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5
저번 주였다. 나는 강의들이 다 끝나고 잠시 이병주의 <소설·알렉산드리아>와 단편 <삐에로와 국화>를 읽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대충 기억하자면, 대략 반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복사대 쪽에서 “복사해주시오!”라는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서관의 정적은 얇은 얼음장이 박살나는 것처럼 깨져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곳을 내려다봤다. 주변의 학우들도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다. 하긴 도서관이라는 곳은 늘 조용하기 마련이니 옆 사람 기침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하지 않던가. 잘은 모르나, 생각해보면 혹 귀가 안 좋으신 까닭인 듯도 했다. 공공의 예를 모르는 분은 전연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큰 목소리 덕분에 나를 비롯해 복사대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대화의 내용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지만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내 복사 좀 맡기려 하는데 말이오. 책 페이지 말씀해주세요. 내 그러니깐, 여기 목차 다음부터 180페이지까지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소? 한 시간이면 되겠소? 내 여기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복사가 다 되면 불러주시오. 예.
10분도 안 됐을 것이다. 직원은 복사물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부르러갔다가 할아버지와 함께 복사대로 돌아왔다. 할아버지께서는 복사가 빨리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셨었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셨다. 고맙소. 고맙소. 소낙비 같은 감사에 직원은 웃으며 멋쩍어했다.
한바탕 ‘소란’은 그렇게 끝났다. 미소를 지으신 할아버지를 나는 잠시 바라봤고, 할아버지께서는 입구 반대편으로 걸어가셨다. 책 넘기는 소리, 기침소리, 도서관 ‘알바’들이 책 수거용 카트를 밀고 다니는 소리,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전부였다.
나는 그 광경을 곰곰이 복기했다. 이병주의 작품을 읽으면서 낙서했던 이면지 구석에 “할아버지. 고맙소. 복사. 공부.”라는 네 개의 단어들을 적어놓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시간이 넘게 나는 이따금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연로하신 분들의 ‘공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자료를 찾으셨기에, 우리 세대가 봤을 때에는 시쳇말로 거의 ‘오버’에 가깝게 고마움을 표현하셨을까. 집중해서 읽는다면 180페이지 정도야 반나절이면 정리하면서 읽을 수 있다. 무엇이었을까? 아니,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갑작스레 의미를 부여한 것은 할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미소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공부를 하며 저런 미소를 지어본 적이 있었나?’
몇 번 있었던 듯하다. 국문이 전공이지만 소질에 맞지 않아 미술사로 전향하겠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한 이후 나는 큰 희열들을 맛봤었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는 대체로 교양강의들이 나에게 배움의 기쁨을 줬다. 시간이 지나자, 전공에서도 이따금 무릎을 치는 순간들에 점차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꼬여버렸던 실타래가 이런 모양으로 내 안에서 서서히 정렬되어가자 나는 할아버지의 미소로부터 그간의 쓰라린 경험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헛배우지 않고 있다는 모종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마음의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시험, 내기, 경쟁 같은 것에 영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이 대학의 내로라하는 소위 ‘머리’들의 성적이나 향후 목표 등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기도 하거니와 잘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지향하는 바들이 나와는 때때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보다 나를 더 많이 자극하는 것은 바로 위의 할아버지, 아니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도우미 학생의 보조를 받아야만 강의를 겨우겨우 들을 수 있는 전신지체 장애우 학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백발의 외국인 교수이다.
그들에게서 나는 ‘대학(大學)’이라는 이 시대의 잊힌 단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낀다. 이 열정에 ‘순수’라는 점수로 어떤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가진 열정보다 그들의 열정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뒤지고 있다는 자괴감과 본받아야겠다는 긍정적인 충격은 말 그대로 손바닥과 손등의 차이인 듯하다.
* * *
일산에는 ‘백마교’라는 다리가 있다. 그 밑으로 경의선이 지나간다. 이 다리는 출퇴근시간마다 차량소통이 많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 주 목요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백마교 사거리에서 내가 탄 921번 버스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피곤을 쫓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피요네(Fjordne)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하튼 그때 마침 버스 옆에 서 있던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스멀스멀 감기던 눈이 떠진 건 내가 그 승용차 운전석에 탄 한 남자가 실내등을 밝게 켜고 무언가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알 같이 쓴 손글씨라 내용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때문인지 나는 관심이 갔다. 무엇을 읽는 것일까.
직진 신호가 들어오자 남자는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하는 앞차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기어를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손글씨가 적힌 노트를 덮었다. 나는 그걸 봤다. 표지에는 - 아마도 매직으로 쓴 것 같은 - ‘잠언집’이라는 단어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직진을 받아 백마교를 넘어갔고, 이어 좌회전을 받은 버스에서 나는 제 갈 길을 갔다.
책 읽는 이라면 읽으면서도 “독서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된다. 답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질문은 참으로 매력적이어서 독서의 일상에 자주 중지(pause)의 표지를 심어놓는다. 그 남자의 잠언집이 나에게 또 한 번의 중지명령을 내렸다.
나는 중지의 표지판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백마교에서 내가 내리는 곳까지는 대략 15분 정도 걸린다. 음악을 들으며, 마침 일산의 유명한 먹자골목인 ‘애니골’ 입구의 정체 때문에 5분 가량 가다서다 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읽는다.”라는 행위의 정체를 어떤 검은 베일 앞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내가 끌어당기는 만큼 나의 다른 한 손은 그것을 다시 베일 뒤로 숨기려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나와의 대결이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그래서 이런 것인가 보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 한편으로 - 이제 곧 눈이 내릴 테니 잠깐 생각을 겨울에 닿아보건대 - 독서는 그 이름을 가진 설원에서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하나의 커다란 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저마다 구른 방향에 따라 형체가 다를 것이다. 수많은 것들이 몸을 숨기거나 제 몸의 부피를 줄여나간다고 했을 때, 그러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독서는 우리의 몸집을 스스로 불려나가는 것이니 제아무리 시린 것이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풍성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심심한 위로를 여기에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번 주중은, 그런 까닭에, 이래저래 독서와 공부에 대해 뜻밖의 많은 생각을 해보고 나 스스로도 정신을 앙양시키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