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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역사 ㅣ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평점 :
2012.10.24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고, 지금까지 얼마나 공부했고, 또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를 논하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신을 부릴 수 있을까. 양(量)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니.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내가 넓혀가는 ‘나’의 영토의 경계에 서서 늘 변화하는 최대치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나 스스로를 변호할 수단으로 삼아보고 말하건대,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는 바로 이 순간까지 내가 읽었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다.
읽고 난 후의 애착이 아니다. 읽을 때의 애착을 나는 일일이 기록했었다. 짧은 챕터는 3장 정도이다. 원문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도판이거나 참조할 구절들의 나열이다. 에코 자신도 추의 사례들을 주로 제시만 했다. (그래서 이따금 나오는 분석들이 중요하다.) 여러 사례들 사이를 앞뒤로 연결하며 독자들은 스스로 아라크네가 되어야만 한다.
어려운 책이다. 바꿔 말하자면 세세하게 공부하려고 접할 수 있는 책으로는 아주 매력적이다. 그가 예시로 소개한 수많은 사례들만 놓고 보더라도, <미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단언할 수 없다. 나는 그 가치를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들로 음미하기 위해 한 챕터를 나의 글로 10~13장 정도 늘여 쓰고, 또 다른 도판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연구하는 즐거운 강행군을 감행했었다. (내가 지난 <케테 콜비츠> 리뷰에 적었던, 미술사 공부할 적 세세한 것들에 열광했다고 한 시기가 바로 <추의 역사>를 읽던 때였다. 나는 디테일들을 아침 삼아 먹곤 했었다.)
몇몇 독자들은 앞에서부터 몇 장 넘기다가 루벤스의 메두사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온다. 잘려나간 메두사의 머리 주변에 미꾸라지와 거미 등이 있는 것도 그러하고, 눈을 아래로 무섭게 뜨고 있는 그녀의 표정도 점점 익숙해지다가 유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자극으로부터의 적응은 의외로 빠르다. 나는 현대미술을 공부할 무렵에 지금 생각해도 역겹기 그지없는 작품들을 여러 개 본 적이 있는데, 다시 보면 별 것 아닌 미미한 자극만 받을 뿐이다.
한창 미술블로그를 할 때, 나는 <추의 역사>를 나의 글로 편집하고 에코의 관점과 사례들을 보다 자세하게, 그리고 내가 찾은 다른 예시들과 함께 소개하는 포스팅을 10회 정도 했었다. 나는 매번 포스팅 위에 “비위가 좋지 않은 분은 읽지 마세요.”라는 빨간색 경고문을 썼었다. 내가 그 전까지 올리던 포스팅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글을 읽는 이웃블로거들과 누리꾼들은 이내 적응했다. 어느 미술팬은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 온갖 것들에 노출된 적이 있을 현대인들은 마사초의 <성삼위일체>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놀라 넘어졌다는 - 이는 바사리의 기록인데, 과장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바사리는 소위 ‘뻥튀기’를 즐겨 쓴 전기작가이자 화가이지만 - 일화의 주인공이 되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추’라는 것은 달가운, 혹은 친근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위치란 안방보다는 화장실, 세면대보다는 변기 근처일 것이다. 비유가 조금 단순했으나,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 비근함이란 우리가 그것을 대했을 때, 자극의 세기가 어찌 되었든 간에 거의 일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시선을 다소간 회피하려고 하는 추의 핵심을 관통한다. 의식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추는 극복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편리한 기술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추가 돌연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충분히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움베르토의 이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수없이 나열된 도판들을 하나둘 넘겨보는 것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 뭔가 보는 걸 좋아하는데, 미술사는 잘 모르겠는 독자라면 먼저 도판들을 쭉 살펴보는 것을 권한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이것들 앞에서 어떤 특정한 감정을 갖게 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그/그녀는 움베르토의 서문을 천천히 읽어보고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독서란 그런 것이 아닌가. 질문을 던져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질문한 자의 예의도 아닐 것이고. 그렇게 오랜 여정을 움베르토가 만든 길 위에서 보내다 보면 그 수많았던 추가 한순간 모든 시선을 나 자신에게 소급시켜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추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나와 ‘그것’ 사이의 거리이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추들이 나와 갖는 관계이다. 움베르토의 말마따나 아프리카의 제의용 가면은 우리의 눈에 섬뜩하게 보일 것이다. 11페이지를 보라. 아프리카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불길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대적 차이는 우리들이 이미 시대정신으로 다 체득한 상대주의의 산물이다. “너와 나는 달라.”에서 나오는 인식 말이다. 굳이 이를 위해 추를 예로 삼지 않아도 된다. 미술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인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부시맨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예도 있다.
경계는 이미, 한참 전에 애매해졌다. 무엇이 미(美)이고, 무엇이 추(醜)인가. 안이한 직관주의로 보자면 대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아름답고,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가능성>은 추하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그저 콕콕 언급한 것일 뿐이다. 문제는 판단의 경계이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미와 추의 분할을 시작하는가? 움베르토의 이 질문은 어떤가?
“추를 미의 반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움베르토가 제시한 역사적 사례들을 쭉 살펴보면서 더러는 계보학의 형사가 된 듯한 착각을 통해 쾌락을, 더러는 자세한 사실들을 알아간다는 쾌락을 느끼겠지만 그러한 이해 속에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나’가 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 굳이 ‘추’ 하나만 관계 지을 필요는 없다. 미든 추든 상관없다. 이 둘을 ‘대조적 모델’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혹은 우리가 이 둘을 어느 위치에 놓은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우리는 꽤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움베르토의 이 말과 같을 것이다. 426페이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로 대조적인 모델들과 공존하는 것은 미/추의 대립이 더 이상 어떤 미학적 가치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와 추가 중립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한 선택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많은 젊은이들의 행위로 확인된다. 영화, 텔레비전, 잡지, 광고, 패션 등은 모두가 고대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미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우리는 르네상스 화가가 그린 브래드 피트, 섀런 스톤, 조지 클루니, 니콜 키드먼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상들(미적으로든 성적으로든)과 일체감을 느끼는 바로 그 젊은이들이 른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여겼을 외모의 록 가수를 보고 미칠 듯이 환호하기도 한다. …… 매릴린 맨슨과 닮아 보이기 위해 종종 화장을 하고 문신을 하며, 핀으로 살을 뚫고 피어싱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베르토의 생각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르네상스적이다.”라고 선언할 수도 있다. 미/추의 중립성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히려 낯선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특성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중립성이 혹시 별다른 생각 없이 나온 것이라면 미/추에 붙어 있었던 고전적 의미의 도덕 가치들은 말 그대로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의미들을 잃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미/추를 구분하려고 하는 ‘나’의 애매모호한 판단에 푹 빠져 있다가도 다시 추의 본질적 특성으로 회귀하게 된다. 책의 순서상으로도 자연스럽다. 마지막 챕터에 움베르토는 그가 하고자 한 말의 핵심을 실었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예술은 추에 집착했었는가? 그리고 집착하고 있는가? 그는 예술의 힘이 일상의 판단에 비하면 주변적일 수도 있음을 토로하면서도 예술의 집요를 “이 세계에는 냉엄하고 슬프게도 악한 어떤 것이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시도라고 판단했다.
추가 ‘불쾌감’, ‘혐오감’, ‘두려움’과 연결되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 문화적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일그러지는 무언가, 2개가 아닌 3개의 눈, 폭발하는 물체의 징그러운 파편들은 모두 우리와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일상성을 위협한다. 그것은 비극과 궁극적으로 닿아 있다. 우리가 추도 학습인 것처럼 생각하는 까닭은 예술로 표현된 추의 구체적 대상들이 문화,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적(敵)’과 다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대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드러나는 양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추하다. 연민과 애착이 생기더라도 그건 부차적인 이해이다.
다시 돌아가 보건대, 추는 ‘저기’에 있다. 내가 그것을 ‘여기’로 끌고 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끌고 온 것은 추가 아니라 추를 바라보는 ‘나’에 지나지 않는다. 만족은 대부분 착각에서 온다고 하더라. 이 책을 읽은 지 2년이 다 되가는데, 나는 “나는 추를 이해했어.”라고 생각하던 옛 착각을 상당 부분 지워가고 있다. 이미 많이 지웠다. 다시금 이 책의 도판들을 보며 하나씩 회상에 잠겨보는데, 그것들은 모두 낯설어졌고, 모두 추했다. 나와 ‘그것’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 거리는 원래 먼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추를 이해하고 그것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추의 역사>에 대한 나의 오마주였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