했을까?” 독재정권과 일제 총독부 사이의 묘한 대응이 이뤄진다. 여하튼 이 소설이 한 극작가의 손을 거쳐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 감독 이시명)>로 만들어졌다. 시나리오는 99년에 완성됐다. 복거일은 극작가로부터 미리 전화를 받았으나, 전화내용으로는 어떤 구두계약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영화를 본 복거일은 엔딩크레딧에 ‘원작 복거일’이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왜 상의하지 않았나?”라는 항의를 했다. 그러자 영화사 측에서는 원작자명을 엔딩크레딧에서 삭제했다. 복거일은 소송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패소였다.


  저작권법은 대단히 첨예하다. ‘사상표현이분법’이라고 해서, 표현의 형식만을 보호하지 내용, 즉 아이디어, 사실, 방법, 주제 등은 보호받지 못하는 법이 있는데, 사실 성문화되어 있진 않고 판례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복거일이 돈 얼마 받겠다고 소송을 걸진 않았을 것이다. 지적재산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회에 인식시키고자, 승소 판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패소는 자전적 소설 <보이지 않는 손>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소설의 후미(後尾)는 흐지부지 끝난다. 한 법률회사의 여직원이 ‘명랑한 목소리’로 주인공 현이립에게 “네. ‘원고 패’라고 나왔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복거일의 표현대로 ‘기괴한 심상’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그가 말한 ‘기괴한 심상’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아마 허무하게 바라볼 것이다. 복거일과 현이립이 당한 일을 그대로 겪어본 사람이라면 - 나는 잘 모르겠으나 - 분노할 수도 있다. 법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법은 우리들의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주인공 현이립은 소설 초반에 재판장과 영화사 측 변호사로부터 일종의 모멸감을 받는다. 저 둘은 친한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 교수님의 코멘트가 있었다. 여성법조인은 거의 다 남성법조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 즉, 판사와 변호사의 관계는 거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변호사는 변호해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현이립은 순간 법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이미 황혼 위에 서 있고,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는 갖춰야 한다. 일침만 놓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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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구조 자체는 간단하다. 전반부의 모멸과 후반부의 ‘기괴한 심상’ 사이에 현이립과 그의 주변 인물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담이 전부다. 큰 틀은 저작권법의 취약점, ‘이상한 판결’ 등으로만 볼 수 있겠으나,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담들이다.


  앞서 내가 말한 이 소설의 지루함이란 대개 이 대담들이 던져준 것이다. 어렵고, 생소하거나, 사상적으로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내용은 민족주의적 사상을 지지하는 독자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 지식의 향연을 싫어하는 독자에게는 탁상공론 내지는 지적 부르주아들의 ‘오징어 땅콩 이야기’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사설로 신문에 발표해도 될 내용들을 왜 소설 속에 삽입했는가?”라며 ‘당의정(糖衣錠)’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다. 수긍할 수 있는 비판들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졌던 지루함과 위의 비판들로부터 복거일을 변호해보고자 한다.

 

  평소 글에 대해 생각하는 학생으로서 나는 글 속에 전문지식들을 삽입해놓는 작업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혹은 기능)를 갖는지에 대해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상당한 수준의 위안을 준다. 어떤 참조도 없이 지식의 옷을 입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이 정도 쓴다.”고 자위(自慰)하게 된다. 또한 사회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는 이유로 짜릿한 해소감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두 감정, 즉 안도감과 해소감은 대다수의 쾌락이 그렇듯 작가에게 별 효용이 없다. 둘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따라서 작가가 지식의 자수가 놓인 작품을 내놓았다면 우리는 위의 일반적인 감정 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해봐야 한다. (저런 감정들은 얼마나 옹졸한가 말이다. 분별 있는 작가라면 애당초 사설로 쓸 글과 작품화할 글 사이의 차이를 알 것이다.) 위의 두 감정은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작가가 저런 감정 따위에 굴복되는 일은 없다. 굴복되는 순간 생명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작가는 그의 생명줄인 독자와의 유대감에 신경을 써야 한다.


  독자는 불특정다수의 노드(node)이다. 그들이 작가 자신이 내놓은 지식들로부터 논할 수 있는 이 사회의 문제들을 함께 토론했으면 하는 대상이라면, 작가는 일종의 지적 유대감을 통해 독자들과 공동체의식을 형성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작가는 정서적 유대감까지 충분히 바라게 된다. 쉽게 말해 “내가 쓴 이 작품에 여러 지식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내가 소설에 넣어둔 사회문제를 풀 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오.”라며 작가가 독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점을 파악했을 때야 비로소 독자들은 지식의 지루함을 물릴 수 있다. 보다 더 적극적인, 앞으로 기울어진 독서 자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앞서 누군가가 ‘당의정’을 말했다고 했는데, 그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고 되물어야 한다. 그는 문학은 사설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개념적 돌파’, ‘패러다임 쉬프트’, ‘테크노크라트’, ‘주변부지식인’, ‘문제제기자’ 등 어려운 용어들이 많다. 도킨스 이야기도 나오고, 닐스 보어, 우주론 등이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이립 주변 인물들이 하나 같이 과학에 일가견 있는 연구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복거일의 장치일 뿐이다. 문제는 그가 왜 그런 말들을 굳이 소설에 집어넣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인공 현이립은 소설가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소설만 쓰는 사람은 아니다. 박학다식하며, 정의롭기까지 하다. 그가 살아오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당신이 뭔데?”였다는 것으로 보더라도, 그는 행동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여기서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책에는 여러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이를 거칠게 묶어서 현이립의, 아니 복거일의 자기인식을 도식화시키자면 우선 ‘주변부지식인’이라는 개념과 ‘문제제기자’라는 개념을 가운데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고, ‘문제해결자(예컨대 정책담당자)’와는 달리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이 정도 생각은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에, 즉 추상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도식을 소설에 적용하면 복거일이 하고자 하는 말이 상당한 현실적 호소력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이립은 주변에 있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게 모욕을 준 - 혹은 현이립 스스로가 모욕을 받았다고만 느끼고, 정작 그들은 전혀 모욕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 법조계 사람들은 중심에 있고, 문제를 해결한다. 현이립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중심부이다. 그곳에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이동할 뿐,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법이 있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법이라는 것은 저작권법이다. 이것의 문제 때문에 현이립이 패소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웃사이더.


  복거일은 작품의 특징에 대해 노골적으로 언급한다.


  “지식인이 지식인들을 위해 쓴 소설이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지식들로 채워진 소설. 큰물에 떠내려와 길을 막은 바위처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소설.(pg.195)


  그렇다면 이 소설은 성공이다. 불편하고, 지루하며, 읽고 싶지 않은 구절들은 몇 장마다 한 장씩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성공은 소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독자들에게 외면 받으면서도 그 자체로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특징이야말로, 그런 까닭에 스스로 빛을 내는 모습이야말로 소설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했다. 한편으로는 복거일이 보여준 반성적 성찰의 집요함에 대해 혀를 내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지루한 소설로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인가를 물었으나, 그 물음은 오래 가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지식을 공유하며 현안에 대해 토론할 자세와 수준이 되어 있지 않음에 대해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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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이런 면에서, 즉 이런 기능에서 장르의 경계를 불문하고 한껏 몸집을 불려나가는 것 같다. 그것이 현대의 흐름이라고 해도, 억지스러운 감정들을 쏟아내며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향유시키는 종류의 소설이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소설들보다 관심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 자체에서 도피하여 새로운 감정, 혹은 진한 감정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 소설 독서의 가장 든든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러한 관심은 분명 이해가 된다. 교시보다야 쾌락이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복거일의 소설을 읽음과 동시에 독자들은 ‘소설 독서’라는 삶의 영역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민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소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복거일의 이 작품은 다른 것들과 별반 차이가 없겠으나, ‘어떤 현실’을 기반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의 차이로부터 문학의 새로운 - 하지만 전혀 낯선 것은 아닌 - 기능에 대해 우리는 숙고해야 할 시간을 점점 더 자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전하라는 신호임과 동시에 도전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소설은 패소로 끝났지만 “현실은 그래서야 되겠는가!”라는, 물음표 대신에 높은 탑처럼 서 있는 느낌표에 대한 연대감이기도 하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했을 때, 우리는 법에 대항해야 한다. 방패를 든 존재에게 창을 겨누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일이야말로 사설과 르포의 기능일 텐데, 복거일은 그것을 문학의 힘으로 표현해보려고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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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8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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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8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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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0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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