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엔진 - 천사, 귀신, 부적, 종교, 징크스, 점성술......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 믿음에 관한 진화론적 탐구
루이스 월퍼트 지음, 황소연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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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대학교 초년생 무렵, 떠올려보건대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것은 KBS의 다큐멘터리 <마음>이었다. 이문세氏가 내레이션을 맡아 친숙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뇌와 마음, 그리고 믿음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이 이성적 수단으로 거부할 수 없는 파괴력(좋게 말하면 추진력)을 가졌는지를 설명하는 과학 기획물이었다. 그 중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는 워너비(wanna-be) 환자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싶어 하는 환자들을 지칭하는 ‘워너비’는 의사들마저 당혹스럽게 만드는 정신질환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의사이고, 누군가가 찾아와 간절하게 애원하며 “저의 팔다리를 잘라주세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들은 조작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 진정으로 안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행복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섣불리 정의내리지 못하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워너비 환자들의 삶을 알게 된 뒤, 나 역시 어떤 일상적 질환으로 불행을 느끼는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은 개인이 성취하는 것이다.”는 강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성공을 꿈꾸며 젊음을 가능성으로 채워가는 대학생 중 한 명으로써 그 공통된 기준이 못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어떤 것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그 답을 알기 위해 나는 두 권의 책을 더 읽었다. 하나는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다. 둘 모두 과학적 근거와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편찬된 책으로 우르반은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그리고 월퍼트는 생물학자이다. 믿음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 앞에 내가 객관적인 과학을 사유의 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고, 또한 자명하다. 그들의 연구를 통해 나의 주관적 믿음의 특정한 근거와 원인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은 요컨대 ‘믿음의 엔진’ 자체가 진화 속에서 발달한 인과적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과학도서이다. 그리고 월퍼트는 인과적 믿음이 바로 도구의 사용에서 기원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믿음의 힘을 인정하고, 그가 말미에 인용한 베르길리우스의 경구처럼 “사물을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열린 자세를 겸비해야 한다는 월퍼트의 주장은 과학과 종교, 혹은 과학과 일상의 첨예한 갈등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귀를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일단 월퍼트는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상태에 있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근거로 설명한다. 상식도서들을 많이 접한 현대인들에게 그의 주장들이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음>, <인간의 두 얼굴>, <동과 서> 등 믿음이나 인지와 관련된 좋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바 있어 평소 관심이 있었다면 준(俊)전문가 수준의 이해를 가진 이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믿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말뚝과도 같다. 말뚝이 박힌 깊이는 분명 사람마다 다르다. 학습, 강제, 문화충격 등 외부의 힘이 개입해 그것을 뽑으려고 하면 말뚝의 깊이가 깊은 이일수록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반면, 말뚝을 스스로 뽑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어느 날 한 신자가 갑작스럽게 “신은 없다.”고 선언하는 일은 없다. 

  믿음이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오랜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시간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종교의 태초보다 훨씬 이전이다. 그것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생존의 시험대에 오른 순간부터를 가리킨다. 즉, 월퍼트는 믿음은 “유전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추론에 근거한 그의 주장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에는 심리학자들이 인간이 착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착각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지키고, 그로부터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 그들의 근거이다. 인간은 대부분 거짓말쟁이이며,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조작하는 작화증(confabulation)의 달인이다. 아이들이 곧 드러날 가벼운 수법을 써서 부모들에게 더 혼나는 비근한 일을 생각해보자. 나는 초등학생 무렵,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은 나머지 부모님께 “오늘은 피아노 학원에 사람이 많아서 선생님이 오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껏 한 거짓말 중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기보호와 자기기만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러한 ‘조작’을 가능케 하는 유전적 믿음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논리상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월퍼트는 아이가 학습을 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의 행동원리가 대개 일정시기마다 발현되며, 그것은 믿음과 관련된 숨겨진 메커니즘을 드러낸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든 근거가 바로 ‘거짓말’이다. 월퍼트의 말처럼 거짓말은 “자신이 믿는 것과 타인이 믿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해야만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질문들도 믿음의 형성을 파악할 근거가 된다. 질문은 사고의 메커니즘을 구축해가는 인간 특유의 수단이다. 다만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을 때에는 아이들처럼 마법을 믿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주변을 돌아보면, 굳이 학자들의 충분한 검증을 근거로 삼지 않아도 “믿을 수 없는 일”이거나 “믿기 싫은 일”, 혹은 “감성적 충격을 주는 일(끔찍한 살인, 비극, 괴담 등)”들이 우리에게 그다지 튼튼한 근거 없이도 특정한 사고를 지지하여 끝내 믿게끔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오해를 부르긴 하지만 “추론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겸비한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경험한다. 

  그렇다면 월퍼트는 왜 ‘도구’를 믿음의 진화와 연결시킨 것일까? 과학이 밝히는 진화와 믿음을 단순히 연결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월퍼트의 말에 따르면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이 필요”하며, 이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들을 반론으로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월퍼트는 ‘동물’이라는 챕터를 별도로 마련해 인간과 동물의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를 충분히 설명해놓았다. 단, 이것을 인간의 우월의식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이다. 이 ‘개념’이 실행되어 도구를 이용한 다른 도구(제 2차 도구)를 만들 때 인간의 인과관계 추론능력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하지만 도구의 발전 과정은 알다시피 매우 더뎠다.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원인은 도구개념의 공유와 협동에 있다. 이를 통해 뇌는 활발히 사고했으며, 용량이 커졌다. 특히 인간의 뇌 중 가장 빨리 성장한 부분은 전두엽의 운동전영역(premotor area)이다. 이곳은 동작의 통제를 담당한다. 이어서 복잡한 도구가 인간의 언어발달과 함께 등장했다. 언어는 인간의 관계를 대변한다. 언어의 발달을 통해 인간의 뇌 중 80%를 차지하는 신피질도 발달했다. 신피질은 ‘사회적 기술’을 서로 연결시켜 타인과 소통케 하는 두뇌 영역으로 인간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진화는 도구, 언어, 관계를 통해 이뤄졌지만 그것이 인간의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이유를 제우스의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는 근거에 기초한 사유가 아닌 믿음의 전형적인 도출과정 때문에 생긴 것인데, 월퍼트는 이것이 부정적인 이유를 “권위의 과신이나 우연에 대한 지나친 강조, 증거의 왜곡, 순환논증, 일화의 사용, 과학의 배척, 오류를 포함한 논리상의 문제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믿음은 관성을 갖게 된다.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열렬했던 신학적 논쟁을 차치하자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믿음의 관성’을 드러낸 가장 인상적인 픽션 중 하나였다. 관성은 앞서 비유한 말뚝과도 같다. 그리고 이 관성은 휴리스틱스(Heuristics)의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더욱 견고해진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 이유는 그것을 믿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 “전형적(일반적)이기 때문”, 그리고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쉬우면, 즉 용이하면 믿음의 관성이 생긴다. 뒤에서 월퍼트가 지적했듯이 과학이 믿음보다 약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과학은 대단히 어렵다. 대중들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책과 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불가능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일상을 쪼개 과학자들처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빅뱅이론은 그나마 그 대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만 학창시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시험문제에서 봤을 대중들이 정작 상대성이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행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신 종교적 믿음은 대체로 전통에 힘입어, 그리고 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용이함을 등에 업고 지금껏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수많은 리서치들이 방증하는 것처럼 종교는 과학보다 훨씬 ‘대중적’이다.  

  전형성은 바넘 효과와 같다. 나는 천칭좌인데, 천칭좌 사람들은 예지력이 있다고들 한다. 때문에 만약 내가 점성술을 믿는다면 나 역시 스스로 예지력이 있다고 여기고, 그런 듯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은 바넘 효과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사고방식이다. 점성술은 천칭좌 사람들을 묶는다. 인종을 인종별로 묶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모기와 말라리아의 연결을 그 초반에는 전혀 믿지 못했던 것과 같이 과학은 쉽사리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대상들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일반인들이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마지막으로 고정성은 “믿음은 반증되지 않고, 주로 입증된다.”는 인간의 보수적 사고로써 설명된다. 신자들은 신을 부정하는 증거를 모으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가 과학을 격렬히 반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도는 다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이어 월퍼트는 드디어 ‘거짓’에 대해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는데, 사실 어떤 독자든지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다. 거짓말은 매력적인 사고이다. 자신을 방어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 때문에 거짓말의 논리는 훨씬 견고해진다. 덕분에 “말 잘하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는 속설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이리라. 다큐멘터리에서 버라이어티에 이르는 수많은 TV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미 대중들에게 인간의 거짓말은 새빨갛게 드러났지만 그 누구 하나 정직하게 살고자 거짓말을 근절하는 사람은 없다. 착각도 거짓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무렵에 이미 이성은 착각에게 굴복한 뒤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사소한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박증, 식이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조병, 통제망상, 최면 등도 포함된다. 

  믿음과 가장 가깝게 연결된 단어는 종교일 것이다. 월퍼트는 챕터의 도입부에 자신의 생각을 미리 견지한다. “인간의 인과적 믿음이 도구와 관련해서 먼저 진화한 후, 언어의 진화가 이어졌다. 그 후 질병에서부터 기후변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의 원인을 알고 싶은 욕구가 필연적으로 생겼을 거라는 점이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무지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것은 종교적 믿음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종교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은 ‘죽음’을 설명한다는데 있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에서 여러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죽음은 인간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며, 따라서 그 앞에 굴복해야 하지만 결코 굴복하기 싫은 존재 중 하나이다. 때문에 타인을 제압하려는 권력은 늘 죽음을 이용해왔다. 그러나 종교는 내세를 제시한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종교는 그대로 수용한다. 천국, 지옥, 열반, 발할라 등 월퍼트는 그 세계가 개념상 존재해왔다는 것을 과학자의 입장에서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적 믿음은 단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대체적으로 부활을 믿지만 티벳에서는 환생을 믿는다. 부활과 환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2009년 EIDF 대상과 시청자상을 휩쓸며 화제의 다큐멘터리로 국내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았었던 나티 바라츠 감독의 <환생을 찾아서>는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아이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담고 있다. 불교에는 신이 없다. 단, 세상을 순환적으로 바라보고, 선행(종교학자들은 이 ‘선행’의 개념을 창조적 삶으로 이해한다.)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종교에 대한 불신(사실 월퍼트가 설명한 것처럼 종교 자체가 불신으로 성립된다. 나의 신은 믿지만 다른 신은 믿지 않는 것은 믿음과 불신의 통제이다.)이 있다는 면에서 종교적 믿음의 부정적 측면은 공격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니체와 도킨스가 있다. 특히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롯해 BBC 다큐멘터리에는 왜 종교가 비난받아야 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도 종교의 순기능을 괄시하진 않는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종교를 비하한 듯 보이나, 실은 “억압된 본성의 징후”인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믿음이 형성되고 지원을 받는 여러 원리와 상황들은 분명 비논리적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강박관념증이라 불렀다. 그러나 월퍼트가 주장했듯이 “종교활동은 심적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감과 낙관론을 고취시킴으로써 심장에의 부담 같은 신체상의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데 일조”하는 등 실제 생활에 육체적, 정신적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자신이 타인의 믿음에 동조하거나 반대한다는 ‘인식의 위치’가 정립되는 것은 정말 큰 위안이다.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무의식 세계를 일반화시킨 것은 사실 위에서 밝힌 ‘믿음의 전형성’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둘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재차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형성에 비춰 생각하면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덧붙여 설명하게 되는 작화증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만약 그 발언이 문제가 된 까닭에 여러 분쟁이 생기게 되면 사람들의 작화증과 자기 확증은 부딪혀 싸우게 된다. “마법에 대한 믿음은 희생양을 만드는 과정으로 악용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개인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그 예를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실행된 바 있는 마녀사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작화증 자체, 그리고 허황된 믿음이 주는 안도감과 신비함 자체로부터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일례로 월퍼트가 자신의 책에 제시한 근거인 <신들의 전차>는 M사의 한 TV프로그램에서 소개돼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그 책의 저자 에리히 폰 데니켄은 소위 ‘역기술론’이라는 음모론을 전 세계에 어필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계인이 인간의 초기문명을 도왔을 것이라는 이론은 퍽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주는 긍정과 부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 것일까? 월퍼트는 근거로써 생각하는,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모른다.”며 믿음의 영역을 지키는 지식인들의 관용을 재차 강조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믿음의 맹목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책이 아니다. (만약 그런 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널리 읽히진 못했을 것이다.) 그릇된 믿음의 사례들 사이사이로 월퍼트는 그것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과학은 윤리와 도덕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에 입각한(아마 우리는 이즈음에서 칸트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인데) 믿음을 가질 도구로써의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믿음의 수많은 가지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자료들을 제공한다. 믿음도 판단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지녀야 하는 겸손이다. 다른 이의 믿음이 판단되고, 그로 인해 이해가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종교적 분쟁은 점점 줄어드는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도 권리이다.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월퍼트는 그것을 이해하자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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