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1.06

 

 

  이 책을 덮은 건 자정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무렵 즈음이었다. 아무도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의 방에서, 나는 아무도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음량에 나의 심정을 한껏 실어 길게 발음했다.
  욕이다.
  굳이 쓰진 않겠다. -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은 못 되니.


  생각해보니 나의 심경을 대변해줄 발언이 소설에 있어 옮겨본다. 혹 이 누추한 공간을 찾아 나의 글을 읽어주는 이가 있다면, 밑의 구절 중 내가 어디를 밑줄 친 진한 서체로 쓰고자 했는지, 십분 헤아려줬으면 한다.


  “선생님들, 저는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도 없지만 그 어린게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서럽고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내가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그놈들 부자지를 잡아서 다 찢어버려도 속이 시원치가 않을 거예요.”


  230쪽부터는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예수는 이 세계에서 부활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진리고 나발이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영화 보셨어요?”
  어머니께서는 흐릿하게 답하셨다.
  “소설로 읽었지. 그런데……”


  나는 이 여섯 개의 방점들로부터 나의 글을 열려고 한다. “부자지를 잡아서 다 찢어버릴 그놈들”을 서울광장 한복판에 세워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미간이 펴지질 않는다.
  <도가니>를 읽었다.

 

 

*    *    *

 

 

  지난 해, 수능 때 한 여고생이 자살했다. 뉴스가 나갔다. 사설도 반응했다. <한겨레>에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 결성을 촉구하는 한 대학생의 짧은 글이 올라왔다. 예전에도 이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지젝을 떠올리며, 속으로는 그게 사회 전체의 간곡한 연민의 눈길을 받을 만한 사건이 안 되는 현실이라는 점을 굳이 들춰냈다. 나는 대체로 회의론자였던 탓이다.


  토론과 연대의 힘을 못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충분치 못한 규모이다. 수많은 이익집단들의 싸움 속에서 정의가 불특정다수를 위한 태양처럼만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생각하기 싫으면 우리는 이 불특정다수를 편의상 ‘우리’라고 부르고 만다. 범인(凡人)들은 생각하는 지성, 실천하는 지성을 요구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생각하고 실천하며 베푸는 지성은 힘의 주변에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떨 때, 나는 차라리 이런 생각도 했었다. ‘대규모의 민란(民亂)이라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 만약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 멀리 있지 않다. 웹툰 <이웃사람>을 보다가 나는 작가 강풀이 우리사회의 ‘적의 정체’를 꿰뚫어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극단적 픽션이 시쳇말로 “레알(real)”이었듯이 수많은 “픽션 같은 레알”들이 여기에 존재한다. 한 강의에서 들은 교수의 일침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SF소설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현실이 SF인데.”


  회의는 의외로 짙었고, 나는 아직도 나의 어딘가에 있는 방풍되지 않는 창문이 나를 시리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렇다. 우리가 비근하게 써서 별 의미도 없어진 이 부사 ‘그럴수록’, 이 단어를 도구로 삼아 더욱 연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강인호와 서유진에게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어느 정도 힘을 가져 이씨 형제 측과 대등한 싸움을 해볼 수 있는 연대였다. 적어도 그런 의식은 필요했다. 연대는 분노해야 했다. 에셀이 우리에게 그러라고 했었다. 작년의 대유행이었던 슬로건. 분노하라. 하지만 이 용광로 같은 불길 속에서 우리는 제각각 버틸 만큼만 참는다. 그러다 제 형체가 훼손될 것 같다 싶으면 본능적으로 몸을 빼낸다. 데일 것 같으니까. 불사른 이들의 죽음과 그들이 토로하는 이 세계의 부조리만 살아남는다. 그것들은 시지포스의 바위처럼 불멸한다.


  이쪽이,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롭다고 믿는 쪽이 분노한다면, 저쪽은 - 이강석, 이강복, 박보현, 윤자애, 황변호사, 교인들 - 증오한다. 이 감정의 차이는 크다. 한쪽에서는 “저 죽일 놈”이라고 한다. 다른 편에서는 그들이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궁지에 몰린 쥐처럼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며 칼날을 내민다. 비교해 봐도 강력한 건 후자이다. 소설에는 자크 프레베르의 시가 나오는데, 그 중 ‘성냥’이 ‘우리’의 연대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그걸 불어서 단숨에 꺼버리는 부조리의 생존력이다. 철학자들도, 어른들도, 그리고 나도 생각하건대 저 세 글자 ‘부조리’는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예정된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서 사는 계획적이고 소시민적인 기쁨을 누리자는 결심”을 가졌던 강인호는 불멸의 세계로 뛰어들면서 이리저리 정신적 구타를 당한다. 정신을 못 차리니 ‘길거리의 미니스커트’들로부터 망측한 일도 당한다. 그에게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차마 말 못할 진실을 보는 것은 “듣는다는 것[聽]”을 의미한다. 그것이 엄청난 일일 줄이야. 서유진의 말마따나 이건 ‘광란의 도가니’이고, 이 나라는 ‘발정난 나라’이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좋은 나라 아닌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그지 같은 줄은 몰랐어.” 우리는 상식을 앞에 세우고 청문회를 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상식에는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다. 장경사의 말이다.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며 서로서로 눈감아주고 있어요. ……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 한번만 눈감아 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 - 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 - 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그렇다. 우리에게 ‘상식’이란 “이건 아니잖아.”라며 한 사건에 대해 우리가 증거로 내밀 수 있는 종류의 정의로운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세상은 빠르다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변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그랬다. 여성운동은 여성이 시작했고, 노예해방운동은 노예들이, 제 3세계 운동은 제 3세계가, 그리고 학생운동은 학생들이 시작했다고. SNS와 Youtube 등 범세계적 매체를 통해 여기저기서 혁명이 성공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고무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찬사가 너무 섣불렀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본다. 상식의 ‘오념(汚念)’을 바꿔보자고, 나는 서유진이 장경사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진의 안개 낀 거리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한 구절을 들여다봤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변화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믿음. 이에 대항하는, 세상은 더러워도 나는 더러워지지 않겠다는 무변화(無變化)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 나는 굴원(屈原)이 떠올랐다. 어른들이 나에게 굴원의 어부처럼 말한다면 나는 과연 서유진처럼 답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드는 것 같아 주변에서는 날 아니꼽게 보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이거다. 남들이 날 튕겨낼 것 같으니까 되도록 노련하게 붙어있는 것이다.


  “저래서 배운 사람은 쓰면 안 돼.”
  나는 군대에서 한 원사에게 들은 말이 돌연 생각났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거짓말의 종류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배워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약삭빠르게 진실을 변호할 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너무 착하면, 거짓말이 우리의 코를 눈뜬 사이에 베어갈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J.S.밀은 <자유론>에서 교육을 그토록 강조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선의의 독재’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이 소설의 법정에서 농아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어느 때에는 다섯 명이나 한꺼번에 구속되는 광경을 보면서 배운 자들의 권력과 그 음흉한 속내을 다시 한 번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저들은 심지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진실에 대해 예를 지키면서도 거짓말에 버금가는 악랄한 진실을 유포할 줄 알지 않던가.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그러나 위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진실의 편에 서려는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고독을 잠시나마 물릴 수 있는 ‘진실’이다.
  “언제나 공포는 상상할 때 더 크다.”


  침묵의 카르텔을 농아들의 어눌한 비명소리로는 깰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슬픔이다. 두 번째 슬픔은 더 슬픈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어쩌면, 이건 정말 조심스럽게 꺼낼 수밖에 없는 말인데, 이 사회가 다름 아닌 자애학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의 침묵에 채찍질을 가해본다.

 

 

 

*    *    *

 

 

 

  오늘은 늦게까지 비가 오락가락했다. 천둥도 쳤고, 바람은 이따금 깜짝 놀랄 만치 차가웠다. 나는 <도가니>를 생각하며, 신촌을 지나 연대 앞에서 버스를 탔다.


  연신내 즈음에서 신호 때문에 버스가 멈췄고, 나는 창밖을 무심코 내려다봤다. 무진의 안개 같은 혼탁한 구정물이 도로 위에 고여 있었다. 오직 바다만이 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더러운 혼융의 세계를 청렴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비는 그치고 서쪽에서 강한 햇살이 들어와 그쪽 창가의 승객들은 하나둘 버스의 커튼을 쳤다.


  어쩌면 말이다. 지극(至極)할 수 없는 태양이 상식의 세계, 혹은 정의의 정토(淨土)이고, 우리는 그것의 광휘를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툭 던져봤다.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연둣빛의 아름다운 소설 표지를 바라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도로 위 구정물 같은 세계에게 비명을 질러본다.


  너, 이 책 안에만 있어라. <도가니> 안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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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1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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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1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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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15: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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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2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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