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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2011.11.18
주요 석학들이 늘 하는 말처럼 비판의 글들은 모름지기 주제에 대해 언제나 성실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일부 집단의 이익을 대원칙인 도덕의 비호를 받는다고 설명하거나, 혹은 그것을 사익에 가져다대는 글들은 예리한 독자들의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에는 문제를 긁어 애써 부스럼으로 만들기보다는 문제를 그대로 직시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요즘 일부 칼럼들은 ‘공격과 방어’라는 단순한 메커니즘을 갖고 가볍게 던져지는 듯하다. 이런 글들은 대원칙을 훼손시킨다. 가령, 최근 정치관련 칼럼들은 ‘좌파 실종’이라는 전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아내는 힘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상대방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경향을 갖는다. 읽는 이에게 회의감을 주며, 그들은 대안의 실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대안의 텃밭인 대원칙에 대해 조금씩 불신을 보낸다는 것이다.
비판의 글이 가져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성질은 시의적절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띄워 그것들에 독자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하는 것, 즉 ‘공감성’이다. 이는 대체적으로 잘 지켜지는 듯하며, 여러 문제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관심 가질 것을 요구하는 글들이 많다. 특히 우리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주민에 대해 ‘보편인권’을 호소하는 글들과 여러 포럼들이 개최돼 근본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최근의 흐름은 매우 건강하다. 물론 칼럼과 포럼들이 실제 국민들의 행동에 즉각적인 변화를 형성할 수는 없겠지만 SNS과 블로그 등 자유로운 소통의 기반을 통해 인식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판의 글 특유의 차갑거나 뜨거운 분위기를 얼마간 사람의 ‘지적 체온’이 익숙한 온도로 유지시키는 위트가 들어 있으면 좋다. 특히 비유에 위트가 숨어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비유에 대해서는 장정일의 지젝 관련 서평 중 서문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자격을 갖춘 비판의 글들은 지식인들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탈바꿈시켜준다. 이 양심들은 구멍 난 사회의 옷을 꿰매어주고, 불붙은 뒷산의 화마를 진압해주며, 수술 도구도 없이 사람들의 지병을 서서히 치료해준다. 그런 점에서 일부 뜻있는 이들은 좋은 비판의 글들을 접해보기를 염원하는데, 나는 박노자氏(그의 조언대로 이제 타인을 언급할 때마다 뒤에 氏를 붙이는 것을 생활화해보고자 이렇게 적어본다.)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야말로 시대의 반성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몇 세대에 걸쳐 읽혀야 할 고전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초판 1쇄가 찍힌 지 이제 갓 10년이 되가는 책(올해 크리스마스이브이면 딱 10년이 된다.)을 일컬어 ‘고전’이라 부르면 터무니없는 소리라 하겠지만 이 책은 다소 특별한 점이 있다.
박노자氏는 외국인이었다. (얼마 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진보신당 입당을 위해 원서를 쓰려고 했는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그의 ‘교포 귀화인’이라는 특이한 신분이 현실적으로 많은 짐이 된다는 술회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제 3자’가 봤을 때, “한국이 왜 이렇지?”라고 생각되었던 부정적 측면들을 우리의 오래된 낡은 서랍에서 굳이 꺼내어 펼쳐 보인 책이다. 한국인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책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장터에 내놓을 만큼 ‘상도(商道)’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잘 안 팔리는 것은 둘째 치고, 왜 이런 물건을 장에 내놓았느냐고 쏘아붙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치부를 만인 앞에 드러낼 용기를 가진 이들이 적을뿐더러, 그것을 드러냈다고 한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질문들에 답할 마땅한 대안을 스스로 찾아내기 무척 어려웠다는 것이다. 일단 스스로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늘 어렵다.
예로부터 두 사람이 싸우면 둘과 전혀 상관없는, 즉 제 3자가 싸움을 조율해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했다. 객관이 도움이 되는 때는 많다. 박노자氏는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반성하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리가 반응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해보거나, 혹은 오만에 찬 부정을 하며 쳐다보지도 않는 것. 둘 중 하나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울은 어디를 향해 자신의 고개를 기울여줄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니, 나는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이 책이 시대의 고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챕터(3, 4부는 주제상 하나로 묶어도 됨직 하나 분량 상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들을 통해 박노자氏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이 사람 대하는 법에서부터 잘못되었다.”로 귀결되지 않나 싶다. 세부적인 내용을 파고드는 박노자氏의 예리한 눈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더라도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작위적 인식은 대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우리’라는 강력한 정서로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듯하다.
원인 중 하나는 한국의 현대성을 극찬한 공교육이다. 교육은 EBS의 모토대로 백년지계(百年之計)이며, ‘바른 사람’, ‘행동하는 지성’, 그리고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승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용되면 ‘세뇌’라는 불명예스러운 말로 불린다. 박정희에 대한 우리의 전근대적 생각이 그러하다. 나는 군생활 중 한 후임이 박정희의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한 번은 그와 함께 야간 보초를 설 기회가 있어 “왜 박정희를 좋아하느냐?”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경제개발과 베트남전쟁파병을 예로 들며 (경계근무 중에 물론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몇 십 분이고 작은 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열변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전 세대로부터 마치 ‘거룩한 성물(聖物)’이라도 물려받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베트남전쟁파병을 통해 대외적인 폭력을 보란 듯이 행한 우리나라의 ‘일제식 군국주의’가 찬양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역사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칼럼과 역사책들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설명을 읽고, 박노자氏의 표현대로 ‘일그러진 현대성’이 어디서부터 발원되었는지 알게 된 나는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표의 박정희 동상 방문을 두고 한 트위테리언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논하며 조용히 숨어 있는 ‘공주’가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동상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고 강력한 비난의 글을 올린 이유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살에 와 닿는 공감은 ‘아직도 폭력이 충만한 사회’를 통해 박노자氏가 우리나라 군대의 현실과 제대한 예비군들이 겪는 외상에 대해 비판한 부분이었다. 어제 집안 제사가 있어 친척들이 모였을 때, 내년이면 신검을 받고 군대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사촌동생에게 나는 “할 수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해줬다. 겸손하고 현명한 자는 2년이라는, 혹자들이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긴 시간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겠고, 때문에 그것을 변으로 삼아 핑계 대는 것은 호소력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내가 직접 겪고, 내가 일면 배웠던 일명 ‘갈굼’이라는 폭력에 사촌동생이 물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군대는 사회와 완전 별개인 집단이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 입대자를 물들여 병장 즈음 돼서 제대할 때에는 사람의 인성을 거의 180도 변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대체적으로 군필자들은 그들 나름의 ‘패거리 정신’을 갖고 있다. 정신적 고통을 견뎌 어떤 인격적 승화를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하는데, 이 얼마나 쓸데없는 행위란 말인가.
‘역사 속의 교훈들’이라는 조그마한 제목의 글에서는 얻는 바가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최근 읽은 기사와 칼럼들 중 여기에 보태어 생각할 것들이 있어 귀중한 부분이 되었다. 평소 ‘보편인권’이라는 대제(大題)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근래 들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어떤 실천적 대안(대안이라고 할 것까지 있겠는가 싶지만)을 고려해볼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차에 어제 <한겨레> 신문에서 ‘2011 아시아 미래포럼’의 논의 내용들을 소개해 준 대목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중 나는 ‘이주민에 대한 방송보도 패러다임’을 눈여겨봤는데, 복기해보자면 이렇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아시아판 전 편집장이었던 패트릭 스미스가 말하기를 “아시아 국가들이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자세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언론사부터 편집인에서 기자들까지 스스로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대학 교수가 적절한 답을 준 것 같은데, 그는 “국내 언론은 한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더 확대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넓혀 생각해보면 상업성에 물든 언론들이 중립적 감각을 잃고, 사람들이 별 관심 없어 하는 인권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요즘 한류에 유독 열광한다. 나르시스를 보는 듯하다. 나도 얼마 전 BBC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메인 화면에 한류열풍관련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뿌듯해하긴 했고, 한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들을 여럿 리뷰하기도 했는데, 박노자氏는 이미 이를 예측했는지 10년 전에 지금의 ‘환상’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미등록 체류자 인권’이라는, 김창보氏의 오피니언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역시 최근 들어 문제가 된 교과서 집필 누락 사건인데, 이는 사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한 국회의원이 안철수 교수에 대한 정치적 반격을 위해 안 교수가 언급되어 있던 교과서의 내용을 삭제했다는 기사는 사실 빙산의 일각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화항쟁의 내용을 앞으로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소식이다. (다행이도 이 글을 쓸 무렵과는 달리 최근 교과부는 상기 내용들을 누락시키지 않도록 조치했다.)이에 대해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잘못된 교과서 집필기준은 검열이며,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교과부가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집필기준에서 뺐다. 강요된 집필기준에 따른 자기검열과 교과부 검정을 거쳐야하는 위기에 놓였다.”며 열을 올렸다. 나는 이미 교과과정 중 배운 내용이고, 그와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들이 공영방송을 통해 충분히 방영되어 왔음을 알고 있던 터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지만 “어떻게 그걸 뺄 생각을 다했지?”라는 경악스러운 질문을 허공에다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국가가 어떻게 타국의 역사왜곡을 민족의 힘으로써 저지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분명 도덕에 입각해 그 대원칙에 준하는 진보를 이룩해야 함이 옳다. 그를 위해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주변을 돌아봐야 하는데, 우리가 2002년 월드컵을 응원하며 내뱉었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구호가 실은 우리 나름의 ‘우리식 환상’을 뒷받침하는 탄탄하면서도 강력한 초석이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믿기 힘들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부패가 실은 자긍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긍심을 잃으면 민족적 열망과 추진력도 사라지리라 누구나 예상하기 때문에 부패를 자긍심을 통해 기꺼이 가려왔던 것이 현실이라고 박노자氏는 말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도덕적 원칙이 있으나, 서해교전 시 우리나라의 막강한 화력에 격침당해 물귀신이 된 북한 병사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냐는 그의 말은 열렬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백 번 옳고 바른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우리라고 과연 백의민족 속에 감춰진 폭력과 부당함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의 추궁은 이어지는 장에서도 계속된다. 대학생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퇴폐한 상아탑’으로써의 대학, 특권집단으로써의 대학,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해 기업으로써의 대학도 비난을 받고, ‘우리’라는 감수성 짙은 담론을 통해 은폐되어 온 사건들이 드러나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는 1999년 8월의 ‘도의원이 인터걸 사업’이라는 <중앙일보>보도를 인용하고 있는데, 수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는 사건이었다.) 하고, 미국 등 우방을 위해서라면 역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행태도 파헤쳐진다. 마지막으로 바트자갈의 비극적인 사건(불법체류자를 착취한 영세 자본가들의 행태이다.)은 우리나라의 소름 돋는 ‘인종 서열주의’를 보여준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통과된 차도르 착용 금지 법안이 세계적인 논쟁으로 떠올랐을 때, 각 유럽의 극우파들은 자국의 경제사정도 좋지 않은데 귀화한 외국인이나 외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원리로 심지어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한 최악의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의 색이 옅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 비열한 사건의 발생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심리학계의 이론에 빗대어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냉혈안적인 시선이 “나는 불법체류자다.”라고 국내 체류 외국인들이 스스로를 각인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위의 칼럼 소개로 하나 짤막하게 대신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한 외국인 노동자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대체법안이 나왔는데, 그 법의 보호자는 ‘미취학 아동’뿐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현대적 지성을 상징하는 루쉰이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이런 구절을 적었고, 박노자氏가 그것을 서문과 뒤편 책날개에 옮겼다. <광일일기> 소제목 ‘9’의 인용구이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
루쉰이 하고픈 말은 이은 소제목 ‘10’의 한 부분에 교묘히 숨겨져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이것은 아마도 벌레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될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겁니다.”
박노자氏는 이것이 한국의 현대사회가 지닌 모습이라고 했다. 대가 렘브란트가 한국의 초상화를 그려줬다면, 우리는 어떤 걸작을 보며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었을까. 다양성과 평등을 외치며 어딘가 사회의 각박함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의 물꼬가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여전히 좋은 일은 간혹 나오고, 좋은 사람들은 강호에 숨어 소리 없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인생을 옭아매는 여러 부차적 ‘주체’들에 휩쓸려 다니는 ‘객체’가 되어 가고 있고, 판단력은 흐려져 정치하는 이들이 국민을 쉽게 우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자긍심을 믿어 도처에서 일어나는 악행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그것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이르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럴 무렵에 박노자氏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가 타지에서 책과 사상을 통해 사랑하던 조그마한 나라의 실제 모습은 달랐다. 뼈아픈 역사 속에서 신음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동안 우리가 누구를 죽여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잠재적 살인자였다는 것을, 그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단한 용기로 적힌 책이라, 곁에 두고 오래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