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7.10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5권]

 


  세계적인 석학들과 학문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대학자가 쓴 것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런 책들을 만난다. 자크 바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 미치오 카쿠의 <불가능은 없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등등. 물론 독자들은 저자가 특정 분야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다소의 어려운 용어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들을 리드미컬하게 서술하는 그들의 배려 깊은 노력과 위트 때문에 불편함은 거의 못 느낄 것이다. 짧은 일기 하나를 쓰면서도 그토록 고민하고, 글을 늘 힘겹게 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다. 자신의 생각들을 정갈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해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최재천의 <다윈 지능>도 바로 그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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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 리들리, 리처드 도킨스, 미치오 카쿠, 칼 세이건, 스티븐 핑커, 르네 지라르, 피터 버거, 브루스 링컨, 오토 마두로. 대학생이 된 이후, 강의와 책,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저들을 접하며 나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 저들을 아는 이는 아마 짐작했을 것이다. 우주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종교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공교롭게도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우주과학은 각종 어려운 우주이론들을 귀동냥으로라도 배워 보려는 노력과 진화론에 대한 이해를 줬고, 종교사회학은 유아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인 내가 이슬람교와 불교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다.


  최재천의 <다윈 지능>은 위의 같은 성향의 내가 자칫 종교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주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도 동류의 책이라 하겠다.) 그의 겸손한 학자적 태도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그가 충분히 재밌게 설명해주는 수많은 진화론 이야기들도 각각 영양가가 높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와 같은 작은 독자들은 늘 저자의 태도를 염두에 둬야 하지 않던가. 정독하면서 이면지 5장 분량으로 정리한 바가 있어 책의 내용을 잠깐 간추려보자면 (어차피 진화론의 주요 이론들의 약술이겠지만) 이렇다. 본의 아니게 리뷰가 평소보다 길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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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이, 유전, (한정된 조건 속의) 경쟁, 그리고 (경쟁의 귀결과 다름없는) 자연선택이 바로 진화의 필요충분조건들이다. 새삼 우리는 서로 다르다. 일종의 나비효과와도 같이 게놈(genome)이 유전자풀(gene pool)에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관절 변화는 왜 일어날까? 조금이라도 진화론에 대해 들어본 이라면 바로 답할 수 있다. 생존과 번식 때문이다. 살아남아야 하고, 자손을 퍼뜨려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하게 환경에 적응하고, 형태와 능력을 개발하는 생물과 미생물의 양태들을 우리는 이미 여러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만약 생존과 번식이 최대의 목표라면 모든 종은 완벽하게, 아니 그것이 무리라면 적어도 ‘우수하게’ 진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매양 그렇지만은 못하다. A라는 환경에서 우수하게 적응한 생물이 B라는 환경에서는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환경은 변수(variable)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계속된 조류 인플루엔자 파동 때에 닭들을 모조리 생매장 처리한 것이다. 하우스에서 기르는 닭들은 자연선택으로 진화한 닭이 아니다. 인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든 ‘피조물’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없다. 만약 닭 한 마리가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렸다면 대부분의 닭들이 바이러스에 그대로 노출되어 감염된다. 가족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콜록콜록”거리지 않는다는 것과 대조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온통 바이러스에 감염된 닭들이 인간에게 위험한 까닭은 조류 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도 감염되는 일명 ‘인수공동바이러스(zoonosis)’이기 때문. 결국 닭들은 생매장됐다. 이런 일은 내일이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저께에는 중국이 이 바이러스 때문에 국가비상사태에 빠졌다.

  최재천은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섞어야 건강하다.(48쪽)
  맞춤형 유전자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겠다는, SF영화들이 고발한 인간의 무모한 욕망이 어떤 미래를 낳게 될 것인지는 생매장된 닭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인간도 진화한다. 하지만 그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이를 무작위 걸음(random walk)이라고 한다. 자연선택과 함께 진화론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를 이해하면 ‘임의’라는 것이 진화를 일종의 ‘잡아둘 수 없는 공기’처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화에 방향성이 없다는 것은 곧 ‘목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 다윈도 일찍이 진화론에 걸맞은 용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큰 고민을 했었다. 지금이야 우리는 ‘진화(evolution)’라는 용어를 별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만 사실 이 말에는 방향성이나 목적성이 내포되어 있다. ‘진화’의 어원이 되는 evolvere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윈은 이를 ‘transmutation’이라든지,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고, 즉 ‘돌연변이’나 ‘수정된 상속’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내며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탄압이 들어오지 않은 까닭은 사람들이 ‘진화’에서 종교적 목적성을 멋대로 도출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로 말하건대, 무목적성의 ‘진화’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과학이론들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는 몇몇 시도들에게 독자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이다.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으나, 과학이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사회과학이론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량 차이가 매우 심하다. 한 교수는 내게 “인간을 물 분자 크기로 줄여서 자판기 종이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엔트로피> 리뷰를 참조) 현대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의 무목적성에 대해 동의한다.


  만약 목적이 있다고 하자.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인간우월주의에 빠져서 말이다. 예컨대 우리의 ‘눈’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숭배하면서. 하지만 인간은 상당한 진화의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날개도 없다. 아가미도 없고, 지느러미도 없다. 즉, 날지도 못하고, 수중생활을 하지도 못한다.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시세포도 없다. 오늘날에도 지적설계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가장 비근하게 예로 드는 인간의 위대함은 앞서 말한 것처럼 눈인데, 최재천은 눈의 불완전성과 불합리성을 말한다.


  나도 평소에 한 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왜 뒤통수에는 눈이 없는가? 나 같이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는 사람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제약이 있다. 기도와 식도가 교차하는 것 말이다. 사래가 걸리면 죽을 맛이지 않은가. 털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들이 많은데,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은 적어도 동토층에서는 살지 못하도록 진화한 듯하다. 핀란드 사람들은 한 겨울 사우나를 하고 곧장 근처의 얼어붙은 호수로 뛰어들곤 한다. 그것도 한 두 번이면 족하지, 계속 있으면 얼어 죽는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가 “자연선택은 진화적 땜질이다.”라고 한 말이 맞다.


  2004년 Human Genome Project의 결과로 인간의 유전자수는 벼(5~6만개)보다도 적은 2~2만 5천여 개로 밝혀져 인간우월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아마 그들은 인간의 유전자수가 그 어떤 개체보다도 많을 것이라 예상했는가 보다. 하지만 그들은 유전자가 조합의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수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조합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가령, 유전학에서는 유전자 A가 여러 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다면발현과 한 형질의 발현에 여러 유전자들이 관여하는 다인자발현을 나눠 설명한다. 이렇게 대단히 복잡한 유전자와 형질의 발현은 그저 강처럼 “구불구불 흘러갈 뿐(99쪽)”이다. 이를 ‘적응’이라고 바꿔 말해도 된다.


  이밖에 여러 이론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다윈의 진화론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정작 다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최대의 고민이 있다고 털어놨다. 두 가지, 바로 이타성과 성적 이형성이다. 도킨스의 말처럼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와 어울리는데, 인간을 포함한 몇몇 개체들은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왜 그럴까? 그리고 왜 성(性)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일까?


  먼저 이타주의(altruism)을 살펴보자. <종의 기원> 1판 9장에 보면 이타성은 다윈에게 “언뜻 극복하기 힘든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208쪽)”라고 묘사된다. 그런데 이타주의가 이기주의보다 생존이나 번식에 있어 더 적합한 사례들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이는 더 이상 진화론의 골칫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타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공식도 있다. 윌리엄 해밀턴은 ‘rB>C’라는 공식을 제안했다. 이는 ‘친족 이타주의’를 설명할 때 쓰였는데, 풀이해보자면 ‘근친도’와 ‘이득’을 곱했을 때 그것이 ‘비용’보다 크다면 이타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재천은 개미와 말벌 등의 수컷이 반수 배수체(haplodiploidy, 염색체 n=23만 갖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복사체를 퍼뜨리기 위해 각각의 사회에 복종하며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최승호 시인이 “알이 닭을 낳는다.”고 한 표현을 그는 좋아한다고 했다.


  로버트 트리버즈의 호혜성 이타주의도 있다. 일명 ‘계약 이타주의’라고도 불리는데, 피가 모자랄 때에 서로 나눠먹는 흡혈박쥐와 청소놀래기 등을 우리는 쉽게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고기인 내가 입 안에서 기생충을 먹던 청소놀래기를 먹는다면 점점 청소놀래기들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이 낮아질 것이고, 결국 기생충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개념과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청소놀래기들이 나에게 오지 않는 것은 일종의 ‘보복’ 행위도 같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즉 ‘TFT’인 셈이다. 이러한 이타주의는 인간의 사회성으로 더 잘 설명이 된다. 니체는 약자들이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계약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으로 성적 이형성이다. 말이 어렵지, 앞서 풀이한 것과 같이 다윈이 궁금했던 것은 “왜 성이 서로 달라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이 당시 우습게 들렸던 이유는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물론이고, 식물과 균류 등 개체의 다수가 유성생식하기 때문이다. 유성생식은 유전자의 손실을 가져온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정확하게 각각 50%씩 갖고 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50.1%를 받고, 어머니로부터 49.9%를 받는다면 지금의 ‘나’가 있을 수도 없다.) 친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만약 그들이 자신의 유전 형질을 손자에게 아주 잘 물려주고 싶어 했다면 그들은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물려주려고 해도 그들의 유전자는 나에게 정확하게 겨우 25% 밖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더 실망할 것(12.5%)이 분명하다. 이는 번식에 있어 유성생식의 생태적 비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많은 개체들이 유성생식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맨 위에서 살펴본 ‘변이’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성생식 개체군은 절멸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의 등장을 ‘기생충(혹은 병원균)과 숙주의 공진화’로 보는 매력적인 가설이 있다. 숙주에 해당하는 우리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을 나눴고, 기생충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진화론이 ‘수컷들의 약점’을 발견해 남성중심사회로부터 반감을 산 역사적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성의 선택권은 언제나 거의 암컷에게 있다는 다윈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이 인용하기에 아주 좋은 이론인 것처럼도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보다 많은 여성의 몸을 빌려 번식 성공도를 극대화하려는 남성들의 경쟁의 역사라는 것이다.(166쪽)
  이는 로라 벳직(Laura Betzig)의 말인데, 이것이 비단 인간의 사례만은 아니라는 실제 여러 예들이 있다. 밀회장소를 만드는 정자새(bowerbird)의 일화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 새의 눈물겨운 구애 행동을 가족과 함께 다큐멘터리로 보면서 “참 용 쓴다.”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 아니면 사자의 사례도 있겠다. 왕의 영역 언저리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가 ‘된통’ 얻어맞고 상처투성인 채로 쓸쓸히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늙은 수사자의 모습 말이다. 19세기 의학의 발달로 인해 gender가 sex의 연장선상으로 여겨지는 사회풍토, 현화식물에게 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는 발견, 그리고 다윈 이론으로 설명하는 동성애의 진실 등도 흥미로운 읽을거리이다.


  그 밖에 여러 쟁점들이 있으니, 하나씩 음미하고 필요하다면 곁가지로 알아둘 정보를 검색하거나 진화론과 관련된 여러 번역서들을 읽는 것도 좋다. (하지만 대개 번역의 문제가 지적된 바 있는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재천이 우리나라 학자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이 나와서 하나 소개하는데, 최재천이 세균과 페니실린의 전쟁을 빗대어 오용과 남용을 비판한 챕터는 다큐멘터리 <감기>와 함께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감기약으로 항생제를 준다. 네덜란드의 한 의사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자 그가 혀를 차면서 놀라는 장면은 뭔가 우리나라의 관행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씁쓸하게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환자들도 많은 약을 처방받을수록 대체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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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과학 자체에 대한 흥미만을 견지한 채 접하면 보다 깊은 생각을 해볼 기회를 잃게 된다. 때문에 최재천은 책의 후반부에 거의 철학에 가까운 난제들을 진화론적 사고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는지 소개한다. 그 방법과 문장이 어렵지 않으니 혹 과학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울이 될 것이다.


  나름 그 난제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키워드를 요약해보자면 ‘문화’, ‘경험’, 그리고 ‘자유의지’를 꼽을 수 있다. 처음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문화’는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우리에게 친숙한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그 때의 반향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그와 비슷한 충격을 나는 철학 강의 때에 본 한 영상에서 받았다.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먹는 일본 원숭이들을 본 것이다! 에릭 홉스봄이 “전통이란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과 비유해봤을 때, 문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험’은 진화론자들 중 일부 ‘유전자 결정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이다. 그들은 유전자가 유전의 전부라고 여긴다. 최재천은 대표적으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을 소개한다. (그 내용은 다소 어렵다.) 그러나 최재천은 그보다는 우리에게 흔히 용불용설(use and disuse)로 알려진 라마르크와 다윈의 공통점을 ‘경험’이라고 설명하면서 진화론의 절대주의를 뒤로 물린다.


  ‘자유의지’는 세 가지의 키워드 중 가장 철학적인 단어일 것이다. 자유의지의 반대개념은 결정론. 인터넷 검색창에 ‘결정론’을 치면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결정론을 만날 수 있다. 무엇이 무엇을 결정한다는 개념, 혹은 총체적으로 이미 결정된 무언가가 있다는 개념은 흡사 종교의 내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종교의 틀에서 벗어난 결정론들도 많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결과는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에게는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최재천은 이것이 ‘explaining brain’을 만들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또 다른 종류의 환경(284쪽)”이 된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변수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이는 알바 노에(Alva Noe)가 <뇌 과학의 함정>에서 우리에게 뇌 그 자체가 아닌 뇌가 작동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일치하고, “마음, 즉 의식은 두개골 속에 갇힌 채 일어나는 뇌의 신경활동을 넘어선다.”는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무언가를 맹신하려는 우리의 오만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이렇듯 언제나 ‘변수’이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궁극 중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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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의 내용이 두서없이 정리된 까닭을 이 책의 구성 탓으로 돌려 소심한 핑계를 대본다. 워낙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된 터라 나의 재량으로는 거칠어지는 리뷰를 순일하게 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고백하건대, 독서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아는 대목에서는 흥분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연결해보거나 다른 책들을 들춰보기도 한다. 나는 매트 리들리의 <게놈>,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와 <만들어진 신>을 곁에 두고 봤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책들을 서재에서 꺼내 곁들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종종 이름 모를 시기심이 발동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과학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있었구나 싶다.


  그러나 지식의 일면들은 이면지에 정리해둔 것으로 족하다. 그것들을 다 기억한다면 준(準)생물학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책을 읽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한다든가, 우월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다시 카오스로 회귀한다든가 하는 일종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마 최재천의 집필의도와도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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