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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4
책을 펴보니, 맨 첫 장 검은 바탕 위에 ‘보안성검토필’이라는 종이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 그랬다. 군대에서 읽은 책이다. 나와 유독 친했던 한 후임과 중국, 인도, 네팔의 지도를 펼쳐놓고 군생활의 말년을 여행계획 세운답시고 엄청난 종단&횡단의 루트를 짰던 추억이 떠오른다. 여행을 꿈꾸는 것은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타지에서 느낄, 하지만 아직 느끼지 않은 이질감이 무서움을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 인연들, 그리고 풍경들이 나의 생에 어떤 선물이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에 이르기까지. 이병률氏의 제목처럼 그건 “끌리는 것”이다. 하여 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했던 내겐 더욱 그러하다. 또한 책 곳곳에 실린 사진들도 참으로 아름다워 눈요깃감으로도 좋지 않은가!
<여행생활자(유성용氏)>와 <구름 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최갑수氏)>, <미애와 루이, 318일간의 버스여행(최미애氏)>, <김홍희 몽골방랑(김홍희氏)>, <아메리카 로드(차백성氏)>,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아리프 아쉬츠)>, <거대한 시간의 도시에서 나를 보다(권삼윤氏)> 등 여행에세이들을 손에 잡히는 데로 구해 읽고도 뭔가 더 읽어야 성이 찰 것 같았을 때, 나는 이병률氏의 산문집을 샀다. 군대에서 나는 (전에 말한 <허삼관매혈기>를 포함해서) 이 책 저 책 많이 빌려줬었는데, 이 책만은 관물함 속에 넣고 홀로 홀짝홀짝 넘기면서 봤다. 내가 쌓고자 하는 추억의 앞에서는 조금 이기적이어도 괜찮겠지 않겠느냐는 심보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어디어디를 갔는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봤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결국 나는 그의 글에서 뽑아낸 소중한 글귀들을 내 인생에 어떻게 심어놓을 수 있을지, 그것이 나에게 있어 중요했다. “배워야지.”라고 잔뜩 벼르고 이병률氏의 에세이를 펼쳐든 것은 아니지만 이미 첫 대목에서부터 열정을 일컬어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의 삶을 반성하도록 꾸짖었다. 모든 것에 대한 의심 없는 시선과 사랑이 <끌림> 안에는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의 열정에 ‘몸을 맡겨 흐르다 보면’ 그의 체험과 나의 체험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곧 있으면 다가올 1초 뒤의 나의 시간들이 연상된다. 용기에 찬 환상들, 아니 계획들. 그러나 힘을 준 계획 앞에서 나는 늘 무너지지 않았는가. 소심하게. 그러나 이병률氏는 말한다. 계속 가라고. “차곡차곡 쌓은 환상을 넘겨보려면” 가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도” 봐야 된다고 한다. 하기야 삶은 무너진 탑 쌓기라고, 그렇게 회자되곤 하더라.
여행 에세이들은 치명적 단점이 있다. 이병률氏도 “한 여행자의 개인적인 경험 혹은 인상은 함께 동행하지 못한 사람에게 허황된 허사에 그치기 쉽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의 글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느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겸손한 저자들이 ‘허사’라 부르는 감정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나름의 꿈을 자신의 인생에 새겨 넣게 된다. 다양한 여행 경험을 한 이들의 생각을 짐작해보는 난해함에 빠져보기도 하면서 감성의 스펙트럼도 넓힐 수 있다. 그리고 <끌림>은 순전한 개인의 경험만이 투영된 에세이가 아니다. 나는 그 점이 참 좋아 관물함에 넣고 조금씩 꺼내 읽었던 것이다. 생각의 깊이, 삶의 가르침, 소중한 지혜, 우리의 일상에 있어 자주 잊히는 것들에 대한 상기.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우주를 사랑하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처럼 느껴지고, 미술을 사랑하면 모든 화가들이 다 나의 사랑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무언가를 느끼고 안다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안으로 집어넣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모두 마음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아 충만한 상태가 되면, 하이데거의 말처럼 남에게 그것을 나눠줄 수 있는 개방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한 작가의 10년이 넘는 여행과 그 경험담이 쏟아져 나와 제각각 소박한 지혜를 알려주는 이 책을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