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아빠의 일 멘토링 - 화려한 스펙보다 일로써 실력을 키우고 더 성장하기
정현천 지음 / 트로이목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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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SK그룹 평직원으로 시작해 부사장으로 정년퇴임한 아빠가 이직을 고민하는 사회 초년생 딸 J에게 건네는 이야기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아빠의 일 멘토링』.


정현천 저자는 단순히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AI 시대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일의 본질에 대해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이 책은 딸의 막막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방황하는 모든 일하는 이들을 위한 커리어 나침반이 되어주는 책입니다.


조언집의 외형을 띠고 있으면서도 한 직장인의 장기 관찰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정현천 저자는 38년간 재무, IR, 구조조정, 해외사업, ESG까지 폭넓은 업무를 경험한 뒤 부사장으로 정년퇴임했습니다. 일을 잘한다는 건 무엇인가, 행복과 성장은 양립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빠이자 선배 직장인으로서 끝까지 고민한 기록입니다.


저자는 직장 생활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를 세 가지 축으로 정의합니다. 바로 ‘나’, ‘남’,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 이상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쓸데없이 괴롭히거나 업신여긴다든지,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그 입장이 되어보려고 하지 않는다든지, 엉뚱한 일을 엉뚱한 시간과 장소에서 엉뚱하게 하고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는 식입니다.


우리가 업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단순히 업무량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효능감을 상실했거나(나), 인간관계에서 고립되었거나(남), 내가 하는 일의 목적을 잃었을 때(일) 번아웃이 찾아옵니다. 저자는 리더든 신입사원이든 이 본질은 동일하며, 일단 선택했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합을 맞춰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저자가 꺼내 든 카드는 뜻밖에도 불교 용어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흔히 오만함의 상징으로 오해받는 이 단어를 저자는 진정한 자부심의 근거로 소환합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기 일쑤입니다. SNS 속 동기들의 화려한 커리어와 나의 초라한 모습을 비교하며 자책합니다.


저자는 진정한 자부심을 가지려면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합니다. 첫째,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라. 둘째, 자신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라. 셋째, 꾸준히 스스로를 도와라. 특히 일 중독이 단순히 노동 시간이 긴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강박적으로 일과 연결하는 심리적 상태임을 짚어줍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결코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남'과의 관계에서 핵심을 겸손과 공감으로 꼽습니다. 여기서 얀테의 법칙(Janteloven)이 등장합니다. 북유럽의 십계명이라 불리는 이 법칙은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라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뛰어나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칙은 타인을 포용하기 위한 반우월 전략입니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고, 갑질하지 않는 리더, 비굴하지 않은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넘겨짚지 않고 진심 어린 질문을 던지는 태도야말로 협력의 정수입니다.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아빠의 일 멘토링』은 단순히 열심히 하라는 식의 훈계를 거부합니다. MZ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3요?(왜요? 지금요? 제가요?)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유연하고도 날카롭습니다.


많은 기성세대 리더들이 '3요?' 질문을 들으면 불쾌해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일을 제대로 따지는 핵심 질문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왜요?'라고 묻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인가를 따지는 것이고, 지금요?는 타이밍에 관한 것이고, 제가요?는 포지셔닝에 관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신입사원들에게 조언합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보라고 말이죠. 이 일이 왜 필요한지(리즈닝), 지금 시점이 적절한지(타이밍), 내가 맡는 것이 효율적인지(포지셔닝)를 스스로 납득할 때 일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원칙을 활용해 일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법 등 실무적인 스킬도 잊지 않고 전수합니다.





이직을 고민하는 딸에게 어떤 조언을 했을까요? 이직은 단순히 연봉이나 복지를 보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시스템을 고려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원래 조직에서 잘한 일이 내가 잘한 것인지, 조직의 환경과 시스템의 뒷받침을 잘 받아서 잘한 것인지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며 소위 성과에 도취하기 쉬운 직장인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 조직의 시스템 덕분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직하면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분석입니다. 저자는 목표를 높게 잡되 실패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태도, 그리고 이직 시 내 역량이 새로운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검토해 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정현천 저자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하지만 그가 딸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은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키며 남과 함께 성과를 내는 지혜였습니다.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아빠의 일 멘토링』은 이 길이 내 길인가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든든한 등대 같은 조언이 되어줍니다.


'나, 남, 일' 중 어느 축이 흔들리고 있는지 짚어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일의 철학을 구축할 로드맵을 세우는 데 도움 됩니다.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겸손으로 시작하는 관계 철학을 고민하고, 이 일을 왜 하는지 알고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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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플레이스를 만드는 플레이어들 - 오픈 전부터 줄 세우는 가게들의 성공 전략
신지혜 지음 / 와이즈맵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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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핫플레이스를 만드는 플레이어들』은 골목이 어떻게 브랜드가 되고, 공간이 어떻게 서사가 되는지를 끝까지 추적한 리테일 전략서이자 도시 읽기 보고서입니다.


신지혜 저자는 서울대학교 지리학과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를 거쳐, 20년 넘게 상업용 부동산 개발 현장에서 플레이어와 시장을 연결해온 리테일 디벨로퍼입니다.


저자는 핫플은 갑자기 생기지 않으며, 우연히 성공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신 한 명 혹은 몇 명의 플레이어가 먼저 들어가 실패를 감수하고, 실험을 반복하며, 그 골목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요.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기록합니다.


핫플을 소비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요즘 뜨는 곳'을 바라봤다면 이 책은 핫플을 만드는 사람의 좌표로 우리를 데려다줍니다.


용산 은행나무길 사례는 이 책이 얼마나 집요하게 시간을 다루는지 잘 보여줍니다. 대형 개발계획이 수없이 오르내리던 지역, 그래서 오히려 누구도 장기적인 투자를 감행하지 않았던 골목. 저자는 이 공간이 어떻게 플레이어들의 선택을 통해 재해석되었는지를 촘촘히 따라갑니다.





은행나무길의 핵심은 요란하지 않음입니다. 로프컴퍼니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한옥이라는 물리적 자산을 전면에 내세우되, 그 안의 콘텐츠는 끊임없이 갱신합니다. 한식대첩 명인 팝업, 브랜드 협업, 자체 상품 출시까지 이어지는 실험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이 거리의 리듬을 만드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핫플의 본질이 화제성이 아니라 지속성에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인터뷰 코너들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공간 전략으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로프컴퍼니 박재현 대표 인터뷰는 용산 은행나무길 파트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거리의 변화가 결과라면, 이 인터뷰는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사유의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박재현 대표의 말에서 반복적으로 감지되는 키워드는 속도 조절입니다. 그는 빠르게 확장하거나, 유행을 앞질러 선점하는 방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이 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의 속도를 존중하고, 플레이어와 고객이 자연스럽게 쌓이는 시간을 중시합니다. 개발 논리보다는 생활의 리듬에 가까운 접근이며, 그래서 은행나무길이 유난히 편안한 핫플로 인식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 속 인터뷰들을 통해 핫플레이스란 결국 사람의 욕심을 절제한 결과물일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핫플을 만든다는 것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이유를 차분히 설계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서울역 인근 만리재로는 오랫동안 기능만 남은 거리였습니다. 공업사와 기사식당, 빠르게 지나치는 동선만 존재하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7017 개통 이후 이 거리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인상적인 지점은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변수입니다. 롯데마트 서울역점을 경유한 외국인 유동이 새로운 소비층으로 유입되며, 만리재로는 로컬과 글로벌이 겹치는 실험장이 됩니다. 교통, 도시계획, 소비 동선이 맞물릴 때 플레이어의 기획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인천 개항로길은 ○○의 경리단길이라는 수식어를 거부하는 공간입니다. 이창길 대표의 개항로프로젝트는 외부 시선을 끌어오기보다, 지역 내부의 기억과 감정을 먼저 복원합니다.


핫플을 만드는 일이 결국 지역을 소비하는 행위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가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개항로길 사례는 플레이어의 태도 자체가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싸전거리로 알려진 신당동 중앙시장 일대는 TDTD의 장지호 대표 같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거듭났습니다. 신당동 핫플레이스의 성공 핵심은 뛰어난 콘셉트 기획입니다. 숨겨진 입구, 아날로그 감성의 주문 방식을 적용한 공간들이 어떻게 SNS 상에서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왜 이런 장치들이 신당동이라는 맥락에서 유효했는지를 분석합니다.





이어서 이미 명성이 있었거나 혹은 철저히 잊혔던 상권들이 새로운 플레이어들에 의해 어떻게 리디자인되고 부활하는지를 다룹니다. 도산공원, 광주 시너지타워, 익선동, 연희동, 동묘 상권의 사례는 리테일 전략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높은 공실률에 시달리던 도산공원은 GFFG의 김동현 이사 등 F&B 플레이어들의 노력으로 젊은 세대의 쇼핑 및 미식 메카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도산공원의 사례는 기존의 고급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기보다는 트렌디한 젊은 감성을 덧입히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광주 첨단지구의 시너지타워 사례는 플레이어의 역할이 단순히 개별 매장을 오픈하는 것을 넘어, 대형 공간 기획을 통해 지역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너지타워의 오정현 부사장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상권은 철저히 계획된 변화를 기반으로 탄생했습니다.


더불어 디벨로퍼의 본질적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단순히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는 것을 넘어, 테넌트와 콘텐츠의 니즈를 사전에 파악하여 하나의 큰그림을 만들고,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는 디벨로퍼의 역량이 어떻게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창조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성북천 일대, 청량리, 장충동처럼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미니 핫플레이스들을 다루며, 차세대 핫플을 기대하게 하는 새로운 좌표를 보여줍니다.


주민들의 산책로였던 성북천이 감성 카페거리로, 춘천 가는 기차역이었던 청량리가 글로벌 로컬시장으로, 재벌집 거실 같은 콘셉트의 장충동 카페까지, 이 모든 변화는 핫플레이스의 핵심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 줍니다.


『핫플레이스를 만드는 플레이어들』은 상권 기획자, F&B 창업자, 부동산·콘텐츠 업계 종사자에게 유의미한 책이면서도, 요즘 뜨는 공간을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 싶은 일반인에게도 유용한 책입니다. 도시를 읽는 눈이 한 단계 확장되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이 책을 읽고나니 '이 골목의 첫 플레이어는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줄 서는 가게 뒤에는 반드시 줄 서서 고민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즐겁습니다. 불황을 뚫고 골목을 브랜드로 만드는 플레이어들의 성공 비결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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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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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과학 전문 번역가이자 시인, 철학자인 전대호 저자의 첫 에세이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을 바탕으로, 과학의 행간에 숨겨진 뜨거운 인간의 숨결을 포착해 냅니다.


100종이 넘는 과학·철학서를 번역하며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달아온 저자의 문장은 예리하면서도 다정합니다. 과학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지적 여정을 펼쳐보입니다.


과학의 정밀함이 놓친 인간의 숨결을 찾아서, 전대호 저자가 보여주는 가장 따뜻한 과학의 시간입니다. 기계가 인간을 닮는 것보다 인간이 기계를 닮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AI 시대에 읽어야 할 인문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과학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미래를 예측하는 트렌드 보고서도 아닙니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은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 사유의 에세이입니다.





우리는 과학을 수치와 법칙의 집합체로 보지만, 저자는 탄생의 배경에 주목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고고한 상아탑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의 활기와 개인의 고뇌 속에서 꽃피었습니다.


중세의 수학자 피보나치는 단순히 수열을 발견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그를 중세의 빌 게이츠라 부르며, 그가 도입한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실상 상인들의 편리한 계산을 위해 보급되었음을 짚어줍니다.


실제로 피보나치의 『계산 책』은 장사꾼 독자를 겨냥한 작품임을 거기에 등장하는 연습문제들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주로 매매, 환전, 금액 계산에 관한 문제들이 다뤄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학은 철저히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마리 퀴리의 특허 포기 사례를 통해 과학적 앎이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인류의 공유 자산이어야 한다는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냅니다.


정당화된 앎이란 타인들도 수긍하고 공유한 앎이라고 합니다. 오직 혼자만 간직한 앎은 ‘참인 믿음’ 혹은 ‘유효한 믿음’일지언정 엄밀한 의미의 ‘앎’은 아니라고 말이지요.


과학은 결코 차갑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이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인류의 연대기입니다. 과학이 가진 역동성과 모험심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로 삼았던 괴짜 과학자들의 무모함으로요.


에르빈 슈뢰딩거의 사례를 통해 성숙한 과학자의 태도를 조명합니다. 이미 물리학계의 거물이었던 그가 생물학이라는 낯선 영역에 발을 들여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을 때,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잃을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뢰딩거가 보여준 이 웃음거리가 될 용기가 현대 분자생물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지식의 경계를 허무는 모험이야말로 과학을 진보시키는 핵심 동력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원자의 실재를 주장하다 고립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볼츠만의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 진실이 승인받기까지 얼마나 가혹한 인간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사유하게 합니다.


과학은 결코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1783년 파리의 열기구 비행 사례를 통해 과학 쇼와 대중의 관계를 짚어봅니다. 당시 수십만 군중의 환호는 오늘날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과 궤를 같이합니다. 대중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연구비의 향방을 결정하고 과학적 성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맹입니다.


현대 과학의 특징인 빅사이언스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논문 저자가 천 명이 넘어가는 시대, 저자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읽어냅니다. 소수의 개인이 과학 지식을 생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팀의 생명은 민주주의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과학은 실험실 내부의 논리를 넘어 사회적 소통과 협력의 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노벨상 선정 과정에 얽힌 고민이나 루돌프 피르호의 사회의학 개념을 통해 과학이 어떻게 공동체의 안녕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챗GPT와 AI 기술이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상실하고 있을까요? 저자는 디지털화가 가져온 감탄의 상실을 경고합니다. 헤르메스가 10년에 걸쳐 정65537각형을 작도했던 집요한 노력을 언급하며, 저자는 현대의 효율성이 앗아간 경이로움을 안타까워합니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인간이 기계를 닮아가는 현상입니다. AI가 자의식을 갖느냐는 논쟁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효율성과 데이터만을 추구하다가 인간 스스로가 비인격적인 부품처럼 변해가는 것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기계를 의인화하는 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처럼 사고하고 반응하는 탈신체화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는 겁니다. 챗GPT와 대화하며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바로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맺는 생생한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학의 근간을 지탱하는 철학적 토대를 탐구합니다. 과학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장하석 교수의 『물은 H₂O인가?』를 인용하며, 과학사에서 패배자로 기록된 이론들이 사실은 우리 지식의 풍요로움을 더해줄 소중한 자산이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오컴의 면도날이 가진 위험성, 안톤 차일링거의 정보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등을 통해 과학적 낙관론에 철학적 무게중심을 더합니다. 과학적 성공이 곧 세계의 완전한 이해를 뜻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겸허한 태도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과학은 공식이나 성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등장합니다. 실패하고, 주저하고, 때로는 웃음거리가 될 위험을 감수했던 인간의 선택과 태도로 말입니다. 과학을 이해시키려 들기보다, 과학을 둘러싼 우리의 사고 습관을 살짝 흔들어보려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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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 셰익스피어가 그린 권력과 정치, 그리고 악랄한 독재자들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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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 전체가 폭군(tyrant)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갈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속에 등장하는 악랄한 통치자들을 해부한 『폭군』. 리처드 3세, 맥베스, 리어 왕, 코리올라누스... 이들의 광기와 잔혹함, 그리고 그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 사람들의 심리를 파헤칩니다.


퓰리처상 수상자 스티븐 그린블랫 교수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 말 영국의 정치적 환경을 복원하며, 검열과 감시 속에서 한 극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관찰했는지를 추적합니다.


셰익스피어는 공개적인 정치 비판이 허용되지 않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연극은 대중적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더욱 엄격한 검열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권력의 병리와 폭정의 구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정면 돌파가 아니라 비스듬한 시선이었을 뿐입니다. 고대 로마, 중세 영국, 가상의 왕국을 무대로 삼아, 자기 시대의 정치적 긴장을 우회적으로 비추었습니다.


이런 우회적 서술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특정 정권의 풍자를 넘어 권력 일반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폭군은 특정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조건의 산물이라는 점을 셰익스피어는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3부작을 중심으로 폭정이 시작되는 초기 단계를 분석합니다. 저자는 폭군 개인보다 먼저 정치 환경을 문제 삼습니다.


정당은 원래 공공선을 위해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그린 세계에서 정당은 점차 반대를 위한 반대에 매몰됩니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악마화하고, 정책보다 진영 논리를 앞세우며, 장기적 비전보다 단기적 승리에 집착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시민의 판단력은 피로해집니다.


저자는 이 지점을 짚습니다. 폭군은 혼란을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혼란스러운 공간을 점령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정당정치가 기능을 상실할수록, 강력한 단일 목소리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구호로 정리해주는 지도자는 언제나 환영받기 마련이니까요.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을 해부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군중은 늘 어리석게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노하고, 실망하고, 불안해합니다. 문제는 이 감정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입니다.


포퓰리스트는 대중의 고통을 말하지만, 원인을 단순화합니다. 책임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고, 해결책은 '나'에게 있다는 구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미 이런 정치적 언어의 위험성을 간파했습니다.


폭군은 혼자 오지 않습니다. 그를 밀어 올린 것은 군중의 선택이었고, 침묵이었고, 계산된 타협이었습니다. 『리처드 3세』에서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폭군 리처드 3세가 압권입니다. 폭군은 항상 혐오스러운 존재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솔직해 보이며, 기존 질서를 조롱하는 인물로 나타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조롱에 웃는 순간, 이미 공모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리처드의 뻔뻔함과 거침없는 악행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대중의 매료를 목격합니다.


저자는 폭군을 만드는 조력자들의 유형을 정리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폭군에게 줄을 서는 '기회주의자', "에이, 설마 진짜 그러겠어?"라며 안일하게 대처하는 '현실 부정파', 공포에 질려 입을 닫아버리는 '침묵의 동조자' 등... 이들이 모여 거대한 파국을 완성합니다.


『맥베스』와 『리어 왕』을 통해서는 폭정의 심리적 조건을 탐구합니다. 권력을 향한 불안, 상실에 대한 공포,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이 결합될 때 폭정은 급격히 심화됩니다.


리처드 3세와 맥베스는 자신을 방해하는 정통 군주를 죽여 권력에 오른 범죄자입니다. 『맥베스』는 권력을 쥔 자가 느끼는 극한의 불안을 보여줍니다. 맥베스는 권력을 잡은 뒤에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살인을 멈추지 못합니다. 반면 『리어 왕』은 권력자의 오만함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저자는 맥베스 부인처럼 폭군을 부추기는 인물들과 코델리아처럼 끝까지 진실을 말하려는 인물들을 대조시키며, 권력의 주변에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지도자의 사적인 불안이 공적인 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지도자의 정신 건강이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됩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남긴 일말의 희망을 건져 올립니다. 폭군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폭군이 오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립과 의심, 분노는 종종 오만한 과신과 결합하여 몰락을 재촉하니까요. 폭군은 타인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조직을 관리하지 못합니다. 유능한 인재들은 떠나고 예스맨들만 남은 조직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극의 결말에서 항상 질서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폭정을 묘사하는 연극은 공동체의 재건과 공정한 질서의 회복을 가리키며 끝이 납니다.





셰익스피어는 사회 집단이 품위를 되찾을 가장 큰 가능성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짚어줍니다. 『리어 왕』에서 폭군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포로의 눈을 뽑기를 거부했던 이름 없는 하인처럼, 시스템의 부당함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평범한 개인들의 용기가 폭정을 막는 유일한 방패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분석하는 문학 비평서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내면의 비겁함과 정치를 바라보는 게으름을 비추는 사회 고발서에 가깝습니다. 폭군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분열, 침묵, 그리고 자극적인 포퓰리즘에 대한 열광을 먹고 자라는 괴물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는다면, 무대 위의 비극은 언제든 현실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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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크게 생각할 줄 아는 어린 철학자들의
제마 엘윈 해리스 엮음, 김희정 옮김 / 레디투다이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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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제마 엘윈 해리스 저자는 두 살배기 아들의 사소한 질문에서 영감을 얻어, 영국 전역의 아이들로부터 수천 개의 질문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각 분야의 정점에 서 있는 전문가들에게 보냈습니다.


『생각의 지도』는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들에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답해준다면 어떨까라는 발칙한 상상을 현실로 옮긴 결과물입니다. 어린이용 지식 교양도서로만 여기기엔 아까운 책입니다.


알랭 드 보통, 리처드 도킨스, 노엄 촘스키, 고든 램지 같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에게 질문을 보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질의응답을 넘어, 아이들의 무구한 호기심과 인류의 지적 성취가 맞닿는 접점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세상을 효율의 렌즈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세상을 본질의 렌즈로 봅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풍경들이 아이들의 눈에는 호기심 그 자체였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간지럽힐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뇌의 예측 기전과 자아 인식의 경계를 건드립니다. 뇌는 외부 자극과 스스로 만드는 자극을 구분하며, 이를 통해 자아를 방어하고 효율을 높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측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게 된 셈입니다.





우주가 왜 반짝거리는지,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지와 같은 질문을 통해 아이들이 과학적 사고의 기초인 관찰에 눈뜨게 합니다. 특히 노엄 촘스키가 답변한 "왜 동물들은 우리처럼 말을 못하나요?"라는 대목은 인류가 가진 독보적인 창의성을 일깨워줍니다.


질문의 난이도는 더욱 기묘해집니다. "소가 1년 동안 방귀를 참았다가 한 번에 터뜨리면 우주로 갈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은 헛웃음을 유발할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에겐 에너지의 총량과 추진력의 원리를 설명할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은 질문은 운동 경기에서 패배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묻는 질문입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전하는 진심 어린 조언은 결과 중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줍니다. 성공이라는 단일한 지표에 매몰되지 않고,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을 비교하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풀어낸 점이 탁월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심술궂게 행동하나요?"라는 도덕적, 심리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감정의 전이 현상을 쓰레기 처리에 비유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의 폭을 넓혀줍니다.


오답은 기피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지도』는 오답과 실패를 지적 유희의 재료로 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공룡의 멸종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는 대목입니다. 지식 전달을 넘어, 관점의 전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명답변이 펼쳐집니다.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 중에서는 묵직하고 심오한 것들도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하나요?",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나요?" 같은 질문들입니다.


저자는 전문가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되, 결코 가볍지 않은 답변을 달라고요. 리처드 도킨스나 알랭 드 보통 같은 이들이 이 요청에 응해 보낸 답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이며 철학입니다.





지구온난화나 신(神)의 존재처럼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를 다룰 때도, 전문가들은 함께 고민해보자는 태도를 취합니다. 사소한 호기심을 방치하지 않고 최고 수준의 답변으로 화답하는 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나의 생각이 존중받고 있다는 강력한 정서적 지지가 됩니다. 부모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아이의 질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생각의 지도』는 아이들에게는 세상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어른들에게는 무뎌진 호기심의 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숫돌이 되어줍니다. 요즘 세대들은 검색 한 번으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삽니다.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왜?를 멈추지 않는 아이가 세상을 확장합니다. 지식보다 소중한 질문의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배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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