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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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별안간 우주를 공부하고 싶어졌을 때, 교보문고에 달려가 잘 모르는 과학서적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수많은 책들을 기웃거리다 고른 책이다. 이것과  미치오 카쿠 박사가 진행과 내레이션을 맡아 인상적이었던 <Time> 4부작(BBC)을 기억해낸 탓에 그의 <불가능은 없다>도 함께 샀다. 그나마 대중적인 우주과학 입문서인 (교수의 추천으로 산 것이지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도 다 읽지 못했는데, 무턱대고 “세이건의 책이다!”라며 집어든 까닭에 후회는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다. 그런 책들이 책장에 몇 권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기우가 많은 편이다. 

  이 책은 도킨스와 궤도를 같이 하면서도 공전궤도는 조금 긴, 쉽게 말해 에둘러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인으로써 꼭 주목해야 할 논제의 성찰들이 현실과 논리,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한복판을 지나가며 잇달아 세이건의 검증을 받는다. 그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으리라 판단되는 어떤 의견에 대해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입을 틀어막는 몰상식한 저자가 아니다. 두 눈 중 하나는 우주에, 다른 하나는 지구에 둔 과학자의 입장에서 세이건은 우리, 즉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앞으로 사람들이 어떤 접근방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내다본다. 특히 그는 종교를 말한다. 항간에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널리 시판되는 책 중 종교를 언급하지 않은 책이 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의 트렌드이다. 재미있는 것은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국내에 초판된 것은 작년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가 1985년 스코틀랜드에서 한 강연의 일부를 엮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후대 사람들인 우리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연 세이건이 말한 문제들이 얼마나 해결되었으며, 그의 호소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곱씹어볼 좋은 기회와 진배없다. 

  얼마 전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을 접했을 때에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인간이 하는 행위 중 일부(혹은 전부)는 도무지 믿을 바가 되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위해 착각을 하며, 그것에는 진화학자들이 “믿음의 DNA적 요소”라 부르는 특징적인 속성들(세이건도 그 중 ‘충성’이라는 요인에 대해 이 책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이 있는 듯하다. 종교가 그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월퍼트의 논점은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에게, 혹은 지성인들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수용되지만 인간의 창조 앞에 뭔가가 더 놓여 있다는 고증을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도발 그 자체이다. 도킨스가 그것을 종교의 병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양극으로 끌고 나가기까지 했는데, 사실 근거를 갖춘 논리로써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종교 특유의 감정적 조응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논제를 “신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닌 “신은 존재한다.”는 제 1원리의 구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셀무스를 위시한 중세의 대(大)신학자들이, 오늘날에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간단히 입증한 것처럼 보였던 일과는 논리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의 권위는 강력하고, 그것의 인기는 점점 높아진다. 과학이 도덕과 윤리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닌 반면, 종교는 과학이 지닌 단점의 반대 방향에서 그것을 장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때론 염세적이라 비판까지 받는) 지식보다는 데카당스와 같은 현 상황을 타개할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지각 수준에서 모든 것을 결론짓는 것은 안이한 태도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이건이 결국 주장하고픈 바가 여기서 도출되겠는데, 만약 난관에 봉착한 우리가 비관적인 상황의 분위기를 전조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명확한 근거”를 갖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주를 비롯한 인간, 그리고 지구와 ‘존재의 개념’을 근거에 입각한 ‘사실’로써 인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를 통해 우리는 수 백 년 전의 사람들보다 더 확실하게 세계의 구조를 알게 되었고, 우주를 바라보며, 그리고 수많은 종들의 진화를 확인하며 “멸종이 대세이고, 생존은 오히려 예외이다.”라는 자연계의 진위를 발견했다. 그 결과 현재 인류가 행하고 있는 행위 중 ‘멸종’과 관련된 급박한 문제들은 진정 “급박한” 문제로써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이건은 그 문제들 중 하나로 핵문제를 든다. 그 때가 1985년이었는데, 그로부터 (정확히 필자의 나이에 1년을 더 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과연 해결되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세이건은 2장인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에서 소제목과 같은, ‘지구중심설을 주장하려는 이들의 논점들’이 어떠한 근거로써 반박되어 왔는지 다음 장인 ‘유기 우주’에서도 여러 사례를 통해 소개한다. 실험과 실측, 그리고 과거 사실들을 반박하는 새로운 추론들은 적어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스킵(skip)’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에 입각해 원인의 원인, 그리고 그 원인의 또 다른 원인을 통해 결국 모든 결과들을 낳게 되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처럼) 대(大)원인을 찾아가는 무모한 여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근거는 적어도 “왜 그것이 근거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주석을 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과학이 밝힌 바를 반론하려는, 주로 종교의 의미를 우주에서 애써 찾으려는 사람들은 세이건의 말마따나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은데서 연유한 오류”로부터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결론으로 반드시 끌고 가려는 절대목적론을 견지한 자세(나쁘게 표현하자면 억측)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 그 자체로써의 자세이다. 과학은 근거가 없는 한 신이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반면,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 자세를 세이건은 매번 확인시켜준다. 

  이어 세이건은 ‘외계의 지적생명체’와 ‘외계인 민간전승’이라는 재미있는 챕터를 통해 “감정적 경향이 작동”한 인간의 특성들을 다채로운 사례와 재기 넘치는 비유로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종교를 짚고 넘어가고자 하여 미리 깔아놓은 포석이다. 우주과학자들은 외계의 지적생명체와 최소한 교신이라도 주고받기 위해 여러 작업을 수행 중에 있고, 아마 세이건도 당시(1985년)에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오늘날의 연구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겠지만 조만간 우리는 언론매체의 보도와 NASA의 발표를 통해 “지구의 외부(이는 주로 타행성을 의미하며, 대체로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명체가 살 수 없으리라 기대되지만 대기는 존재하는 행성이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지구에서 발견했다.”라든지, “수퍼지구를 발견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우주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지적존재가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모두 과학이 밝혀낸 것이다. 우리의 ‘우주적 기대’는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세이건은 “그렇다면 종교란 어떤가?”를 언급한다. 그는 묻는다. “왜 하느님은 극히 제한된 장소에만 제한하는 걸까요?”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처럼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지극히 편협하고 소심하다.”고 찔러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면 종교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는 최소한의 회의를 내비친 것은 확실하다.  

  ‘외계인 민간전승’에서의 논리는 더욱 강력한데, 그 이유는 UFO 일화들이 갖지 못하는 결정적인 성립 조건, 즉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과 “이른바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UFO 목격자가 나타나면 그것이 보도된 이후 너도나도 UFO를 봤다는 제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며, 그런 경우에는 귀신, 화이트노이즈 등 일종의 ‘예언류’, 혹은 ‘기적류’의 사건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그리고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와 같은 심리학 서적들)에서 충분한 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이 종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자명하게 알게 되었다. 즉, 우리는 누구나 한 번 쯤은 거짓말을 했고, 그것이 경우와 정도, 그리고 규모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개 “틀리거나, 옳지 않지만”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믿기 위해 열성적인 노력을 투자하곤 한다. 신앙이 이런 방식으로 상호 보조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스스로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빌미로 일어난 비극적, 혹은 비상식적 사건들의 폐해를 몇 가지 언급한 뒤,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초월적인, 윤리와 도덕에 관한, 세계의 기원에 관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제들을 다룰 때에도 최소한 회의적이며 엄밀한 음미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여섯 번째 챕터에서 세이건은 본격적인 종교적 가설들을 논리적으로 고찰해본다. 학자들 중에는 신의 존재를 악착같이 부정하는 이들도, 혹은 아인슈타인처럼 “우주의 물리 법칙의 총합”을 신으로 여기는 이들도, 혹은 세이건처럼 논리를 바탕으로 그 존재에 대한 가능성은 인정하되 역시 반대의 가능성을 갖고 약간의 회의를 던지는 이들도 있다. 세이건이 제안하는 논리와 고찰 방식은 대단히 건강하다. 그는 과학자의 태도를 견지하며 항상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양방향으로 모두 소통한다. 종교가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의 뜻으로부터 도출하며 열린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순기능과 비교하자면 매우 안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이건은 이 챕터에서 여러 가설들을 소개하고, 그 가설들이 묻지 않는 질문의 원천에 신이 있으며, 그것을 묻는 것은 거의 금지되거나 기피되며, 특히 “신학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어떤 논제를 검증하기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실험이란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때론 그 가설들 중에는 앞서 말한 안셀무스의 경우(“하느님은 완전하다. 존재라는 것은 완전함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한다.”라는 논증인데,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는 “완전함이란 무엇인가?”라고 바로 물을 수 있다.)처럼 ‘말장난’인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적 논지들의 대부분에 대해, 만약 우리에게 열렬한 신앙이 없다면, 확신을 갖지 못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경험’이라는 제목의 일곱 번째 챕터는 그 경험(특히 그리스도교의 경험)이 화학(여기에서는 약물이다.)적으로 일어나는 가능성, 그리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경우 등을 근거로 언급하며, 교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고찰하는 장이다. 재치 있게도 세이건은 이반 투르게네프를 인용한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든지 간에, 인간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셈이다. 각각의 기도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다음과 같은 뜻이다. ‘위대하신 하느님, 2 곱하기 2는 4가 아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더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수학시험능력평가에서 등급이 7밖에 되지 않는 학생의 학부모가 “제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새벽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다. 사실 종교적 특성상 기도의 기능은 통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이건 역시 현명하게도 그것의 기능적 측면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각자의 몫에 만족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곧 기도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기도가 반드시 그래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래온 역사는 종교가 정치와 어떻게 엮여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세이건은 말한다. 아니, 요구이다. 중요한 대목이라 통째로 옮겨본다.
  “어마어마한 불의가 이루어질 때, 공권력과의 충돌에서 종교 - 특히 기성 종교 - 가 앞장서는 경우는 얼마나 드뭅니까. 반면 종교 지도자들이 안전한 길을 택하거나 우물쭈물 사태를 관망하고, 내세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흥분을 가라앉히자고 하거나, 또는 이것은 종교의 적절한 기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흔합니까?” 

  이에 대해 “그건 아니다.”고 반박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종교가 사회에 깊이 침투하려는, 혹은 개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때론 부정적 시선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따지기 좋아하는 “보수이냐, 진보이냐?”의 선상에서도 종교의 사회개입은 대체적으로 곱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지난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앞장 서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가해서 시민들을 독려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종교의 기능을 폄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그들처럼 한편으로는 그동안 가려진 종교의 역사와 일부 신도들의 맹목적인 ‘숭배’, 그리고 신앙의 강요 등 부정적인 행태들을 보아왔던 터이다. 하지만 종교가 병에 걸린 사회에게 투여할 수 있는 치료제들은, 다시 말해 그것의 순기능은 자명한데도 단지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해 세이건의 호소에 반대되는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것은 역시 일부 종교인들 못지않은 맹목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이건은 말한다. “종교는 매우 현저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신비적인 올가미조차도 없이, 어른들에게는 윤리적 표준을, 아이들에게는 이야기를, 사회 구조에는 청년들을, 우울한 시기에는 위안을, 과거와의 연속성을, 미래에 대한 믿음을 제공해준다.” 

  단, 여기서 세이건은 이어지는 두 장, ‘창조에 반하는 범죄’와 ‘탐색’을 통해 조건을 단다. ‘창조의 반하는 범죄(crimes against Creation)’란 신학자들이 “인류의 자멸”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로 세이건은 그것을 핵전쟁으로 좁혀 사용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종교가 그것을 제어할 힘을 가진, “사회의 다른 영역들은 대개 수행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영역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종교를 지지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지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뭔가 거대한 힘을 - 교육적인 힘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힘까지도 - 지닌 것”이라는 것을 종교가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종교적 메시지를 통해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자연을 이해하라는 메시지를 그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남긴 바가 없다.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이 지켜야할 계율들을 강조했을 뿐이다. 아니면 신화적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반면 과학은 다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모든 것을 가설로 부치되 기존의 가설은 새로운 가설이 반박하지 못할 경우 잠정적인 사실로써 언급될 권리를 갖는다. 종교는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종류의 지적 능력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종류의 지적 능력을 아는 데에만 해도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세이건이 하고 싶었던 말이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재고해야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 세이건은 우주학자로서 상당 부분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 역시 가능성이나, 진화론은 현재 사실상의 진실로 취급되고 있다. 종교가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나는 혹시 종교에 집중하지 않은 지성 중 진화론을 비판하여 세이건의 주장을 약간 비틀어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작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 논점을 가진 학자는 없는지 궁금했었다. 그런 차에 마침 좋은 정보를 찾아냈는데, 노문학자 이현우의 도서 블로그에서 얼마간 데이비드 스토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밑의 글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은 후 접한 그 글에 대한 짤막한 수기이다.

  진화론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도 있다. (나는 그것을 로쟈 이현우氏의 알라딘 서재에 인용되어 있던 기사문을 읽어 알게 되었다.) 호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스토브가 쓴 <다윈의 동화(Darwinian fairytales)>이다. 그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높게 산다.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밝힌 DNA의 기본적 속성, 즉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이기심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스토브는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타심이 유독 강한가?”를 묻는다. 내가 알기로 이타심 역시 자연선택을 위한 협동, (니체와 혼돈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다시 말해 “때론 이타심을 발현하는 것이 생존에 있어 유리하다.”는 것을 인간은 진화상 인식하고 있다. 스토브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스토브는 인본주의를 말한다. 인간을 이기심 넘치는 기계적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과연 어떤 인식적 도움을 주겠냐는 것이다. 물론 스토브에게 우리는 “진화론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겠지만 진화론 자체가 우리에게 윤리적 의식을 심어주진 않는다. 진화론은 그저 과학계의 이론 중 하나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항상 가설로써 말한다. 그것을 진리로 대하진 않는다. 아마 스토브가 하고 싶었던 일은 점차 실종되어가는 인간의 존엄성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으리라. (이현우氏가 서재에 올린 글이 스토브의 입장을 잘 견지하고 있어 옮겨본다. “단지 그는 진화론이 ‘현재에 우리 종에 대해 잘못 그려준 초상화에 바보처럼 속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질 따름이다. 그러니까 대안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가 그의 포지션이다.”) 사실 나는 철학자도, 생물학자도 아니기에 스토브가 ‘다윈류’의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얻을 수 있는 호소력의 가능성을 확신하진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추세를 여러 과학서적들을 통해 살펴보건대, 아마 대다수의 지식인들도 동의하겠지만, 스토브의 논리는 증거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사유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과학이 역으로 비판하기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노(老)학자(그는 1994년 타계했다.)의 언변 너머의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좋으리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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