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나에게는 되도록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때문에 책날개가 별도의 커버에 붙어 있고, 그곳에 저자소개가 있는 책이라면 보통 뒷날개에 있는 해당 출판사의 여러 추천도서목록들만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짝 옮겨 적어놓고, 커버는 버린다. 책 읽을 때 거추장스럽게 덜렁거린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나는 독서에 앞서 되도록 저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나’를 책과 대면시키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생각을 지지하여 요런 내용을 썼고, 결론은 고로 이렇소.”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한 번 접한 작가의 성향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의 책을 연이어 읽을 때에는 위의 노력이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판단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것이라 배워온 나에게 저자소개와 서문은 항상 맨 마지막에 접해야 하는 정보 즈음이 된다. 브랜드 이름만 보고 옷을 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서일까? ‘홍세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한겨레’가 어떤 성향의 언론인지도 몰랐을 때, 내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고, 사회를 포용하고자, 혹은 판단하고자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던 탓에 홍세화氏가 한국과 프랑스 사회를 비교하며 펼쳐놓은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문화집단 사이를 비교할 만한 판단능력이나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고등학생 무렵, 나는 시드니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낯선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이도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문화에 중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야 우리나라의 위상이 보인다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당시 득세하던 백호주의, 풀어 쓰자면 ‘백인 호주사람 우월주위’의 냉담한 시선 탓에 상처받은 것은 지금도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데.”라는, 정에 이끌린 판단을 하는 우를 범했고, 한국에 돌아와 훗날 홍세화氏, 진중권氏, 박노자氏, 그리고 강준만氏의 신랄한 책을 읽었을 때에 그 ‘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도타운 정보다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민족’은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언급된 극우주의자들의 득세가, 발매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어제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어떤 시기와 상황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치와 파쇼는 사실상 히틀러처럼 “우리민족의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다며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잘 선전할 수 있는 달변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어제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보고서들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위험수준에 돌입했다는 잠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정말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타락이 벌어졌고,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하며, 극우주의와 전체주의가 각 국가의 불편한 경제상황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중이다. 지젝은 월가 시위대들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의 ‘극강 공산주의’를 재차 주장하며, 실패한 사회주의의 전략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시금 세계의 조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월가’는 건재하다.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돈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요와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써의 삶을 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까닭은 “원칙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회의적 평화주의 때문이다. 반면, 극우주의와 전체주의는 분명한 타겟과 방법을 지닌 명확한 행동을 한다. 히틀러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런 진단들을 여러 칼럼을 통해 읽어봤다. 독일에서 최초의 공화정이 실패하고, 온갖 정당들이 루머와 자기고집으로 집권하려고 했을 때, 그 때 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아니 “독일인만의” 움직임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다시 말해 극우주의자들이 나치를 반복하려고 한다는 거센 비난이 독일 사회 전면에서 제기되면서도 그들의 활동은 현 정권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고집쟁이가 극우주의를 만나, 만약 노르웨이의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면 오늘날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떤 저항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원칙에 입각한 판단을 견지하며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상대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책이다. 박노자氏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그럼에도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줬다.)”이라면 홍세화氏의 이 책은 “한국에서 타국으로 나간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런데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로 봐도” 한국사회와 문화에는 우리가 자부하는 것 자체마저도 비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잘못된 코드, 혹은 DNA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홍세화氏는 특유의 명료한 문장과 신랄한 주장, 그리고 되도록 양비론을 지양하는 태도로써 독자들이 ‘쎄느강’과 ‘한강’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한다. ‘쎄느강’을 마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문에 만약 그가 프랑스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면, 비유컨대 그 글은 프랑스인들이 읽은 ‘박노자氏의 책’이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홍세화氏는 프랑스문화에서 본받을 것들을 추출해서 이 책을 엮었다. 겨냥된 독자가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긍정적인 면들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개성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회, “어떤 돈인가? 어떤 권력인가?”에서 ‘어떤’이 자주 생략되는 사회, 사람이 아닌 직분을 만나는 사회, 토론문화가 퇴보된 사회(우리나라 정치인들 토론회 하는 것을 한 번 보라. 이따금 대학생 토론대회라고 방영하는 케이블방송의 TV토론회를 보라. 그러나 정작 창피한 것은 나 자신도 토론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해본 적은 거의 없고, 배운 기억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홍세화氏는 프랑스 방송편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줄이고 토론 프로그램을 살린다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리’와 ‘인권’ 등을 주장하며 반대하겠지만 토론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분명 좋은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잘못된 언어생활과 ‘언어’의 수능화로 점차 떨어지는 한글사랑,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론이 정말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었던 사회, 언론의 양비론과 부족한 윤리의식, 상(賞)이 갖는 권력의 재확인,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회, 좌우편향이 심해 지진이 일어나는 사회, 세대 간 공유되는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사회. 

  작금의 수치스러운 세태들이 괜스레 오늘날 사회 이곳저곳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니 토론이 없고, 윽박지름만 있으며, 안철수 교수가 말한 “문제인식의 공유”는 세대 간의 차이, 좌우의 차이, 혹은 강남과 강북, 대학교 이름, 아니면 지역 간 차이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문제제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심각성에 대해 추호의 고찰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가 출판된 때가 20세기였다는 것을 고려해 봐도 우리 사회는 뭔가 나아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 있는, 쉽게 말해 사람은 같은데 옷만 바꿔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체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혹은 기술적 조류에 맞춰 “트렌디한 것”을 마치 ‘선도’하는 나라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면 민족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회개혁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며 목덜미를 후려친 할머니가 어디 이 나라에 단 한 명이겠는가?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권을 부마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의 인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지나치는, 나귀를 탄 양반 같은 이들도 있다. 

  몇 년 만의 재독인데도 여전히 나 자신은 그대로이고, 문제제기는커녕 뭘 하느라 그리 바쁘고 어지러웠는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 있다. 홍세화氏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책들은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의식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세화氏의 글에서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회의적 인식이나, 혹은 여전한 편향적 인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갔는데 도저히 오늘 나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친구에게 물어본다. “오늘 머리 괜찮아?” 그러면 친구는 “괜찮아.”, “앞머리가 조금 이상해.”, “왁스를 너무 많이 바른 것 아니야?” 등등 의견을 말해준다. 이 의견은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해준다. 남이 좋다고 하니 하루를 당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어디가 이상하다면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손질해본다. 조언과 수정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라는 수준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대개 아파트 위층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의 아들딸은 몇 살이고, 집주인의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를 허상이 아닌 ‘실체’로써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 이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와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절반 남은 대학생활 중 얼마나 많은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특히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내가 그런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재확인했다는 것이고, 홍세화氏의 책이 많은 독려를 해줬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과 같은 역량, 용기, 그리고 집요함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의 유일한 꿈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마땅히 곁에 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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