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9

 

  아침기온이 영하이다. 단단히 동여매고 기세 좋게 나섰으나, 9시에 예약된 치과치료가 나의 넋을 뺀다. 치과에 가면 뭔가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든다. 기세고 뭐고, 다시 피곤해진다. 광화문행 버스 안에서 나는 등받이 위를 굴러다닌다. 주말 내내 나의 머리를 괴롭혔던 아감벤의 '게니우스'를 좀 더 독파해보겠노라 벼르고 가방에 넣어온 <세속화 예찬>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행이도 옆 좌석에 앉은 한 여성분의 머리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타인의 피곤을 목격하는 것이 적잖은 위로가 되는, 씁쓸한 미소의 아침이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보도로 내려간다. 아직은 춥다. 스마트폰 액정에는 분명 10시 15분이라 적혀 있는데도. 그대로 나는 K문고에 들어갔다. 한산하다. 네 권의 책을, 마치 장보러 마트에 간 사람처럼 들고 다니면서 여유를 맛본다. 이대로 있다간 수업 들어가기 싫어질 것 같아 부랴부랴 전철을 타고 신촌까지 간다. 그제야 따뜻해진다. 한 손 두둑하게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초등학생인 양 노트에 낙서해가며 강의 정리를 한 뒤, 아감벤을 편다. "게니우스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빈곤함을 질책하기 전, 오늘 구입한 책들은 집에 가서 꺼내보리라 가방에 종이봉투 채 곱게 넣는다. 이 책들이다.

 

 

 

 

 

 

 

 

 

 

 

 

 

 

 

 

  입대 전, 2월이었다. 창문에 내린 서리를 보고 쓴 시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나도록 한 행도 쓴 적이 없다. 사춘기를 나름 '시의 노예'로 지냈었다. 배설하듯 그것을 써본 때가 있었기에 시는 각별하다.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아담한 시집 한 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변으로 빛이 영롱한 파장을 일으키며 퍼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올 봄 꽃 피는 날에는 애써 눌러왔던 시작(詩作)의 감성을 되찾아보리라 벼르는 중, 한 신문에 소개된 김선우氏의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나는 바로 마음이 꽂혔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은 후로부터 정말 오랜 만에 느낀, 울컥 하는 감정이었다.

  오늘 아침 K문고로 '등교'한 까닭은 순전히 이 시집을 손에 잡아보기 위함이었다. 택배로 받는 것은 '물건'이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진열된 것과 택배로 받는 것이 달라봤자 실제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그래도 어느 것은 숨 쉬는 생명 같이 고이 모시고 싶어 하는 것이 독자의 생리가 아닌가 싶으니. 더 각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첫 장의 첫 시의 첫 구절에서 나는 주저앉을 뻔 했다.

  "백수인 걸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바다풀 시집>이라는 시의 제 1행이다. 광화문에서 도서관까지, 마주 오는 사람을 보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든 것 빼곤 온통 정신이 이 시를 읽고 또 읽는데 빼앗겨 있었다. 시인이 되겠다며 컨베이어벨트처럼 시를 찍어내고, 하루에 몇 편이고 쓰면서도 마음공부는 게을리 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나도 바다풀 공장이 있으면 취직하고 싶더라. "그만 손 씻을래."라며 펜을 툭 떨어뜨리는 저 시인의 마음이, 처음에는 아주 조금, 그 다음에는 조금씩 더 이해되면서, 아,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J코너의 '한국시' 진열대 사이에서 이 책 저 책 기웃기웃하시던, 연세 지긋한 한 할아버지의 빵모자가, 막 신촌 언덕을 넘어가는 중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정말 시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 읽는 사람으로. 시는 나를 갱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미학을 공부했던 무렵을 떠올리며, 나는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 최근에 나온 오타베 다네히사의 <예술의 역설>, 그리고 미학도들의 교과서와 다름없다는 박이문氏의 <예술철학>을 김선우氏의 시집과 더불어 한 손 가득 들었다.

  내게 미술 공부의 척추는 미학이었다. 미술사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학의 주변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덕분에 좋아하는 화가(카라바조)가 생기긴 했어도 나는 미술을 둘러싼 예술의 시대별 미학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공부하며 인간 정신의 역사를 추적해보고 싶었다. 각종 근대미학이 현대미학의 파격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고,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이 신진 학문의 도움을 받았던, 모더니즘이 그리하여 내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대목이기도 했다.

  학기 중에 이 책들을 다 읽는다는 것은 나의 지적 '게으름'을 고려해본다면 어려운 일이지만 미술 서적만큼은 곁에 두면 든든한 것이 언제라도 열어보고 마음 내키면 몇 장(章)이든 빠르게 읽을 수 있으니 좋다. 올해 여름 방학 중에는 마가레테 브룬스의 책 두 권(<눈의 지혜>와 <색의 수수께끼>), 래리 쉬너의 책 한 권(<예술의 탄생>), 허버트 리드의 것 한 권(<도상과 사상>)도 각각 재독한 뒤, 저 책들과 같이 긴 리뷰를 써볼 계획도 미리 짜본다.

 

 

 

 

 

 

 

 

 

 

 

 

 

 

 

 

 

 

  최근 <변강쇠가>의 발표 준비 때문에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 두 권이 있다. 두 책 모두 '그로테스크'를 주제로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읽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이라, 훗날 서점 마일리지가 두둑이 쌓이면 구입해 내 서재에 꽂아둘 생각이다. 발표 탓에 어쩔 수 없이 발췌독만 하고, 곧 반납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혹 그로테스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에 이곳에 두 권을 소개해둔다.

  국내에 '그로테스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이론의 학자는 아무래도 바흐친이다. 하지만 볼프강 카이저도 못지않다. (필립 톰슨의 책도 있는데, 마땅한 번역본은 없는 듯하다.) 그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꼼꼼하게 공부해본 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로테스크의 어원을 쫓는 것은 동류의 책들과 같아 비근한 작업이라 하겠으나, 이후 낭만주의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로테스크의 사례를 다루는 그의 솜씨가 대단하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미술사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명한 그로테스크의 예를 설명하는 장들도 제각기 명료하며, 더불어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술과 연관된 부분만을 골라 읽었지만 연극과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예들, 가령 카프카와 토마스 만, 앨런 포 등 대표 작가들의 설명도 많다.

  다른 하나는 몸문화연구소가 편찬한 <그로테스크의 몸>이라는 책이다.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책이라 전문적인 분위기는 있으나, 막상 관심을 갖고 읽어보면 그리 어려운 주제들은 아니다. 어렵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라는 특정 영역을 연구한 수많은 시도들이 반갑고, 때문에 호기심을 더욱 자아낸다고 해야 옳겠다. 개인적으로는 "판소리의 기괴 혹은 그로테스크(서유석氏)"를 발표 준비 상 정독했는데, 그 외에도 현대미술과 관련된 "여성적 숭고와 아브젝시옹(김주현氏)", 루저와 '재현된 몸'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몸인가, 그로테스크한 세계인가(최은주氏)"도 흥미롭게 읽었다. 단, 각주가 튼실하지 않은 것이 흠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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