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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내 안의 미세한 감정의 파동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냥 그래", "좋네" 같은 뭉툭한 표현 뒤로 숨어버리곤 하나요. 29CM의 헤드 카피라이터를 거쳐 수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기획자로 거듭난 오하림 작가는 이 뭉툭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무심코 시작한 일본 광고 카피 수집은 어느덧 9,000개가 넘는 아카이브가 되었고, 그 애정은 그를 브랜드의 목소리를 잘 아는 카피라이터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광고 카피도감』은 치열한 현장에서 체득한 전략적 사고와 일본 특유의 섬세한 정서가 만난 언어의 도감입니다. 마음을 흔드는 카피의 비밀을 만나보세요.
카피라이팅은 아름다운 글쓰기보다 신경 쓰이는 글쓰기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리빙하우스의 카피를 보면 신경 쓰인다는 것은 알고 싶어진다는 뜻이고, 알고 싶다는 것은 좋아하게 될 확률이 큰 마음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이게 됐다는 것은 좋아한다의 입구인 겁니다.
카피의 본질이 설득이 아닌 유혹임을 보여줍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 그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신경 쓰임의 미학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해야만 그에 대해 궁금해진다고 생각하지만, 광고의 세계에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작동합니다. 일단 신경 쓰이게 만들면, 마음은 자연스레 그 방향으로 흐른다는 겁니다.

이 복잡한 사랑의 메커니즘을 광고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나미 서점이나 메이지 초콜릿의 카피들은 거창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을 냅니다. 그 균열 사이로 어라? 이건 내 이야기인가 싶은 호기심이 스며들게 합니다. 광고는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지는 매체이지만, 가장 강력한 카피는 오직 당신 한 사람에게 도착한 편지처럼 읽힙니다.
저자는 여기서 팩트에 관점을 섞는 전략을 소개합니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정보 전달에 불과하지만, 그 사실에 인문학적 시선을 더하면 위로가 되고 철학이 됩니다. 도야마현 난토시의 홍보 포스터가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도시의 제작자는 사람이지만, 시골의 제작자는 신이라니. ‘그래 맞아’라는 짧은 감탄과 함께 시골은 도시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곳이 되고 만다고 말이죠.
이어서 본질을 말하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일본 광고 특유의 여백과 비유를 다룹니다. 올림푸스 카메라 광고가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셔터를 눌렀다며 사랑을 말하는 방식, 야마사 간장이 식탁의 기쁨을 묘사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카피라이터는 존재하지 않는 화려한 말을 지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평범한 말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하나를 골라내는 큐레이터에 가깝습니다.
야마사 간장의 사례에서는 간장이 맛있다는 품질 강조 대신, 식탁의 표정을 이야기합니다. 제품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순간을 주인공으로 세울 때 비로소 문장은 생명력을 얻습니다.
티파니앤코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프로모션 카피들은 대상의 가치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도, 그것이 결핍되었을 때 우리가 잃게 될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강렬한 소유욕을 자극합니다.
정서적 응원과 격려의 문장들이 가득합니다. 일본 광고의 백미라고 불리는 포카리스웨트의 여름 캠페인에서는 땀은 무언가에 몰입한 영혼의 증거로 격상됩니다.
저자는 버거킹이나 세이코, 그리고 구인 정보지 가텐의 사례를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조명하기도 합니다. 요즘 세대가 열광하는 것은 화려한 성공 신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흘린 땀의 가치를 알아주는 한 문장,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명분을 주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지금 네가 하는 고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어깨를 다독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신뢰와 미래에 대한 태도를 다루는 카피들이 펼쳐집니다. 훌륭한 광고는 소비 이후의 성장을 약속합니다. 혼다나 NTT 도코모, JR동일본의 기차 여행 광고들은 물리적 이동을 통해 자아의 확장을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비마다 스스로에게 건네야 할 말들, 도망치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하는 문장들은 마케팅 메시지를 넘어 삶의 지침이 됩니다. 신초문고나 보험회사의 광고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나 고독의 시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우리는 언어가 어떻게 한 인간의 세계를 확장해 주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좋은 카피는 제품을 파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본광고 카피도감』. 저자 오하림은 10년 넘는 시간 동안 수집한 보물 같은 문장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마음 가는 페이지를 펼쳐보세요. 그곳엔 당신이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을 고스란히 카피해 둔 문장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