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과학 전문 번역가이자 시인, 철학자인 전대호 저자의 첫 에세이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을 바탕으로, 과학의 행간에 숨겨진 뜨거운 인간의 숨결을 포착해 냅니다.
100종이 넘는 과학·철학서를 번역하며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달아온 저자의 문장은 예리하면서도 다정합니다. 과학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지적 여정을 펼쳐보입니다.
과학의 정밀함이 놓친 인간의 숨결을 찾아서, 전대호 저자가 보여주는 가장 따뜻한 과학의 시간입니다. 기계가 인간을 닮는 것보다 인간이 기계를 닮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AI 시대에 읽어야 할 인문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과학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미래를 예측하는 트렌드 보고서도 아닙니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은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 사유의 에세이입니다.

우리는 과학을 수치와 법칙의 집합체로 보지만, 저자는 탄생의 배경에 주목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고고한 상아탑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의 활기와 개인의 고뇌 속에서 꽃피었습니다.
중세의 수학자 피보나치는 단순히 수열을 발견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그를 중세의 빌 게이츠라 부르며, 그가 도입한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실상 상인들의 편리한 계산을 위해 보급되었음을 짚어줍니다.
실제로 피보나치의 『계산 책』은 장사꾼 독자를 겨냥한 작품임을 거기에 등장하는 연습문제들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주로 매매, 환전, 금액 계산에 관한 문제들이 다뤄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학은 철저히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마리 퀴리의 특허 포기 사례를 통해 과학적 앎이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인류의 공유 자산이어야 한다는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냅니다.
정당화된 앎이란 타인들도 수긍하고 공유한 앎이라고 합니다. 오직 혼자만 간직한 앎은 ‘참인 믿음’ 혹은 ‘유효한 믿음’일지언정 엄밀한 의미의 ‘앎’은 아니라고 말이지요.
과학은 결코 차갑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이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인류의 연대기입니다. 과학이 가진 역동성과 모험심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로 삼았던 괴짜 과학자들의 무모함으로요.
에르빈 슈뢰딩거의 사례를 통해 성숙한 과학자의 태도를 조명합니다. 이미 물리학계의 거물이었던 그가 생물학이라는 낯선 영역에 발을 들여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을 때,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잃을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뢰딩거가 보여준 이 웃음거리가 될 용기가 현대 분자생물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지식의 경계를 허무는 모험이야말로 과학을 진보시키는 핵심 동력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원자의 실재를 주장하다 고립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볼츠만의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 진실이 승인받기까지 얼마나 가혹한 인간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사유하게 합니다.
과학은 결코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1783년 파리의 열기구 비행 사례를 통해 과학 쇼와 대중의 관계를 짚어봅니다. 당시 수십만 군중의 환호는 오늘날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과 궤를 같이합니다. 대중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연구비의 향방을 결정하고 과학적 성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맹입니다.
현대 과학의 특징인 빅사이언스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논문 저자가 천 명이 넘어가는 시대, 저자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읽어냅니다. 소수의 개인이 과학 지식을 생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팀의 생명은 민주주의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과학은 실험실 내부의 논리를 넘어 사회적 소통과 협력의 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노벨상 선정 과정에 얽힌 고민이나 루돌프 피르호의 사회의학 개념을 통해 과학이 어떻게 공동체의 안녕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챗GPT와 AI 기술이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상실하고 있을까요? 저자는 디지털화가 가져온 감탄의 상실을 경고합니다. 헤르메스가 10년에 걸쳐 정65537각형을 작도했던 집요한 노력을 언급하며, 저자는 현대의 효율성이 앗아간 경이로움을 안타까워합니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인간이 기계를 닮아가는 현상입니다. AI가 자의식을 갖느냐는 논쟁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효율성과 데이터만을 추구하다가 인간 스스로가 비인격적인 부품처럼 변해가는 것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기계를 의인화하는 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처럼 사고하고 반응하는 탈신체화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는 겁니다. 챗GPT와 대화하며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바로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맺는 생생한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학의 근간을 지탱하는 철학적 토대를 탐구합니다. 과학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장하석 교수의 『물은 H₂O인가?』를 인용하며, 과학사에서 패배자로 기록된 이론들이 사실은 우리 지식의 풍요로움을 더해줄 소중한 자산이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오컴의 면도날이 가진 위험성, 안톤 차일링거의 정보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등을 통해 과학적 낙관론에 철학적 무게중심을 더합니다. 과학적 성공이 곧 세계의 완전한 이해를 뜻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겸허한 태도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과학은 공식이나 성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등장합니다. 실패하고, 주저하고, 때로는 웃음거리가 될 위험을 감수했던 인간의 선택과 태도로 말입니다. 과학을 이해시키려 들기보다, 과학을 둘러싼 우리의 사고 습관을 살짝 흔들어보려는 시도입니다.