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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김성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물질에 대한 본질적 통찰을 선사하는 아주 특별한 나침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현재 KIST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탄소 소재의 미래를 연구하는 김성수 박사가 복잡한 수식 대신 100가지 물질이라는 매혹적인 이야기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인류의 미래까지 관통하는 화학적 연대기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물질을 통해 세계를 읽어내는 해석자로서의 시선을 접하게 됩니다.
화학의 시작은 138억 년 전 뜨거운 빅뱅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책의 시작을 가장 작은 원자인 수소로 엽니다. 모든 존재의 시원이자 가장 풍부한 이 원소를 통해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묻게 됩니다. 가장 작은 것(원자) 안에 가장 거대한 법칙(양자역학)이 깃들어 있다는 철학적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우주는 텅 빈 허공이 아니라 수많은 원자가 공유결합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는 역동적인 무대입니다. 풀러렌처럼 우주 공간의 영감이 인류의 기술로 이어진 사례를 통해 우리가 거대한 우주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지구는 그저 바위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은 지구를 구성하는 광물과 대기, 해수의 화학적 구성을 파고듭니다. 석영, 현무암, 석회암 등 우리 발밑의 단단한 존재들이 화학평형의 결과물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1만 8,000여 년이 지난 알타미라의 동굴 벽화가 어떻게 그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화학이라는 학문이 단순히 이온 결합과 공유 결합을 따지는 지루한 계산이 아니라, 만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인류의 예술을 보존하는 천연 타임캡슐의 조력자였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산화탄소 파트에서는 오늘날의 기후 위기 역시 지구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화학적 불균형에서 비롯되었음을 짚어주며 과학적인 시선으로 현대적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이어서 생명을 구성하는 핵심 고분자들을 다룹니다. 지구 최초의 생물과 이후 진화를 거듭해 출현한 식물에게는 세포막에 더해 세포를 더 단단하게 지켜주는 세포벽이 존재하는데, 그 세포벽을 구성하는 주요 물질은 셀룰로스입니다.
이 셀룰로스가 인류 의생활에 혁신을 선사한 재료라고 합니다. 셀룰로스가 식물의 뼈대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산업혁명을 추동한 직물의 근간이었다는 분석은 화학이 사회과학과 어떻게 조우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베타엔도르핀을 분비하고, 사랑에 빠질 때 신경전달물질의 파도를 겪습니다. 이런 생리 현상을 화학적 평형과 대사의 관점에서 풀어내며 우리 존재 자체가 우주에서 온 원소들이 빚어낸 거대한 기적임을 들려줍니다.

화학은 문명의 무기가 됩니다. 구리와 주석의 만남으로 시작된 청동기 시대부터, 현대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강철까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즐기는 설탕(수크로스)이나 식초(아세트산), 그리고 카페인과 모르핀 같은 물질들이 인류의 욕망과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질의 특성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물질이 등장함으로써 바뀐 인류의 생활 양식과 경제적 파급 효과를 짚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재밌습니다.
인류가 자연에 존재하지 않던 물질을 직접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화학은 폭발적인 풍요와 치명적인 위협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은 양날의 검을 짚어줍니다.
드라마틱한 암모니아 합성 이야기는 화학이 인류의 굶주림을 어떻게 구원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전의 뒷면처럼 화학은 전쟁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플라스틱(베이클라이트)과 나일론 같은 축복의 산물부터 오존층 파괴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사이안화 수소)까지, 과학 기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물질을 다루는 인간의 손길에 따라 세상은 낙원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첨단 소재를 통해 미래의 문을 엽니다. 반도체의 심장인 규소, 에너지 혁명을 이끄는 리튬 이온 전지, 꿈의 신소재라 불리는 탄소나노튜브까지. 흥미로운 점은 AI 시대에 왜 여전히 인간의 화학적 통찰이 중요한지를 역설합니다. 알고리즘이 아무리 화려한 설계를 내놓아도, 그것을 현실의 물질로 구현해내는 것은 결국 화학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시대를 향한 인류의 꿈은 결국 방사선을 견뎌낼 질화 붕소나 탄소나노튜브 같은 구체적인 물질의 성취에 달려 있습니다. 별의 먼지로 시작된 이야기가 다시 우주로 나아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끝을 맺는 서사적 구성이 매력적입니다.
김성수 교수가 100개의 물질을 엄선해 엮어낸 연대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우리가 딛고 선 땅과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 몸을 흐르는 피가 모두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 속에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