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V.S. 네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차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름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난 3년간 네이버 블로그에 나만의 미술공부를 연재해오면서 소설책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다행이도 늘 벼르기만 하던 문제를 등하교 시간(대략 3시간이 조금 넘는다.)을 쪼개 해결하자는 계획이 지난 학기에는 꽤 잘 실천되었던 것 같았다. 소설에 잘 집중하지 못하던 예전과는 달리 솔제니친도, 쿳시도, 위화도, 그리고 카프카, 레싱, 흐라발, 사라마구도 한 권 씩 다시 읽었고,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도 그 중 한 권이었다. 개인적 취향 탓인지, ‘재미’로만 점수를 매겼을 때는 <미겔 스트리트>가 단연 으뜸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사실 글이라는 것은 동일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더라도 “어떻게 표현되는가?”로써 현격한 수용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재미’ 역시 글의 큰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다. 희극도 아니다. 블랙코미디이다. 독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단 한 대목도 독자들을 웃길 수 없을 것이다. 나이폴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을 트리니다드의 한복판에 떨어뜨려놓은 뒤, “그들(소설 속 인물들)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독서의 호흡이 유난히 긴 독자라면 책을 덮은 뒤 “여기는 어디이지?”하며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나이폴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건 분명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일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 모른다는 것, 즉 “그걸 다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고, 때론 격정적이며, 루머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전해 오는 기준이 없는 자유에 기댄 자기 확신은 있어 줏대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지 모른다. 쉽게 말해 그냥 이러니 저러니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런 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가족을 패면서도 “원래 그랬어.”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은 물론이고, 공부 잘 하는 이를 시기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도 있다. 이들의 판단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종’되었다. 나이폴은 그런 트리니다드의 1930~40년대의 삶을 그렸다. 

  별로 어렵지 않으니, 축구에 비유해보자. 흑인들은 운동신경이 유독 좋다.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축구를 시작해 재능이 있으면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는다. 그래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 만약 재능을 놓고 보자면 아프리카는 축구 선진국들로 넘쳐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축구는 개인이 하는 운동이 아니다. 팀을 구성하는 선수들과 재원을 대주는 구단주와 협찬 기업들, 구단을 감독하는 이사진들, 그리고 팀을 응원하는 팬들과 광고업계가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단합을 할 정신적 ‘응결점’이 있어야 한다. 역사도 필요하다. 때문에 유독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전문가들은 “흑인들은 단결심이 없다.”는, 가히 인종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진단을 내놓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온라인 댓글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빈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기비하적 발언으로도 이어지곤 하는데,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도와줬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국민들의 생각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들의 스펙트럼은 큰 편차 없이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열등감이다. 

  요컨대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Give me Chocolate”라는 영어는 알았다는 우리나라 전후(戰後) (그들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미겔 스트리트>와 우리가 일견 닮은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있다. 소위 욕된 말로 “양놈, 양년”이라는 표현으로 타민족의 경시하는 태도가 있는 반면, 스스로 한국적 자부심을 벗어던지고 “이깟 나라”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너무 격양되어 극우로 빠져나가기 일쑤인 민족주의자이며, 후자는 근본 없는 이국주의자이다. ‘우리’라는 말은 극도의 공감, 혹은 경멸이 가득 담긴 어조로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이 책을 덮으면 “나는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에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내적 성찰에 이르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만약 이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겔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도덕적 쾌락’, 쉽게 말해 ‘알코올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중독자들은 도덕적 계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올바른 방법을 사회적 계획안에 새겨 넣기 위해 구성원들은 수많은 고민과 자기반성을 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판단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기준 중에는 지금 사용하지 못해 버려야 할 것들과 앞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만약 이 판단을 타인에게 유보한다면 우리는 뭔가 얻어 탄 편안함을 당장이야 느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회피할 기회나 도피할 장소를 궁리할 수밖에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된다. 남을 때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누굴 죽이거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폴은 분명 트리니다드의 역사를 말해준다.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명백한 역사의 한복판이고,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바이다. 그것을 소위 “‘영국물’을 먹었다.”는 작가가 비판적 시선을 통해 “그대로 노출”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소름끼치게도 우리의 상황과 그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대개 흑인이고, 우리는 대개 한국인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미안과 도덕의식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리라. 하지만 그 차이가 “막 식민지에서 탈피해 아무런 민족의식과 전통도 없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그들”과 “세계 11대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의 차이여야 할, 소위 ‘낙후된 곳’과 ‘문명화된 곳’ 사이의 차이라고 흔히 인식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겔 스트리트>를 일컬어 ‘블랙코미디’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문명 우월론은 따위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차별적 발언, 우생학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진리라 여긴다. 하지만 돌아보기에 우리가 “우리는 다르다.”라고 자부하는 사회의 일면에서 “대체 뭐가 다른데?”라고 반문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진다. 고칠 것이 많은 사회 앞에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모름지기 ‘배운 자’의 도리임은 알지만 이 사회를 끝까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자연스러운 점, 그 사실의 생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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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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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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