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2011.11.24

  네이버에서 미술 블로그를 3년 정도 꾸려가며 나는 많은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후기 고딕에서 르네상스, 그리고 마니에리스모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시기를 즐겨 공부했고, 얼마간은 모더니즘에 푹 빠져있기도 했다. 하지만 책으로 미술을 접하는 것과 직접 작품을 보는 것은 때론 별개의 일이 될 때가 있기 때문에 “아는 만큼 보이는 것”만큼이나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도 있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블로거들이 코멘트로 “저도 미술공부를 하고 여행을 갔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나는 늘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라고 답해주곤 했다. 책 속의 미술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무렵, 나는 블로그를 관두고 그간 읽은 책들을 정리할 겸, 그리고 유능한 장서가들의 글을 찾아 읽을 겸 이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상당히 만족한다. 스스로에게 보란 듯이 바닥에 ‘책탑’을 쌓아놓은 뒤, 예전에 읽었던 것들은 조금씩 재독하며 정리하고, 안 읽은 것들 앞에서는 설렘을 한껏 느끼는 하루하루가 아주 마음에 든 것이다. 조금 정착이 되었다 싶었는지 얼마 전에는 그간 읽고 공부했던 미술책들을 나름 정리해서 혹시 “이 책 살까?”라며 망설이는 미술애호가들에게 조금이나마 리뷰로 도움을 주고픈 마음도 들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골라봤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공부할 목적으로 읽은 미술책이 아니었다. 반 고흐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때는 세잔을 공부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후기인상파 중에서는 두 화가가 아닌 고갱을 유독 좋아했다. 미술 문외한이었던 당시 내가 느끼기에 세잔은 (그와 관련된 미학을 먼저 접해) 난해했고, 반 고흐는 동화 같았으며, 쇠라는 비현실적이었다. 고갱의 시선은 나에게 익숙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첫 만남의 느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가 나는 알면 알수록 반 고흐에 집착하게 되었다. 솜씨 좋은 우리나라 저자들의 책을 읽고 난 뒤, 그리고 샤마의 글과 영상을 접하고 난 뒤에 더욱 그러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이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있었다. 초상화를 보며 이토록 서러운 감정을 가진 적은 렘브란트 이후 처음이었다. 미술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그림을 그린 뒤,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정말 미친 듯이 그림을 몰아 그리면서 광기의 실체와 사투를 벌인 그는 그림 속에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를 아는 전 세계의 미술팬들이 그의 명성을 만들어줬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렘브란트와 함께 서양 사람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경외가 아닌, 연민의 관심이라는 것이 또한 그를 대단히 특별한 화가로 만들어줬다. 

  그는 기복이 심했다. 1882년 3월 중순에 쓴 편지는 이렇다. “돈에 쫓겨서 잠시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끄는 작품을 만들어내면, 그 결과는 늘 불쾌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당시 반 고흐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대개 연필과 목탄, 분필 등을 이용해 그린 그림들인데, ‘사람’을 그린다는 느낌을 그 누구라도 쉽게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사람에 작은 괄호를 친 이유는 “반 고흐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사람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쓰러져 가는 누군가를 그림 안에 넣어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고, 실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도와주려고 했던 여인은 반 고흐의 무서운 집착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한편, 그가 경제적 이유로 여인과 헤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는 순수한 행동이다. 그는 같은 해의 한창 더울 무렵, 동생 테오에게 “만일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런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재차 밝혔다. 그는 색채의 강렬한 힘을 느꼈고, 진정으로 행복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들판, 숲속, 언덕, 복권 판매소, 교회 등에 나가 사람들을 그렸다. 동생 테오에게도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가족과는 다소 사이가 안 좋았지만(그는 부모님이 자신을 ‘개’라 여길 것이라 짐작했다.) 열정은 그대로였다. 그는 밀레를 ‘화가들의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법을 조금 바꾸는 시도를 했다. 한 때 파리의 화가들을 일컬어 “너무 밝은 색만 쓴다.”며 불만을 드러냈던 그가 밝은 색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 머물며 그린 꽃 정물화들에서는 이전의 흔적이나 특징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 무렵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개인적으로 그의 편지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이었다. 미술을 탐구하고, 수많은 책을 접하며 그것을 남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가 여동생의 활기 넘치는 삶을 위해 한다는 조언이 “공부를 하지 말고, 춤을 배우거나 연애를 하렴.”이 아닌가. 아마 화가의 삶을 살며 느낀 자유와 열정 사이에서 그가 그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감각을 중요시한 것처럼 보이는데, 애정이 듬뿍 담긴 그 편지의 구절을 읽으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아봤다. 그러한 반 고흐의 삶은 어떠했는가 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만 그 ‘자신’은 그를 구렁텅이에 몰아넣곤 했다. 아를에서의 삶이 그러했다. 그곳에서 일어난 고갱과의 다툼은 미술사의 전설 중 하나로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고갱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곤 한다. 반 고흐가 귀를 통째로 잘랐다는 괴담(실제로는 귓불만 살짝)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대체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따금 좋아질 때도 있었는데, 미술사가 샤마는 “그의 편지 중 일부는 진정성이 없는, 자기위안과 암시를 위해 쓰인 것이다.”고 주장할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가 바로 ‘반 고흐의 노란색’이 탄생한 때였다. 1888년 8월의 편지에서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돈 문제가 그의 열정을 식히고, 정력을 소진시킨 것이다. 그리고 가끔 동생에게 그런 문제를 가지고 싫은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럴수록 그는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테오는 그의 그림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고, 한편으로는 편지를 보내 형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하지만 반 고흐는 지칠 때로 지쳐 가끔 일어나는 발작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다. 동생에게는 “너무 일에 찌들지 말고 너 자신을 돌봐라. 너희 부부 모두 말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발작이 그의 그림 그리는 능력을 앗아갈까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편지에 쏟아내는 미술에 대한 열정은, 문외한인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나, 이 시대의 모든 미술가들이 본받아야 하는 순수함이다. (홍경한氏가 <퍼블릭아트>에 쓴 칼럼을 보면 우리나라 화단(畵壇)에서 순수하게 미술활동으로 월수입 10만원도 건지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종 아트페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평론가들은 젊은 화가들이 미술경매시장의 생리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한 방’을 노리는 경향이 있다며 쓴 소리를 하곤 한다.) 또한 자신에게 호의적인 평론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란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겸손 역시 좋은 귀감이다.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 허덕일 때, 그의 작품들은 큰 성공을 거뒀다. 아이러니이다. 전화위복의 시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890년 7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리고, 29일에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정신적으로 극도의 불안과 큰 편차를 보였던 화가가 어떻게 이런 아르다운 작품들을 만들었느냐고. 그것도 단 몇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부르거나, 혹은 천재와 광기 사이의 연관을 밝힌 여러 분석학적 도서를 접한 뒤 “아하!”하고 무릎을 친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반 고흐의 편지에 담긴 그의 치열한 성찰과 열정이다. 그의 작품들이 천 억 원이 넘는 고가로 팔렸다고 해서 괜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충격 그 자체일 것이다. 

  책을 덮고, 일기장을 펴본다. 나는 과연 무엇에 미쳐 있는가. 그것에 관한 어떤 성찰의 글을 쓸 수 있는가. 십자로의 한복판에 한참을 서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석양의 하늘 위로 까마귀들이 하나 둘 밀밭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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