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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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언젠가 밀레의 작품을 보며 낭만적인 전원(田園)의 풍경을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즉각적으로 보이는 것 외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농민들의 고통을 볼 수 있는가를 놓고, ‘화가의 시선’이라는 주제를 다룬 칼럼 하나를 읽은 기억이 있다. 빈곤한 수집 욕구 탓에 그 기사를 다시금 구해보진 못했지만 글쓴이가 하고자 한 말의 진의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밀레의 의도가 어찌됐든 현재 그것이 전시되어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가서 이 걸작을 보는 사람들은 전원의 낭만이나 농민의 고통을 특별히 의도해서 받아들일까? 다시금 생각해보건대, 작가의 의도는 완벽하게 소통되는가? 지난 시간동안 미술을 공부하며 느낀 바이지만 오래 전의 작품들(소위 ‘Old Masters’의 작품들)은 적게는 한 세기에서 많게는 수 세기나 되는 소통의 간극 때문에 ‘현대적 감상’ 속에서 의도가 왜곡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며, 현대미술은 감상 자체를 자주 왜곡시키므로 따지고 보면 미술은 의도와 소통의 불협화음인 셈이었다. 대표적인 예들은, 특히 현대인들의 메마른 감성과 짝지어진 예들은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비단 회화, 조각 등 미술사적 작품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언젠가 한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일화를 듣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시인 박목월이 자신의 시로 낸 문제 10개를 풀었는데, 4개밖에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시에 ‘답’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을 고등학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인을 꿈꿔왔다는 이유로) 갖고 있었던 나에게 이 이야기는 진위여부를 떠나 많은 것을 의미했다. 어찌 보면 예술과 문학을 통틀어, 그리고 그 외의 더 많은 것들 중 대중들에게 ‘보임’, ‘읽힘’, ‘들림’ 등으로 소통하는 것들은 무릇 의도와 수용 사이의 몇몇 차이를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도 확인되는 바, 다만 그녀의 책은 보다 신랄하고, 충격적이다. 

  손택의 책은 울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 남성 변호사가 울프에게 “당신의 견해로는 ‘우리’가 전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 물었다. 울프는 이 ‘우리’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답장을 보냈다. 단지 추측된 것일 뿐인 (‘우리’에게) 공유된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지난 3년간 블로그를 하면서 필자 역시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수도 없이 썼는데, 그때마다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상상 속의 독자들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그나마 괜찮다. 대상이 적을뿐더러, 나의 블로그는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이 찾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 변호사와 울프의 사이를 오고 간 그 ‘우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적절했을까? 대개 서양에서 집필된 서양인의 책에서 그것이 ‘우리’라는 말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 대개 강대국이며 전쟁을 오랫동안 겪어보지 않은 이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 책이 반전(反戰)운동을 표방한다면 ‘우리’란 전쟁을 증오하는 이들에게 더 적당한 지칭어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반전을 원한다고 해서 전쟁이 줄어들고 있는가?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해체된다. 

  잠시 어학연수 차 시드니에서 생활했을 때, 나는 시드니 시청 앞 사거리에서 ‘No War’라고 간단하게 적힌 나무표지판을 들고 매 보행신호 때마다 도로 한복판으로 나와 어떤 노래를 부르며 반전시위를 하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기억으로는 내가 그곳을 찾을 때마다 본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런 ‘사소한’ 풍경은 잊혔을 것이다.) 그는 분명(혹은 아마) 반전주의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행신호가 들어오면 그는 다시 시청 앞 나무그늘로 돌아가 앉아서 표지판을 조금씩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이따금 시청 건너편의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의 무반응은 그에게도 사뭇 익숙했던 모양이다. 마치 필리핀에서 일어난 한국인 광부 피랍사건,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의 가려한 소식, 일본의 지진과 미국의 토네이도,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의 연쇄 부도 소식들을 아침식사를 겸해 보고 넘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것처럼. 그도 이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보들레르의 일기인데, <타인의 고통>에도 인용된 문구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손택은 오랜 고찰 끝에 뉴스와 신문, 인터넷 포털사이트, 소셜 네트워크 등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으로 ‘무능력’을 꼽았다. 과연 ‘우리(손택은 대체 이 ‘우리’가 누구라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마치 울프처럼 상기시켜준다.)’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갖 반전포스터와 나치 반대 포스터, 가령 그로스(George Grodz : 1893~1959)와 하트필드(John Heartfield : 1891~1968)가 만든 포토몽타주 작품들이 나온 1930년대 중반은 그것이 비록 정치적 소산이라고 해도 인류가 반대해야 하는 사건과 대상을 정확히 지정하여 엄청난 양의 비난이 예술의 세계에서 쏟아진 시기였다. 그러나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손택도 똑같은 말을 했다. “묵시록이 전쟁을 격퇴했으나, 그 다음 해에 전쟁이 벌어졌다.” 

  손택의 초점은 사진, 타인의 고통, 그리고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공감능력으로 모아져 있다. 하지만 사진도 하나의 소통하는 수단이자 주체(혹은 객체)이므로 서두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불협화음’의 대상이 된다. “좀 더 극적인 이미지들을 찾아 나서려는 충동이 사진 산업을 등장시켰으며, 사진 산업은 곧 충격이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겨지게 된 문화의 일부”가 된 오늘날, 특히 전쟁사진은 여러 가지 반응으로 회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매그넘이 설립된 1947년 파리에서 카파, 칭, 브레송 등 오늘날 전설로 기록된 작가들이 밝힌 자신들의 사명은 전쟁사진에 대해 우리가 단선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의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공정한’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반전과 등가어(等價語)이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광신적 애국주의’에서 태어나 ‘전 인류를 위한 것, 혹은 민족을 위한 것’이라 포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택은 “분쟁의 정체를 폭로해 주는 사진작가들이 모아 놓은 자료들은 대단히 유용”하다고 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항의 정신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그녀가 말미에 밝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것에게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손택은 독자들을 고통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여러 사례들이 소개되지만 그녀의 질문은 단 하나이다. 과연 ‘우리(여기에서도 ‘우리’는 명확치 않다.)’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서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필자가 지난 3년간 공부한 미술사의 대부분, 특히 19세기를 포함한 그 이전의 서양미술사에 담긴 대부분의 작품은 성화(聖畵)였고, 그것 또한 대부분의 주제가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기독교적 에피소드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순교, 예수의 수난 등이 신자들의 신앙심을 상기시킬 수 있는 자극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주제였음은 굳이 증명치 않아도 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스러움의 가호를 받는다는 면에 있어 보다 다른 차원의 고통으로 수용(왜곡)되어 왔다. 

  문제는 그것이 세속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였는데, 칼로, 한스 율리히 프랑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야의 예를 들며 손택은 “감정에 상처를 입히는 병적인 잔인함” 앞에서 사람들이 “큰 노력”을 요구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진이 발명된 이후, 등장한 ‘작품’이라 회자되어 왔던 사진들 중 일부가 연출이었다는 후문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갖는 실망감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듯하다. 그리고 피사체와 사진작가, 그리고 피사체와 ‘우리’ 사이의 밝혀지지 않은 거리와 관계, 아니 사실 규명될 수 없는 관계가 ‘우리’를 피사체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효과도 사진은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은 ‘실제’가 될 수 없다. 1862년 10월, <뉴욕타임스>의 논평이다. “브로드웨이를 가득 메운 산 자들은 앤티텀에서 죽은 자들에게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만약 이제 막 전장에서 죽은 채 돌아온 자들이 길가에 뉘여 있었다면, 사람들은 서로 밀치며 달려가 정신없이 저 대로를 뒤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 무더기의 여성들이 모여 들어 조심스럽게 한 명씩 꼼꼼히 살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들이 자아내는 멜로드라마에 저항하지 못한다.” 즉, 우리는 반응하나, 그 정도가 미심쩍은 것이다. 

  게다가 사진은 몇 가지 부정적인 면을 그동안 비판받아왔다. 이는 사진에 반응하는 ‘우리’가 아닌 사진 그 자체나 작가의 의도에 대한 비판이다. 독일의 소설가 윙거를 인용한 구절이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윙거는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와 사진을 찍는 행위를 등가물로 봤다. 

  또 하나는 피사체와 직접적 관계를 맺는 사람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이다. 손택은 2002년 초에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일어난 미국 저널리스트 다니엘 펄 살육사건을 예로 든다. 펄은 납치범들에게 잡혀 있다가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처형당했다. 그 장면이 동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올라왔고, 논쟁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비극을 겪은 바 있다.) 논쟁은 미망인에 대한 권리(이는 분명한 예의이다.)와 대중의 알 권리 사이를 교묘하게 가로질러갔다. 

  다른 하나는, 아마 전쟁을 겪지 않았거나, 문명권에서 대체로 양호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훨씬 의미하는 바가 큰 논점일 것인데,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촬영된 기근, 대량학살, 장애 등의 사진은 한편의 비극적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손택의 말마따나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이 사진을 통해 전 세계로 조장된다. (그러나 실은 문명화된 ‘그들’의 안방에서도 유사한 사건은 지속되어왔다.) 물론 실제 그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으나, 그것이 과연 보편적인 일이겠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평범한 답조차 쉽게 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폭풍>에 실린 구절 하나를 곱씹어봐야 한다.
  “영국 놈들은 절름발이 거지한테는 단 한 푼도 주지 않지만, 죽은 인디언을 구경하는 데에서는 한 푼의 열 배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니 말이야.” 고통과 충격에 익숙해지는 인간의 정신적, 신경적 반응도 간과할 수 없다. “충격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충격은 점점 엷어지는 것이다. 혹시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런 사진들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진이 ‘시각적 등가물’로써 ‘우리’의 기억들,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역사적, 집단적 교훈들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6.25 전쟁과 같은 민족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북한의 전형적인 도발에 발끈하며 다시금 민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전파도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다.)에게 폭파된 한강의 다리, 끔찍한 전투의 장면 등은 분명 우리의 교과과정에서 지우면 안 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면, 인천상륙 작전과 관련된 사진에서는 남한군과 미국군의 우세함, UN가입국들의 참전에 대한 아련한 연대감, 세계의식 등이 상기된다. 이는 전쟁에 대한 연민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다른 이데올로기에서 만들어져 전혀 다른 기능을 하는 사진이라는 뜻이다. 손택은 미국의 경우를 고발하며, 그녀를 비판하는 미국의 ‘애국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들이 공격할 여지를 남긴다. 그녀의 신랄한 문장은 이렇다.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 괄호 속의 말은 더 신랄하다. “미국은 그야말로 독특한 나라이다. 건국 이래로 사악한 지도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려는 그런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이다.” 

  사례만 조금 바꿔 생각해보면 ‘우리’도 미국과 비슷한 경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렌스 바이틀러의 <린치당한 토머스 쉽과 에이브럼 스미스>라는 충격적인 사진이 책 139페이지에 실려 있다. 미국인들은 나무에 매달린 두 구의 주검을 바라보며 기념사진 찍을 때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는데, 검열과 애국정신의 압력 속에 쉬이 꺼내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가장 ‘반(反)한국적’이라는 비난을 들은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도 타민족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핍박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주노동자들이 ‘빨리빨리’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다행이도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는 아예 ‘인종주의’가 하나의 대주제 중 하나로 분류되어 상세히 논의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애국과 도덕, 시민의식 사이의 애매모호한 혼동과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사진을 그렇게 보고, 사진은 ‘우리’에게 그렇게 어필하는 것이다. 

  손택은 충격적 사진(분명 그것은 우리에게 윤리적 감각을 상기할 것을 제시한다.)들을 보는 ‘우리’의 개인적 자세에서 그것을 생산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 가령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는 사진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만드는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접근한다. ‘우리’는 분명 매우 스펙터클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런 ‘우리’에게 어필하려면 사진도 스펙터클해야 한다. 손택이 인용한 워즈워스의 서문 중 하나에 도시로 집중되는 사람들은 ‘감수성의 붕괴’를 겪어야 할 것이라 적혀 있는 것이 실현된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 특히 이미지들이 쏟아지고 있는 문명권의 삶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무감각해진다. TV의 여파도 크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진이, 그 어떤 이미지가 우리에게 ‘환상’이 아닌 ‘실제’로 다가올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상황을 바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사진을 둘러싼 낭만적인 반응들은 혹 거짓이 아닐까? 막상 사진이 상기시킨 것들 앞에서 ‘우리’가 무능력한데, 연민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진전시회는 길어봤자 2~3시간, 책은 덮으면 끝, 모니터도 끄면 끝이다. 이미지는 상기시켜야 그 기능을 할 가능성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부족한 연민, 사건 앞에서의 괴리와 무능력은 우리의 ‘관심’과 결부된다.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그들’이 겪은 바를 겪지 않았다면 결코 이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양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을 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건들이 보도되지 않는다는 까닭에 묻히거나 ‘증발’하고 있겠지만 1인 대 대중의 소통이 점차 증가하고, 기술적으로도 용이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의 확장을 긍정적으로 내다볼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절대선’이라 말한 것이 막연하게나마 있다면 바로 그것에 대한 희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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