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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15
얼마간 읽을거리들을 쌓아놓고 보니, 최근 들어 나의 주제가 ‘인간’으로 좁혀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대략 일곱 권인데, 새벽을 꼬박 새는 부지런을 떨면 몰라도 다음 주까지 일일이 정리하며 통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독서의 씨줄과 날줄을 제법 촘촘히 해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책들에게 기대를 해봄직도 하다. 조만간 읽을 책이란 (재독까지 포함하여)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 1999), 노암 촘스키의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시대의창, 2005),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 강준만의 <입시전쟁 잔혹사>(인물과사상사, 2009),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001),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 2007),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다.
그에 앞서 지난 여름방학을 틈타 천천히 읽었던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자유론>(책세상, 2005)을 재차 읽었다. 후에 그의 <공리주의>도 접해야겠다고 벼렸기 때문(<자유론>에서 밀이 개인의 차원을 사회와 대비하여 서술했다면 <공리주의>는 사회윤리이다.)에 언젠가는 재독하고자 한 터였다. 미리 정리해놓은 바가 있어 읽기에 큰 불편은 없었지만 그의 고민이 담긴 문장은 곱씹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많아 여러 번 접한다 해도 술술 읽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주 얇은 책인데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무려 한 세기도 더 된 이 책의 위력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숙원은 먹지 않을 홍어처럼 그저 삭혀지고만 있는 것일까. 나는 대중들이 그들의 삶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듯 이 시대가 분명 변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행동’되는지 확고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직감하기 시작했다. 유명 저자들과 논객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세계는 분명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유의 포석을 밀의 <자유론>에 두고자 했다. 결국 나머지 일곱 권의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원칙(그런데 이것이 과연 흔히 말하듯 고리타분한 것일까?)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관도 한 몫을 했다. 때문에 이번 독서는 조금 길게 복기해본다. 마치 차서한 사람마냥 조바심 내며 읽었던 이번 여름의 기억이 아쉬웠기 때문이리라.
밀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은 자기 보호를 위해 타인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나, 다른 이유로는 불가하다.”는 말로 일축된다. 복기해보건대, 이것은 그가 말한 효율(utility는 곧 항구적 이익(permanent interest)과 같은 개념이다.)이 도출되는 원리이다. 쉽게 말해 “남에게 참견하기 위해서는 나의 참견이 반드시 남에게 유익해야 한다.”는 win-win의 원리이다. 바꿔서,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다.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경우에 사회는 간섭하면 안 된다.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명제로부터 밀은 ‘인간 자유의 기본 영역’이라며 세 가지의 경우를 언급한다. 그 전에 그는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바로 각 개인이다.”라고 못 박는다. 이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세 가지 기본 영역 중 첫 번째는 ‘내면적 의식’, 즉 속마음이다. 많은 이들이 역사를 회상하며 전제정치의 획일성 앞에서 치를 떤다. 오웰의 소설 <1984>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구절로 독자들을 옭아맨다. 이러한 역사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의사표현의 자유는 얼마만큼 허락되는가를 물으면 결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드니 로베르가 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의 서문에 적절한 예시가 나와 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아마 아주 유명할 것인데, 1970년대 말, 리옹 대학의 프랑스문학과 교수 포리송이 나치옹호발언을 했다가 옷을 벗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촘스키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자 프랑스인들은 촘스키를 나치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해명이 필요했던 촘스키는 자유가 무엇인지 프랑스인들에게 일러줬는데, 로베르에 따르자면 그 해명은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 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볼테르의 유명한 경구를 연상시키는 글이었다고 한다. 이는 밀이 말한 ‘자유’이다.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가 뭘 좋아하고 바라는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또한 결사의 자유도 갖는다. 무려 15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밀은 “사회가 설정한 성공 기준에 맞게 살도록 강하게 종용받고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개탄을 마지않았다. 우리는 ‘성공 기준’이 무엇인지 암암리에 알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그 기준에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수많은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리글리가 <나쁜 사회>에서 말한 ‘마태 효과(Matthew Effect)’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는 생존의 투쟁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 사회가 일종의 강제수용소와도 같다는 항간의 판단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개그콘서트(KBS)의 한 코너에서 모녀의 대화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사윗감으로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딸에게 어머니는 “너만 좋아해주는 남자면 좋지.”라고 운을 뗀 뒤, 속마음을 드러낸다. 둘째 아들에,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 키는 183cm에, 얼굴은 이병헌. 밀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다름 아닌 사회이다.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개인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왜 그런가?”라 묻는 것을 두려워하고, 혹 묻더라도 질문의 끈을 쉽게 놓아버리게 된다.
밀은 뭔가 말하려는 우리의 입을 잠시 막아놓는다. 그리고 두 가지 논리를 펼친다. 첫째, 만약 우리가 말하려는 의견이 진리인데 침묵을 강요당할 경우, 둘째 그 의견 중 일부만이 진리인데 역시 강압적으로 입이 틀어 막힌 경우이다. 여기서 밀은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서 파헤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자주 오류를 범하므로 판단에 있어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철저한 부정과 비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타파하라 호소한다. 관습적 사고란 믿음과도 같다. 루이스 월퍼트는 <믿음의 엔진>에서 그 ‘믿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고발한 적이 있다. 자유롭고 싶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통제와 압력 속에서 욕구를 이루지 못하면 점점 용기를 잃고 퇴화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채로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믿음에 자신의 신념을 맡기게 된다. 이에 밀은 말한다.
“전도유망한 지성인들이 소심해져서, 비종교적 또는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용감하고 씩씩하게 독립적인 생각의 날개를 펼칠 엄두를 못 내게 될 때,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도 복기해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밀은 자유가 용기의 산물이라는 시각을 철저하게 옹호한다.
두 번째 경우, 즉 우리가 하려는, 하지만 애당초 발언을 차단당한 말이 일부만 진리일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수학은 정답이 있는 학문임으로 예외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밀의 말처럼 ‘종합적 판단’으로써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는 이미 정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 혹은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 중 과연 충분한 토론을 거치거나 사유를 해 기존의 결론들이 합당한 것인지 고찰해본 이가 몇이나 될까. 이는 의지의 실종이기도, 혹은 각박한 삶의 피로일지도, 아니면 종용되는 기준에 합승하고자 하는 소시민적 DNA의 유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작업을 할 최대의 적격기인 대학 생활의 대부분이 취업준비로 와전되어 있는 상황을 가장 먼저 개탄해야 할 점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밀의 말마따나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하니, 오히려 튼튼한 근거를 가지고 서로 치고 박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것이리라. 다만 이런 풍토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비방과 인신공격이 자주 토론장에 등장하는 우리의 ‘정치적 언어 속성’을 결단내야 할 것인데, 밀도 “언어폭력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우리나라 10대들의 언어생활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이 ‘욕’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는 한 사회통계조사를 주목해봄직하다. 욕이 정감과 친분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욕의 속성은 타인에 대한 언어적 공격에 있다. 이는 도덕률에 어긋나는 것이다. 밀은 “악의나 비방의 정도가 너무 심한 사람이나 타인의 감정에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낸시랭이 비난받는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아직도 ‘파격’이라는 개념을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혐오의 어느 즈음에 놓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행동은 옐로우페이퍼들의 소위 ‘먹잇감’으로 다뤄지기 쉽다. 도발이 그녀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에 독설로써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도발에 대한 방어를 그들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 사실 현대예술의 신랄하며 노골적인 퍼포먼스들이 국내에 (조금 늦은 감은 있으나) 지속적으로 소개된 이후, 그것을 오판하는 이들은 그나마 많이 줄어들었다.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와 같은 종류의 학자적 성찰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의 가치나 사회적 효용을 묻거나, 그것으로부터 창의적 사고의 전형을 뽑아내는 서적들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자명하다. 현대미술 전시장에 들러 작품을 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교양을 위해, 혹은 지적 호기심을 위해 그것을 찾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의 소위 ‘식자(識者)’층들은 개념상으로나마 현대예술의 여러 특징들을 흡수하는 중이다. 하지만 국내 유명인사들 중 파격의 대명사라 불리는 낸시랭의 행동들은 항상 도마 위에 오르고, 상당한 공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우리나라 특유의 보수성이 지닌 맹점이라 진단하기에도 무리는 있다. 돌이켜보건대,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낸시랭 같은 이들이 비단 그녀 한 명 뿐이었던가. 그런데 밀은 이 ‘파격’을 옹호하며, 심지어 그것이 “인류에게 큰 봉사”의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주장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호소력을 가지는가?
밀의 원칙은 이렇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은 어떠한가? 한 세기하고도 반세기 전의 밀이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설명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우리는 항상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지인에게 “으레 그러한 것”의 전형적인 규범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먼 산에 있는 나무가 몇 그루나 되는가 짐작이라도 해보려는 심산으로 ‘창조’, ‘천재’, 혹은 ‘파격’에 대한 여러 일화들을 찾아 읽는데도 시간을 기꺼이 소비한다. 모순되는 두 태도 중에서 밀은 기꺼이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은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일찍이 모더니즘의 업적을 일컬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건이 좋지 않거나, 혹은 그럴 기회를 조기에 박탈당해 그런 삶은 사치일 수밖에 없는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기 식대로(his/her own mode)’라는 문구는 아직 소원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밀이 보기에 그것은 교육의 확대, 교통과 통신의 발전, 상업과 제조의 발달, 그리고 여론의 성장 등에 있는데, 사실 이런 현상들은 현재 활발히 진행 중에 있으며, 우리와 뗄 수 없는 현대사회의 특징들이다. 개별자들은 똑똑해도, 그들을 모아놓고 나면 바보가 된다는 속설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와중에도 관습적 사회의 모습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이 호소하는 바의 절절함이 대중매체의 여러 소식에 가려 들리지 않고, 여성들이 “예의 그랬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종의 사회적 ‘절차’들이 인정되면서 그들 스스로의 비판, 부정, 일상의 조소, 어쩌다 한 번의 반항 등이 기성 남성들에게 저항할 무기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낸시랭과 같은 이가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왕성한 정력, 강렬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미약하고 허약해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식자들이 갖고 있는 궁극적인 멜랑콜리라는 밀의 주장이 나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것은 일상의 도발이며, 현실과는 요원한 말이니만큼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 호소한다. 개인이 이처럼 자유를 가질 권리를 추구한다면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밀이 말하는 이상적 사회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용납하지 못하는 행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각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는 사회”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는 일부 반(反)종교적 성향을 지닌 이들에게 “종교가 없는 사회”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협소한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밀 역시 그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행동은 도덕에 어긋난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신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다.”라는 추론으로부터 나온다면 그것만큼이나 강력한 권한을 발휘하는 진단은 없다고 밀은 말했다. 그러나 종교가 설파한 진리 중에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그리스도교), 타인과 나로 이뤄진 사회의 그물(불교) 등 ‘자유’의 현대적 개념을 은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므로 뭔가를 “신의 이름으로” 하고자 하는 종교적 왜곡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종교는 사실상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세이건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이런 생각을 내비친 바 있다.)
그러나 밀의 <자유론>은 5장 ‘현실적용’에 이르러 여러 난관에 부딪힌 자유의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밀이 오늘날 태어나 이 부분을 다시 쓴다면 19세기보다 훨씬 큰 장애물들을 실감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밀이 각 부분들, 가령 독약 판매, 국가의 주류세 인상 혹은 인하, 간음과 포주의 문제, 이혼, 여성과 자녀의 자유, 교육, 무조건적 자유, 정부 권력의 분산 등은 여전히 여러 논쟁거리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상기해봄직한데, 밀은 여전히 그가 서두에 밝혔던 자유의 관점을 굳건하게 밀고 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교육 밖에 없다는 뉘앙스도 남겨놓는데, 이 부분에서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유독 교육열이 높다는 이유로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당한 열위에 놓여 있다. 암기식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필자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열린 교육’이라든지 ‘창의적 교육’과 같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들이 실행된 바 있었고, 오늘날에는 대안교육의 긍정적 부분들이 자주 소개되면서 “내 자녀를 과연 현 교육시스템에 맡겨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학부모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나는 교육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런 문제들을 부모님으로부터 자주 접하곤 했는데, 사실 그럼에도 문제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의 방법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는 귀추를 주목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어떠한가? 오늘날 대학교들이 전(全)인문화 과정이 통한 대학생들의 전인화를 꾀하지만 정작 대학생들은 취업을, 고등학생들은 대학진학이나 고졸 후 취업을 목표로 하게 된다. (기업이 예비기업인을 낳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형국이다.)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든 그것이 향한 결과는 같으므로 교육을 통한 인식 향상의 질은 나아질지 몰라도 결과적 상황은 비등하다. 예부터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이 사회에 양산되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떠한 변화를 시도했는가는 미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대중이 문화전체주의에 빠져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참신한 ‘자유의 시도’들은 대개 폄하되기 일쑤이고,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free not to be free, 이는 노예에 대해 쓰는 말이다.)를 쫓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밀은 “최소한(any tolerable amount)의 상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상식이 있다. 배우는 것도 많다. 하지만 ‘내면의 힘(inward forces)’은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자유는 목적 그 자체로써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몇 안 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행복을 위한 자기발전은 인간의 생명원리를 구성한다고까지 밀은 역설한다. 그리하여 그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는 유명한 유행어를 남겼다.
모든 것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노래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며, 때론 자유를 말살시킨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삶의 주체라고 여긴다면 우리의 자유가 강탈당하는 현장을 보고 그것에 대해 묵인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가 실종되는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미온한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양심의 추락(Disgrace of conscience,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에서 인용해봤다.)’ 말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사회와 개인에게 요구되는지 나는 아직 질 알지 못한다. 다만 생각해보건대, 이는 대체 어느 부분 있어서 우리의 양심이 부족한가를 먼저 알아보는 고통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반죽도 안 만들었는데, 맛있는 김치전을 어떻게 만들겠냐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심한 용기를 일으켜 몇 권의 책을 더 읽기로 했다. 밀은 그 방향을 알려줬다. 150년 전의 고전이 도저히 고전으로 읽히지 않은 것이 많은 반성을 하도록 하며 말이다. 그가 바란 희망을 우리가 성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